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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패션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2025.12.02

미국은 패션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패션계의 패권은 늘 파리가 쥐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패션 하우스를 론칭하고 컬렉션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현대 패션의 아버지, 찰스 프레데릭 워스는 커리어 내내 파리에서 활동했습니다. 현대 여성복의 원형을 만든 코코 샤넬은 방돔 광장 근처의 캉봉가에서 디자이너로서 발걸음을 내디뎠고, ‘뉴 룩’과 ‘르 스모킹’의 탄생지 역시 파리였죠. 지금도 파리 패션 위크는 뉴욕, 런던 그리고 밀라노 패션 위크와 비교 불가할 정도의 위상과 규모를 자랑합니다.

헬무트 랭 1999 봄/여름 컬렉션. Getty Images

물론, 이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내민 국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미국이죠. 1998년, 헬무트 랭은 파리를 떠나 9월 중 뉴욕에서 컬렉션을 선보이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당시 뉴욕 패션 위크는 제대로 된 체계가 부재한 상태였는데요. 브랜드들은 파리 패션 위크가 끝나고 한참 뒤인 11월에 쇼를 진행했고, 뉴욕 패션 위크를 향한 관심도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헬무트 랭이 뉴욕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에 거점을 둔 대부분의 브랜드 역시 그를 따라 9월에 쇼를 열기로 결정합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뉴욕 패션 위크는 장대한 ‘패션 먼스’의 시작을 알려 왔죠.

마이클 코어스의 셀린느 데뷔 컬렉션. Getty Images
루이 비통을 이끌던 시절, 마크 제이콥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에서 선보인 디자인. Getty Images

1990년대 후반, 미국의 기세는 분명 패션계를 집어삼킬 정도였습니다. 마크 제이콥스가 뉴욕을 지키고 있었고, 1999년에는 알렉산더 맥퀸이 뉴욕의 한 부두에서 쇼를 공개했죠. 미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유럽 하우스를 맡는 일도 잦았습니다. 당시 가장 성공한 디자이너로 꼽히던 마크 제이콥스와 톰 포드는 물론이고, 마이클 코어스와 나르시소 로드리게스는 각각 셀린느와 로에베를 이끌었죠. 우리 모두 알고 있듯, 패션계의 위계질서를 뒤엎으려던 미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패권은 다시 파리가 쥐었죠.

Courtesy of Chanel

파리가 또 한 번 흔들리고 있는 걸까요? 지금 럭셔리 하우스들의 시선은 프랑스의 수도가 아닌,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로 향했습니다. 마티유 블라지는 내일 오전, 뉴욕에서 첫 샤넬 공방 컬렉션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구찌와 디올을 이끄는 뎀나와 조나단 앤더슨은 ‘이직’ 후 처음으로 선보일 크루즈 컬렉션 무대로 각각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선택했고요. 루이 비통 역시 최근 뉴욕에서 2027 크루즈 컬렉션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했고, 몽클레르는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2026 가을/겨울 컬렉션을 공개할 예정이죠. LVMH 그룹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루이 비통과 디올, 케어링 그룹 전체 매출의 절반을 담당하는 구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비상장 럭셔리 브랜드 샤넬 그리고 가장 뿌리 깊은 스키웨어 브랜드가 모두 미국에서 쇼를 개최하는 거죠.

뉴욕에서 열린 공방 컬렉션 피날레에 모습을 드러낸 칼 라거펠트와 버지니 비아르. Getty Images

이 모든 브랜드가 아무런 명분 없이 미국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샤넬부터 살펴볼까요? 칼 라거펠트가 마지막 공방 컬렉션을 선보인 장소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었습니다. 그러니 뉴욕에서 열릴 마티유 블라지의 첫 공방 컬렉션은,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부임한 1983년부터 그의 오른팔 버지니 비아르가 하우스를 떠난 2024년까지 이어진 ‘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추도사이자, ‘뉴 샤넬’의 시작을 자축하는 축포가 될 예정이죠. 동시에 하우스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유산, 그리고 ‘칼 라거펠트’라는 뿌리를 결코 잊거나 무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2016 구찌 크루즈 컬렉션 중. Getty Images

구찌 역시 뉴욕과 인연이 있습니다. 1953년, 구찌는 맨해튼에 브랜드 최초의 해외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 브랜드’로서 발돋움을 시작했죠. 뉴욕은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뎀나를 연결하는 매개입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크루즈 컬렉션 무대도 뉴욕이었거든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켈레는 5일 만에 모든 것을 준비해 2015 가을/겨울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여야만 했고, 뎀나는 2026 봄/여름 시즌 중 영화와 룩북 형태로 첫 컬렉션을 공개했죠. 두 디자이너 모두 크루즈 컬렉션이 사실상의 ‘정식 런웨이 데뷔’가 되는 셈입니다. 어쩌면 구찌가 뉴욕을 선택한 배경에는, ‘뎀나가 구찌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젖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켈레가 남긴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면서 말이죠.

디올 2018 크루즈 컬렉션 중. Getty Images
Dior Men 2023 Resort
뉴욕에서 열린 루이 비통 2020 크루즈 컬렉션. Getty Images

이 공식은 디올에도 적용됩니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첫 디올 크루즈 컬렉션을 연 장소 역시 로스앤젤레스였거든요. 2022년에는 킴 존스가 로스앤젤레스 특유의 낙관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상징하는 곳인 베니스 비치에서 리조트 컬렉션을 공개했습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5월 13일, 전임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로스앤젤레스를 무대 삼아 자신의 첫 디올 크루즈 컬렉션을 펼칠 예정입니다. 2019년 5월, JFK 공항 TWA 플라이트 센터를 점령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내년 5월 20일 뉴욕에서 루이 비통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이며 7년 만에 ‘빅 애플’로 귀환합니다. 몽클레르는 미국을 대표하는 겨울철 여행지이자 ‘겨울 스포츠의 성지’로 알려진 아스펜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요.

낭만적인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의 운명적인 연결 고리는 잠시 뒤로한 채 본질에 집중해봅시다. 크루즈 컬렉션은 3월과 9월, 그러니까 ‘패션 먼스’ 중 열리는 봄/여름이나 가을/겨울 컬렉션보다 상업적인 성격을 띱니다. 크루즈 컬렉션에 등장한 아이템들은 매대에 걸려 있는 기간 자체가 다른 아이템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죠. 하우스의 정체성 확립과 이미지 구축을 담당하는 것이 패션 위크 중 선보인 메인 컬렉션이라면, 매출을 올리며 실질적인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은 크루즈 컬렉션입니다. 그래서 크루즈 쇼는 결국 ‘돈이 몰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죠. 실제로 중국이 럭셔리 업계의 핵심 시장으로 떠오른 2010년대 후반, 프라다와 샤넬이 각각 상하이와 청두에서 쇼를 선보였습니다.

지난 8월, 뉴욕 매디슨가에 오픈한 디올의 새로운 플래그십 스토어. @dior

급작스레 불어오는 ‘미국 광풍’의 이면에도 같은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럭셔리 업계의 매출 상승폭이 몇 년째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만큼은 꾸준히 상승폭을 유지하고 있거든요. 2025년 3분기, 미국 내 에르메스와 LVMH 그룹의 매출은 각각 14.1퍼센트와 3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이는 다른 국가들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죠. 케어링 그룹은 3분기 내내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 등 대부분 지역에서 매출 감소를 겪었지만, 미국에서만큼은 매출이 3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소득 역시 무시할 수 없는데요. 미국의 1인당 GDP는 프랑스의 약 두 배 수준입니다. 럭셔리 브랜드가 미국에 집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브랜드에게 판매 부진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며, 창의성과 상업성이 공존하는 점이 패션이라는 예술만의 매력이니까요.

로에베 데뷔 컬렉션의 피날레에 등장한 잭&라자로 듀오. 미국을 상징하는 패션 아이템과도 같은 폴로 랄프 로렌의 폴로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눈에 띈다. Loewe 2026 S/S RTW

우리는 어쩌면 커다란 ‘주권 다툼’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90년대 말에는 실패로 돌아간 미국의 쿠데타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일단 그 초석은 완벽하게 다졌습니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때마침 미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로에베의 지휘봉을 잡았고요(스키아파렐리의 다니엘 로즈베리와 루이 비통의 퍼렐 윌리엄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내년 2월 있을 2026 가을/겨울 시즌의 뉴욕 패션 위크는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봐야겠습니다.

사진
Getty Images, GoRunway, Instagram,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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