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련 작가의 창작이 시작되는 곳
미술가의 아틀리에는 창작의 시작이다. 머릿속에서 구상할 수 있는 문학가와 달리 물감과 캔버스를 놓을 공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무엇일까? 파주 헤이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3층짜리 멋진 건물을 보면 누구라도 호기심을 가질 만하다. 간판도, 눈에 띄는 장식도 없지만 내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주인이 김혜련 작가라는 것을 최근 알았다. 올해 조지아 트빌리시 국립 실크 박물관과 서울 우손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기에, 미술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미술가다.
이 건물의 큰 특징은 건축가 조민석과 김혜련 작가 모두 신인이던 20년 전에 세웠다는 점이다. 당시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하던 김 작가는 헤이리에 작업실을 짓기로 결심했다. 물가가 비싼 서울에서 여유 있는 공간의 작업실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열화당 출판사 대표의 추천으로 헤이리를 돌아보다 덜컥 계약한 것. 당시만 해도 싱그러운 풀 냄새 가득한 허허벌판에 이 부지만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누가 선점했다가 포기한 땅이었다. 김 작가는 조용한 주택가로 가고 싶었는데, 작가의 아틀리에는 공공성이 있다는 이유로 비즈니스 구역을 추천받은 것이다. “그때 성곡미술관에 건축 전시를 보러 갔다가 딱 한 점의 모형에 매료됐습니다. 건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낯선 이름이었지만, 남편도 나도 좋은 건축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사무실로 찾아갔지요. 그렇게 조민석 건축가와 20년 인연이 시작됐어요.”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젊은 미술가와 건축가는 수십 번 사전 미팅을 하며 소통을 시작했다. 김 작가의 남편은 클래식 녹음 전문가였기에, 이 집 설계는 그야말로 예술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터전이었다. 처음에 1층은 김 작가의 작업실, 3층은 남편의 음향 녹음실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김 작가의 작품이 늘어나면서 남편이 작업실을 옮겨 이제는 3층도 그녀 차지다. “재테크에는 전혀 관심 없이 작품 활동만 해오다, 작가로서 큰 작업실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지요. 서울 아파트를 팔고 대출받아서 작업실을 지은 것은 지금 돌아봐도 참 잘한 일이에요. 이곳에서 큰 작품을 마음껏 그리지 못했다면 나를 대표하는 대형 작품 연작 ‘반구대의 고래’ ‘훈민정음’ ‘예술과 암호’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고마운 곳이지요.”
김 작가의 작품은 프랑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독일 홈볼트 포럼 동아시아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스페이스K 등에 대거 소장돼 있는데, 대부분 대작이며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조 건축가와는 여전히 우정을 나누는데, 김 작가가 작품 활동에 몰두하느라 이곳에서 거의 나가지 않기 때문에 만남이 잦진 않다. 조 건축가의 행사와 김 작가의 전시 오프닝에서 가끔 조우하는 정도다. 알려져 있다시피 조 건축가는 스페이스K, 페이스갤러리 서울, 양평 구하우스, 송원아트센터 등의 예술 공간을 설계한 스타 건축가다. 2014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런던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설계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김 작가의 아틀리에를 지었다니, 그들의 인연이 흥미롭다.


“1층으로 들어오면 왼쪽에 다이닝 룸이 있고, 오른쪽에는 작업실이 있어요. 식탁과 소파가 있는 다이닝 룸은 유럽 시골의 작은 집 같다고 다들 말씀하십니다. 1층 작업실은 3층에서 그린 작품을 설치해놓고 전시를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합니다.” 다이닝 룸에는 김 작가의 초기 작품과 남편의 직업을 짐작하게 하는 피아노, 턴테이블이 놓여 있다. 1층에서 눈에 띄는 그림은 그녀가 30년 전 베를린 유학 시절 낳은 큰아들을 산부인과에서 안고 있는 자화상과 두 아들의 어린 시절을 그린 수묵화다. 요즘은 구상화를 그리지 않는 그녀이기에 가족애를 담은 초기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다. 한쪽의 벽난로는 겨울마다 사용하는 것으로, 거실이 따뜻하게 유지되는 한편 마시멜로와 고구마도 구워 먹을 수 있는 낭만적 아이템이다. 통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데, 담장을 올리지 않는 헤이리의 특성을 고려해 작은 정원을 만들어 외부와 차단했다. 측백나무와 회화나무가 사시사철 푸른 정취를 자아낸다.

1층 다이닝 룸의 창은 열리지 않는 통유리였는데, 환기를 위해 열리는 구조로 교체한 것이 김 작가는 아직도 미안하다. 시간이 지났어도 건축가의 의도를 100% 존중하고 싶은 따뜻한 마음에서다. “처음에 콘크리트 벽 외관에는 이끼를 가득 심었습니다. 이끼 정원 건물이었지요. 그때는 조 건축가도, 저도 젊었기에 색다른 건물로 완공하고 싶었거든요. 비용도 크게 들지 않았고요. 하지만 살다 보니 관리가 쉽지 않아서 지금은 당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시들어가는 이끼를 바라보는 것도 아주 의미 있었어요. 게다가 이끼가 없어도 여전히 시크한 건물이니까 흡족합니다.”
김 작가는 예술가답게 낭만적으로 작업실의 20년 역사를 회고한다. 이곳은 작업실로만 사용할 작정이었지만 어린 두 아들을 돌봐야 했기에 2층은 침실이 되었고, 3층은 작업실 두 곳으로 구성했다. 예술가의 아틀리에인 만큼 층고가 높고 햇살도 은은하다. 서재로 만든 오른쪽 작업실에선 주로 연구를 한다. 그녀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면 적어도 10년은 파고드는 치열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분청’ ‘고래’ ‘월인천강지곡’ 등 그간 연구해서 작품으로 발표한 시리즈는 미술계의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에 우손갤러리와 OCI 미술관에서 선보인 ‘정적의 소리’ 100점 연작도 베를린 작업실을 10년간 오가며 완성한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

“베를린에도 작업실이 있어요. 그곳에서 유학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아서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을 받았거든요. 베를린 숲속의 작업실에서는 인간의 언어와 문명의 기계음이 멈춘 상태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곳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완성한 100점 연작이기에 애정이 깊어요. 작업실이 작가의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증거지요.” 베를린 숲속 작업실에서 영구적으로 머물 수 있었지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 얼마 전 슈프레강 변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100년 전에 지은 공장 건물로, 예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흐르는 물살을 보니 영혼도 맑아지는 것 같아 활력이 생긴다.
“헤이리는 20년간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작가는 정신적 영역에서 머물 곳과 네크워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혼 여성 작가는 물과 기름처럼 가정과 일을 양립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15년 동안 베를린에 가지 못했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인 2015년부터 다시 베를린을 오가기 시작했지요. 다행히 가족이 협조를 많이 해줍니다. 이제 더 이상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좋아요. 오히려 아이들이 요리를 더 잘한답니다.” 헤이리에 살면서 아이들은 자연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큰아들은 현대무용가, 늦둥이 작은아들은 전통 활을 만드는 장인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3층 작업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거나 그림을 그린다. 서울로 외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친구들도 그녀를 잘 불러내지 않을 정도다. 4층 루프톱에서는 헤이리의 풍경이 내려다보여 낭만적이다. 와인 한잔을 즐기거나 유화 작품을 말리기도 좋다.


내년에는 베를린 훔볼트 포럼 100주년 특별전에 초대받아 ‘훈민정음’ 연작을 전시할 예정이며,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반구대의 고래> 전시도 선보인다.
그녀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뭘까? “엄밀하게 말해서 나와 관람객의 구별이 없어요. 작업할 때 내가 첫 관람객이기 때문이죠. 내가 만족스러울 때가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작가의 파장이 응집된 것이 작품이기에, 뭘 전달해야 한다는 의도는 없어요. 내가 느낀 감정에 공명한다면 관람객도 같은 감동을 느낄 겁니다. 내가 탐구한 예술 세계와 감동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작가의 심신이 진동하면서 몰입할수록 관람객도 공감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메시지가 없을수록 작품이 더 성공적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역설이다. 메시지는 작가가 아니라 관람객이 발견하는 것이기에, 오늘도 그녀의 작업실엔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소영(미술 전문 저널리스트)
- 사진
- 김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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