향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조향사 6인과의 사적인 대화
향수는 누군가의 취향을 표현하는 가장 대중적인 기호품. 향기로운 이면에는 창작자의 개인적 영감과 기억, 삶의 감각을 응축한 내밀한 세계가 있다. <보그>가 조향사 6인과 신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엿본 사적인 기록.

LBTY Gabi Chelariu
런던 소호에 자리한 리버티 백화점은 오랜 세월 영국을 대표해온 문화적 아이콘이다.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플로럴 패턴 ‘리버티 프린트’는 브랜드의 정체성이다. 지난 9월 그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향수 라인 LBTY가 한국에 론칭했다. 다섯 가지 라인업 가운데 <보그>가 주목한 작품은 ‘리버티 메이즈(Liberty Maze)’. 영국식 정원과 티타임, 코츠월드의 전원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향은 잔잔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활력을 담았다. 창작자는 루마니아 출신 조향사 가비 첼라리우다. 그녀는 리버티의 상징적인 ‘오차드 프린트’를 후각으로 재해석해 감각의 미로처럼 얽힌 스토리를 풀어냈다.

ORCHARD 리버티 백화점은 수만 가지의 프린트 아카이브를 보유 중인데, 이 가운데 여덟 가지만 골라 향수와 연결시켜 후각적 정체성을 부여했다. 오차드 패턴이 지닌 오렌지, 꽃과 줄기, 잎이 얽혀 격자를 이루는 듯한 모습에 매료됐다. 그리고 그 섬세한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 특정한 장면, 장소와 감정을 가정해봤다. 영국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티, 그리고 오렌지의 활기 넘치는 노트와 패턴 속에 있는 흰 꽃과 정원의 무성한 식물을 떠올렸다. 패턴의 여백, 식물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향의 구조와 정서적 흐름을 설계하는 원형이 됐다.
BRITANNIA 향수의 탄생 배경을 고려해 가장 영국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영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티타임의 고요한 성찰의 순간이 머릿속에 스쳤다. 혼자만의 시간 혹은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구상한 그림의 배경은 아름답고 야생의 활기로 가득 찬 정원. 여행을 떠난 영국 남서부 콘월(Cornwall) 지역의 초록빛 풍경과 청량한 공기, 거친 해안가 절벽의 기억을 상기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평온한 자연으로 회귀하길 갈망하기에,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향기를 만들고자 했다.
CITRUS GARDEN 오렌지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듯한 향을 상상해보라. 나무에는 탐스러운 빛깔의 오렌지와 섬세한 흰 꽃이 피어 있고, 그 사이로 부는 가벼운 바람에 향기가 흩어진다. 재스민 덩굴로 뒤덮인 정자에 앉아, 손에는 향긋한 얼 그레이 티가 담긴 찻잔을 들고 푸르고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생기와 차분함, 에너지와 사색이 공존하는 향이다. 사람들이 상쾌함, 편안함, 고양감을 느끼는 동시에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 듯한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ADMIRING NATURE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이른 아침에 정원을 산책한다. 살짝 서늘한 공기, 신선한 풀과 달콤한 건초, 이슬 맺힌 꽃의 향을 만끽하며 고요한 풍경에서 행복감과 에너지, 향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고향인 루마니아는 향수 월드와는 거리가 멀지만 풍부한 자연이 있기에 다양한 향을 탐구할 수 있었다. 작약과 백합, 라일락 등 다양한 꽃이 만발했던 할머니의 정원에서 나던 풍성한 향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MOLECULES 약학을 전공했던 대학 시절, 우연히 아로마 분자의 합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조향의 매력을 발견했다. 곧장 그라스로 떠나 아름다운 꽃과 다채로운 허브, 흙 내음이 가득한 뿌리가 맑은 에센스, 농밀한 앱솔루트와 레진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완벽하게 매료됐다. 그 후 수많은 밤을 실험실에서 보내며 원료를 익히고, 어코드를 만들며 향수를 빚어내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분자 하나가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온 과정은 지금 돌아봐도 신비롭다.
AUTHENTICITY 향이란 결국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존재하며 감정을 건드린다. 누구나 공유할 만한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향의 세계관을 수립하다 보면 향기에 진정성이 담긴다. 조향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건이다. 누가 이 향수를 사용할지, 향기가 그 사람에게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킬지 가늠하면 설렘마저 느껴진다.

DIPTYQUE Quentin Bisch
산호, 조개 속 진주모, 나무껍질, 수련, 사막의 장미. 무에서 유, 향이 없는 자연물에서 더없이 세련된 향기를 착안하며 후각의 지평을 넓힌 딥티크의 프리미엄 프래그런스 라인 ‘레 제썽스 드 딥티크(Les Essences de Diptyque)’. 조향사의 상상력과 탁월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 컬렉션에 또 한 가지 향수가 추가됐다. 이름하여 ‘라줄리오(Lazulio)’. 창작 모티브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공작의 깃털이다. 딥티크와 만난 조향사 쿠엔틴 비쉬는 깃털이 지닌 찬란한 매력을 다면적인 향으로 구상했다.

THE DEBUT 조향사로 일한 지 15년쯤 됐지만 딥티크와의 협업은 처음이다. 오랫동안 동경해온 브랜드이기에 제안받은 순간 꿈이 실현된 것 같았다. 그들이 쌓아온 프렌치의 우아함, 시대를 초월한 세련미, 향을 통해 시적이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스토리텔링 방식은 단연 독보적이다. 사적인 공간에도 딥티크의 ‘무스(Mousses)’ ‘포맨더(Pomander)’ ‘퍼 드 부아(Feu de Bois)’ 향의 캔들을 늘 켜놓을 정도. 작업한 모든 향수가 특별하지만, 이제껏 도전해본 적 없는 조향 작업이라 더 큰 영광이었다.
PEACOCK 공작과 깃털. 후각적 기준이 없어 오롯이 감정, 직관, 예술적 영감에만 의존해야 했기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떠올린 장면은 햇빛 아래 공작이 꼬리를 펼치는 때를 ‘처음’ 목격하는 누군가의 시선. 반짝이는 빛 아래 색채가 폭발하고, 고아한 움직임까지, 불꽃이 일어나는 듯한 순간처럼 느껴질 거라 여겼다. 그래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밝고 관능적인 향을 연상했다.
LAZULIO 푸르스름한 색조를 띠며 투명한 듯 불투명한 듯, 깊고 신비로운 매력의 준보석 라피스라줄리에서 향수 이름을 착안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공작의 깃털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화려함만 담아낸 것은 아니다. 푸른색과 초록빛의 향이 아니라 깃털의 생생한 색감과 반짝이는 대비, 섬세한 질감을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향에 몰입했다.
CONTRAST 깃털이 가장 먼저 주는 시각적 대비에 집중했다. 파랑과 초록, 중심의 밝은 노란색과 황금빛까지, 대조되는 색깔을 향기로 해석하고 싶었다. 섬광처럼 상큼하고 신선한 충격을 주는 루바브의 첫 향, 그리고 따뜻하고 감미로운 벤조인의 발삼 노트가 서로 대비와 조화를 이루도록 조합했다. 깃털이 주는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은 벤조인이 대변한다. 강렬한 시작과 포근하고 은은한 잔향에 베티베르, 로즈가 향을 한층 풍성하게 확장한다. 모든 창작물은 크리에이터의 일부를 담는다. 반대되는 어코드의 긴장과 균형을 통해 향이 줄 수 있는 이중적 매력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내게 ‘라줄리오’는 가장 흥미로운 도전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COMPOSER 중학교 1학년 때, 프랑스어 선생님의 향기에 매료돼 직접 향수 매장에 찾아가 일일이 하나씩 시향했다. 그것이 입생로랑 ‘오피움(Opium)’이란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조향사를 꿈꿨지만, 화학을 공부하다 포기했다. 이후 공연 예술 분야로 진로를 바꿔 연극과 연출을 공부했고, 5년간 극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연출과 작곡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는 결심으로 지보단(Givaudan)에 들어가 현재의 내가 되었지만 예술감독으로 일하던 시절이 큰 도움이 됐다. 연극을 이루는 많은 요소의 조율과 균형은 조향과도 닮은 면이 있다.
REACTION 향을 만드는 목표이자, 하나의 향수를 완성하기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응. 향을 맡은 누군가의 반응이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원료가 향 전체의 구조를 열어주는 열쇠가 되면서 놀라운 케미스트리를 완성한다. 그 과정은 정말 아름답다.

GUCCI BEAUTY Honorine Blanc
끊임없이 진화하는 개념인 여성성을 둘러싼 여러 정의 가운데 시대의 흐름에도 변함없이 언급되는 몇 가지 핵심어가 있다. 자기 확신, 자유, 창의성. 구찌 뷰티의 ‘구찌 플로라 골저스 가드니아(Gucci Flora Gorgeous Gardenia)’는 생동감 넘치는 플로럴 향으로 여성의 삶에 대한 찬사를 표현해왔다. 구찌 플로라 컬렉션을 리뉴얼하며 2021년 오 드 퍼퓸으로 재해석된 향은 이번 시즌 더 깊고 관능적인 ‘오 드 퍼퓸 인텐스’로 태어났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향을 탄생시킨 조향사 오노린 블랑은 우디 노트를 가미해 한층 대담하고 현대적인 여성성을 표현한다.

JOY 구찌 하우스는 젊고 세련된 아름다움, 경쾌한 여성미, 낙관적인 에너지가 절묘하게 공존한다. ‘구찌 플로라 골저스 가드니아 오 드 퍼퓸’은 행복과 여성성, 삶을 온전히 영위하는 감성적 DNA를 유지한다. 처음부터 ‘환희의 탄생’이란 하나의 구체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기쁨을 누리며 거침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을 그려냈다. 바로 그 여성이 저물녘 꽃이 만개한 정원을 거닐 때, 짙은 가드니아 향이 드리운 공기 속에서 자유와 고요한 힘이 그녀를 감싸안는 장면을 상상했다.
INTENSITY 신작 ‘구찌 플로라 골저스 가드니아 오 드 퍼퓸 인텐스’는 더 풍성하고 입체적인 향으로 진화되며 감정을 한층 증폭시켰다. 향의 강도와 밀도를 높이는 일은 단순히 향료를 더 많이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균형이 완벽하게 맞아야 한다. 각 향의 층위에 담은 의도가 느껴지고, 피부 위에서 아름답게 향이 변주되는 와중에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가드니아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핑크페퍼, 올리바넘, 파촐리처럼 풍부한 원료를 더해 복합적인 구성을 완성했다.
TEXTURE 향이 주는 관능미는 결국 ‘질감’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가드니아는 본래 부드러운 면을 지닌 향인데, 여기에 재스민 삼박과 따뜻한 샌들우드, 은은한 머스크를 레이어드해 두 번째 피부처럼 밀착되는 듯한 텍스처를 강조했다. 기존 플로라가 자유롭게 반짝이는 빛이라면, 인텐스 버전은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따뜻한 포옹에 가깝다.
VOYAGE 올해 두바이를 비롯해 중동 여행을 다녀왔는데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 향을 단순히 이미지로 소비하는 걸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서사, 존재감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추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일상에 향을 좀 더 깊이 있게 반영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향의 대비와 지속력, 피부 위에서 진화하는 향에 대한 감각이 이전보다 기민해졌는데, 결국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이번 향기의 창작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SWEET SENSATION 레바논에서 풍부한 재스민과 가드니아, 혀가 아릴 만큼 달콤한 디저트가 주는 감미로운 향기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석양이 질 무렵 정원을 걷다가, 활짝 핀 가드니아의 진한 향이 준 강렬한 기억도 남아 있다. 향수에는 우리가 외면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일부가 반영된다. 그 시절에 겪은 크고 작은 경험이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으로 오늘날 내가 만든 향수에도 담겨 있다.
EMOTIONAL 모든 창작은 ‘감정’에서 시작된다. 향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정의하고, 그 감정을 향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직관과 경험, 실험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원료를 다룰 때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온다. 어떤 노트는 예상과 달리 작용할 때가 있고, 놀랍게도 그런 반전이 향의 정수를 결정짓는 경우도 있다. 조향 작업이란 구조와 즉흥성 사이에서 완성하는 하나의 춤과 같다.
AUTUMN 말린 견과류, 부드러운 우드, 흙 내음이 감도는 머스크처럼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향이 떠오르는 계절을 좋아한다. 아늑하게 안기고 싶은, 포근한 감정의 고치 속에 들어가고 싶은 향기가 기억난다.

JO MALONE LONDON Anne Flipo
‘홀리데이’와 연관된 기억을 떠올리면 문화나 사람마다 다양한 답이 나오겠지만, 대다수가 공감할 공통분모가 있다. 찬란한 불빛, 달콤하고 은은한 요리의 향과 포근한 온기. 조 말론 런던은 그것들이 주는 훈훈한 감각을 신작 ‘샌달우드 앤 스파이스 애프리콧 코롱(Sandalwood & Spiced Apricot Cologne)’에 담아냈다. 샌들우드와 바닐라, 신선한 카다멈과 애프리콧의 조화로 연말의 설렘과 따뜻한 위로를 표현한 향. 핵심 ‘코’는 조 말론 런던의 오랜 협업 파트너이자 여성 최초의 마스터 퍼퓨머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안 플리포다.

WARM EMBRACE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포옹의 상반된 감각이었다. 한겨울에 보드라운 캐시미어 숄을 두른 듯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향이라고 할까? 부드럽고 크리미한 우디 노트에 생기 넘치고 톡 쏘는 스파이시한 향신료, 애프리콧 향을 더해 후각적 온기를 완성했다.
HOLIDAY 인도에서 연말을 보내며 경험한 강렬하고 생기 넘치는 향신료도 향수 창조에 큰 도움이 됐다. 단순한 축제보다는 ‘감각의 재발견’ 같은 시기였다. 빛, 온기, 향이 어우러지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을 다시 느낀다. 그 순간을 향으로 포착했다.
BALANCE 애프리콧은 지나치게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는 노트다. 관건은 우드와 스파이스 계열로 섬세한 균형을 맞추며 경쾌하고 세련된 향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차갑고, 달콤하고, 따뜻한 향취가 어우러진 다층적 구조를 만들었다. 그 상반되고 생동감 넘치는 앙상블을 마지막으로 감싸는 것은 바닐라. 한층 깊은 여운을 남기도록 조향했다.
INTUITION 새로운 향의 시작부터 완성 단계까지 나는 언제나 직관을 따른다.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 구체화된 다음에야 비로소 한발 물러서서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향기의 첫 스케치를 그린다. 시행착오도 많지만 초반에 겪는 혼란조차 창작 과정의 일부라 여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리 잡고 정돈되기 전에는 흩어져 있을 여유도 필요하니까.
SIMPLICITY 조 말론 런던은 명료함 속의 우아함을 중요시한다. 모든 향은 제각기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를 경험하는 소비자가 직관적으로 서사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우며, 단순한 스토리텔링 속에서 조향사와 개인으로서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브랜드의 프래그런스 글로벌 헤드 셀린 루(Céline Roux)와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며, 차근차근 향의 컴포지션을 완성해나가는 협업은 늘 새롭고 흥미롭다.
CARPE DIEM 시간 여유가 있을 때면 밴에 짐을 싣고 로드 트립을 떠난다. 익숙한 길을 완전히 벗어나 숨은 장소를 발견하고, 자연 속에서 계획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경험을 즐긴다. 내 삶의 모토와 같다. 분방하면서도 자연과 가장 가까운 면면은 내 캐릭터와 내가 만들어낸 향수에 깊이 스며 있다.
BOND 향은 기억이자 감정인 동시에 누군가의 내면과 외면을 담아내는 정체성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개인적이고, 우리와 타인을 연결해주는 특별한 힘도 지닌다.

BYREDO Jérôme Epinette
깨끗한 순백 향의 대명사가 된 ‘블랑쉬’ ‘집시 워터’ ‘발 다프리크’ ‘모하비 고스트’ 등 바이레도의 조향사 제롬 에피네트의 후각에서 탄생한 히트작은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부족할 정도다. 2023년 ‘데저트 던’ 이후 선보이는 열 번째 향수의 이름은 ‘알토 아스트랄(Alto Astral)’. 직역하면 ‘고양된 기분’을 뜻하는 신작은 축제처럼 빛나는 낙관의 순간을 향으로 표현했다. 에피네트는 실질적 경험과 환상을 결합해 언제나 감정과 서사를 우선시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에도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찰나의 기쁨을 피부 위에 간직할 수 있도록 향기로 구현했다.

FROM BRAZIL 삼바 리듬, 해변의 바람과 찬란한 햇빛, 리우데자네이루의 거리에서 달리는 오토바이 등. 브라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향을 창작했다. 특유의 긍정적인 활기는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는다. 다만 특정 문화의 향을 옮길 때는 너무 직접적이지 않도록 재해석하는 것이 철학. 리듬과 에너지, 감정을 향으로 번역하되 예상 가능한 원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VIBRANT 향을 처음 뿌릴 때 경쾌하고 반짝이는 울림이 전해지길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톱 노트에 배치한 것이 알데하이드와 코코넛 조합. 공기처럼 가볍고 톡 쏘는 듯한 청량감을 지닌 알데하이드와 태양의 온기가 느껴지는 코코넛은 기분 좋은 첫인상을 남긴다. 향의 중심축은 머스크, 인센스, 샌들우드 조합이다. 깊이 있고 관능적인 면을 더하지만 결코 톱 노트의 밝은 기운을 압도하지 않도록 세밀하게 조율했다. 날씨가 완벽한 어느 날 저녁이 떠오르는 부드럽고 아련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바이레도만의 보틀 디자인도 너무 멋지지만, 만약 제약이 없다면 로마 시대 향수병으로 사용되던 금테를 두른 플라콘(유리병)에 담아보고 싶다. 빛이 유리를 통과하며 반짝이는 모습이야말로 이 향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니까.
MEMORIES 첫 후각적 기억은 어머니의 향수 가게. 수백 가지 향에 자연스럽게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양한 향이 뒤섞인 공간은 혼란스러웠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또렷이 떠오르는 향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조향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향과 원료의 인상을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해 나만의 ‘향 라이브러리’를 구축했다. 창작물을 위한 팔레트처럼 활용한다.
HISTORIC 역사적인 향수 포뮬러를 수집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좋아한다. 당시 향을 완전히 알 순 없지만 밀도 높고 투박한 질감, 지금보다 더 단순한 구조를 상상하며 오늘날에도 착용할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보곤 한다. 예를 들어 수지나 인센스, 몰약이 주는 안정적인 분위기는 유지하되 플로럴 노트와의 대비로 좀 더 가벼운 향을 완성할 수 있다. ‘오 드 코롱’이란 향수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 이전, 향수로 활용됐던 로즈메리와 알코올 중심의 ‘헝가리 워터’는 사이프러스, 오크모스처럼 우디한 베이스를 더해 중독성 있는 잔향으로 탄생시킬 수도 있다. 이토록 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LEGACY 향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문화적 변화, 삶의 면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유물로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 감동을 주는 문물이다. 순간적인 기쁨을 담아낸 향이지만, 그 안에 지속적인 감정의 울림을 담았기에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알토 아스트랄’을 찾는다면 최고의 보상일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일부라도 공감해준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 아닐까?

AĒSOP Céline Barel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 찰나의 빛. 이솝은 앰버의 전형적인 구르망 노트를 과감히 배제하고 미니멀리즘의 미학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향수 ‘어보브 어스, 스테오라(Above Us, Steorra)’를 지난 9월 공개했다. 앰버의 관습적 무게를 덜어내고 천상의 여백, 철학적 깊이를 담은 이 작품은 별빛처럼 빛나면서도 땅에 뿌리 내린 향의 균형을 구현한다. 야심작의 창작자는 조향사 셀린느 바렐. 2015년 ‘테싯’, 2025년 상반기에 소개한 ‘오르너’에 이어 이솝과 함께한 세 번째 향수를 선보인 그녀는 라다넘, 대담한 카다멈을 중심으로 절제와 관능이 공존하는 앰버 향을 창조했다.

PHILOSOPHICAL 향수의 첫 번째 아이디어는 유성. 매우 단순하면서도 시적인 발상이었다. ‘밝게 타오르는 찰나의 순간을 병에 담아낼 수 있다면 과연 어떤 향기가 날까?’라는 질문이 시작이었다. 마유즈미 마도카(Mayuzumi Madoka)의 시 ‘유성’, 다양한 앰버 색조의 이미지가 더해진 브리프는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대지에서 위를 바라봤을 때, 그리고 유성을 목격했을 때 사람들이 어디론가 이끌리는 듯한 경험을 줄 수 있는 향을 상상했다. 눈부시고, 뜨겁고 차가운 동시에 복합적인 향신료 향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자취를 남기는 그런 향기. 그리하여 별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우주처럼 광활하고 오래된 시간의 깊이와 철학적 스케일이 향수의 중심을 이룰 수 있도록 향을 구성했다.
BARE AMBER 이솝은 앰버 향수를 원하면서도 앰버라는 장르를 규정해온 기존 성분을 배제하길 원했다. 구르망 노트도, 노골적인 달콤함도, 순간적으로 스치는 과일 향을 벗어나도록 말이다.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앰버로 ‘베어 앰버’라는 컨셉을 고안했다. 이름처럼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걷어내고, 근원적인 앰버를 만들고자 했다. 원초적이고, 금욕적이며, 진정한 기쁨은 과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온다는 생각을 담았다. 단순하지 않지만 순수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매우 정밀하고 섬세한 균형감을 유지하며 작업했다.
CARDAMOM 밝게 타오르는 별의 중심은 광물처럼 단단하고 둥글지만, 가장자리는 불꽃이 궤적을 그리는 모습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카다멈, 프랑킨센스, 페퍼, 커민 등 향신료를 고농도로 사용해 따뜻함과 차가움이 어우러지는 생동감 있는 조화를 만들어냈다. 앰버는 대비를 이루는 시트러스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방식으로는 이 향수의 서사가 너무 전형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시트러스 대신 카다멈으로 상쾌하고 대담한 스파이시함을 품은 첫 향은 시간에 따라 점차 따뜻하고 풍성한 잔향으로 변모하는데, 그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ELEVATING 이 향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고양’. 벅찬 감정을 주고, 자유로운 느낌의 관대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앰버 향수가 밀도 높고, 파우더리하며, 묵직한 인상을 주는 반면 이 향수는 중력을 거스른다. 노트 사이사이에 여백을 두다 보니 숨 쉬는 듯 공기처럼 가벼우며 신비롭다.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원료 외에는 최대한 절제했기에 실제 포뮬러는 한 페이지로도 충분할 만큼 간결하다.
NOSTALGIA 카다멈과 함께 앰버의 절제미를 돋보이게 해준 원료는 향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시스투스 라다넘(Cistus Labdanum).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기에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수지뿐 아니라 식물 줄기와 잎도 함께 사용했다. 수지가 장작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톡톡 튀는 강렬함을 주는 반면, 줄기와 잎은 신성한 분위기를 낸다.
ART PARTNER 이솝은 개념적 깊이를 고심하게 만드는 가장 예술적이고 지적인 파트너다. 추상적 아이디어를 건네면서 신선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브랜드의 본질인 고대, 그리스 철학자, 신탁, 하늘을 읽는 점성술사가 떠오르는 이번 향수 역시 사색적이고 감각에 깊이 스며드는 경험을 선사한다.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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