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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걸즈’가 알려준 책 ‘리시스트라타’

2025.11.20

영화 ‘더 걸즈’가 알려준 책 ‘리시스트라타’

영화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참여하는 여러 일 가운데 영화제가 있다. 영화제 상영작을 선정하는 작업부터 영화제 상영작에 대한 글 쓰기,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진행, 영화 해설자로 나서기 등이 관련된 일들. 그 시간을 통해 참으로 많은 영화를 봐왔고 많은 사람과 만났다. 달리 쓰면, 그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처음으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다. 체득하고, 배우는 과정이자 시간이었다. 영화와 세상, 영화와 세계를 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것에는 음악, 미술, 장소, 역사 등 수없이 많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은 영화가 일러준다. 어떤 책은 영화를 계기로 비로소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더 걸즈’ 스틸 컷.
영화 ‘더 걸즈’ 스틸 컷.

하반기 여러 영화제를 오가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이제야 책 한 권을 읽는다. 이 역시 영화 덕분이다. 올해 스웨덴영화제 상영작 중 하나인 마이 제터링 감독의 <더 걸즈>(1968)가 불러낸 한 권의 책. 기원전 411년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썼다는 희극 <리시스트라타>(지만지드라마, 2024). 영화는 이 책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판본이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결코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책이 눈앞에 도착해 있다.

아리스토파네스 ‘리시스트라타'(2024, 지만지드라마). Yes24

<더 걸즈>는 스웨덴 태생의 배우 마이 제터링이 스웨덴을 떠나 감독으로서 경력을 다져가던 시기에 만든 작품이다. 마이 제터링은 <고통>(1944), <음악은 나의 미래>(1948) 등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오랫동안 배우로 활동했지만, 1947년 아예 터전을 영국으로 옮겨 연출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해나간다.

“더 이상 제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그 이상을 실천하고 싶어요. 배우로서 그런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아요. 작가, 예술가, 작곡가는 자기 방에 들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창작할 수 있죠. 하지만 배우로서 저는 집에서 전화기 앞에 앉아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어요.”

당시 마이 제터링이 했다는 어느 인터뷰의 일부가 말해주듯, 그녀는 누구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리에 있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만들어가기 위한 여정을 선택했다. <더 걸즈>도 그 과정의 영화다. 영화에는 희극 <리시스트라타>를 순회공연에 올리려는 여성 배우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모티프이자 근원이며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 희극에 대해 말해보자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여성들이 남성과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일종의 섹스 스트라이크(Sex Strike)를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성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꿰뚫고 허물어뜨리려는 주체적이고 기발하며 파격적인 여성들의 유희적 움직임이다. 굉장히 도전적인 내용을 코믹극으로 풀어내 당시에도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희극이 함유한 진취성은 2003년 전 세계에 일었던 반전 평화 운동과 맞물렸다. 그야말로 세기를 초월한 고전의 영향력이다.

파업의 핵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리시스트라마 역의 리즈(비비 안데르손), 미리네 역의 마리안(해리엇 안데르손), 칼로니케 역의 구닐라(군넬 린드블롬). 영화 속 희극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세 여성은 무대 밖 현실에서 그들 각자의 사정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 하나같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결혼, 가족제도에 얽혀 있고 연애 관계 안에서 갈등한다. 남편, 애인, 아이들(유일하게 리즈만이 아이가 없다)을 어떻게 돌보고, 사랑할 것인가. 혹은 그들과 어떻게 헤어지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배우로서 살아갈 것인가. 물론 이들은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이 맡은 인물 사이에서 오는 격차 또한 실감하며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다. ‘여성 배우’로서 겪는 난제가 영화를 감싼다.

이 영화의 힘은 그런 내밀한 갈등, 심리적 상황을 굉장히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영화 형식과 구성으로 풀어내는 데 있다. 무대 공연과 무대 밖 현실이 오가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인지 꿈인지 상상인지 과거인지 모를 혼재된 상태가 이어진다. 드라마 중심의 서사 전개에 골몰하기보다는 느닷없는 장면 전환, 충동적 움직임이 유머와 농담, 풍자로 읽힌다. 보는 내내 실소와 폭소 그 사이 어디쯤에서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데 그 속에 묘한 페이소스가 있다.

원작 책의 주석에도 언급돼 있지만, 고대 그리스 연극배우들은 하나같이 남성이 가면을 쓰고 여성 배역을 연기했다.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리시스트라타>가 태어났다는 것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한발 더 나아가 마이 제터링은 그들의 가면을 벗겨내버렸다. 여성이 여성 역할로 무대에 오른다. 그녀들의 구체적인 얼굴, 목소리, 육체로 무대 위를 가로지르고 무대를 휘젓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1960년대라는 시대 상황, 현실적 조건을 완전히 부인하거나 모르는 체하거나 왜곡할 생각은 없다. 앞서 말했듯, 리즈, 마리안, 구닐라가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며 그에 따른 판단과 입장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고 보여준다. 남성 중심의 가족주의 사회를 완전히 버리고, 재건할 수 있을까. 그 물음 앞에서 그녀들은 저마다 흔들리고, 갈등하지만, 길을 찾으려고 분투할 뿐이다. 물론, 이 영화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리즈의 선언은 꽤 통쾌하다. 원작에는 없는 영화적 해석으로서 충분히 파격적인 결정이다.

어떻게 영화 이미지로 그려낼 것인지 고민하며 능수능란하게 풀어간 실험적인 영화, 배우와 연기, 배우와 역할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느슨한 조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레퍼런스,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전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작품, 날카롭지만, 결코 냉소적이지는 않은, 페미니즘 영화의 계보 안에서 반드시 꼽아야 하는 작품. 원작과 영화를 함께 두고 더 깊이 넓게 다르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장면 하나하나 연출한 방식 또한 빛나기에 더 파고들고 싶다. 2025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살아 있는 작품들을 만났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일독과 일견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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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걸즈' 스틸 컷,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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