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게 되는 전시
아쉬운 점만 떠오르는 연말, 부재와 여백의 의미를 톺아보는 전시 셋.
거기 자리 있나요?
<Wanderbound>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자리를 바꾸는 두 여자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비빌 만하겠다’ 싶은 언덕을 찾으면 땅은 곧 흩어지고, 미끄러지죠. 두 영상 속 여성들은 평행 우주처럼 대구를 이루며 계속해서 정착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이성은 작가의 개인전 <Wanderbound>는 두 여성의 장소 교체와 행위 반복을 통해 정착과 이주에 대한 동시대의 정서를 조명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관람객은 자리가 없을 때의 감각을 더 또렷이 느끼게 되죠. 리드미컬하게 배치한 전시장의 의자와 계단, 허물어진 벽 사이를 걷다 보면 머물 만한 자리의 시간적, 관계적, 제도적 조건을 감각적으로 탐색해보게 됩니다. 관람객은 끝내 적당한 자리를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어요. 바로 끊임없이 자리를 찾고 있는 자신의 존재감입니다. <Wanderbound>전은 ‘내 자리’가 있어야 존재가 증명된다는 믿음을 의심해보게 합니다. 인스타그램 @faction.seoul




보내지고, 발견되고
<sent in spun found>
여행을 떠났을 뿐인데 내가 있던 곳이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12월 13일까지 열리는 전시 <sent in spun found>는 어딘가로 보내지거나 보내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에 주목합니다. 작가 차연서와 허지은 2인전인 이번 전시는 허지은의 가족사에서 시작돼요. 전시장 입구 역할을 하는 ‘라이에로 가는 길’(2025)은 작가가 고향 하와이 라이에(Lā‘ie)로 가는 길을 기록한 영상으로, 가족과 종교적 소명을 위해 지났던 길이기도 하죠. 작가는 그들이 믿었던 ‘이 땅을 성전으로 삼으라’라는 신의 명령이 어떻게 그들을 고립시키고, 권력을 구축했는지 시사합니다.
한편 차연서 작가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닥종이를 작업 매체로 삼으며 삶을 연결하고 돌봅니다. 채색된 닥종이를 오려 몸을 그리는 연작 ‘축제’(2023~)의 창작 과정은 죽은 이를 위한 불교 의식인 ‘천도재(薦度齋)’를 연상시켜요. 가까운 이들이 남긴 것을 곱씹고, 이해하고 공유해 이야기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가들의 애도는 전시를 감상하는 이들과 공명합니다. 인스타그램 @doosanartcenter_gallery



채우는 여백
<Counterform>
타이포그래피 용어인 ‘카운터폼(Counterform)’은 글자 사이 빈 공간을 의미합니다. 한글 ‘ㅇ’의 내부나 ‘ㅅ’의 열린 공간이 그 예죠. 오종과 엠버 토플리세크, 두 작가는 카운터폼처럼 빈 공간이 형태와 동등해질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오종은 실과 유리, 천, 거울 등으로 제3의 공간을 생성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세계를 이해할 새로운 시선을 제공합니다. 그가 물리법칙을 비틀어 펼쳐놓은 조형적 우주는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난 듯 신선한 경험을 안기죠.
2025년 이노베이트 그랜트에서 어너러블 멘션(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엠버 토플리세크는 찰나에 주목합니다. 불분명한 초점으로 스쳐 가듯 유리 위에 얹힌 상은 시간의 밀도와 사건의 배후를 암시해요. 동시에 이 어렴풋한 상은 불분명한 기억 같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여백을 포함해야 대상의 전체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결핍을 보는 눈도 새로워져야 하지 않을까요? 12월 6일까지. 인스타그램 @thisweekendroom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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