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점으로 나눈 고요한 대화, 김환기와 아돌프
예술가들이 그려내는 보이지 않는 영감의 지도는 미술사를 더욱 공고히 합니다. 이를 통해 후대의 관객은 거장들의 상징적 만남을 경험하기도 하죠. 내년 1월 10일까지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추상의 언어, 감성의 우주: 아돌프 고틀립과 김환기>전은 2명의 거장이 구축한 고유한 추상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철학적 토대 위에서 치열하게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탐구해온 두 작가가 그려내는 보편적 감성과 경험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경한 아돌프 고틀립의 회화와 한국 근현대미술의 상징 격인 김환기의 회화가 미묘하고 조심스럽게 겹치는 풍경 안에 있다 보니, 내가 사는 이 세계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고틀립은 ‘직관적 형태와 대담한 색면을 결합해 감정과 무의식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작가입니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와 함께 뉴욕화파(New York School)를 대표한 그는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선도한 주인공 중 한 명이죠. 한편 김환기는 ‘반복되는 점과 색채 구조를 통해 동양적 의미의 명상성과 우주의 질서를 환기’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환기는 지난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미국관에서 고틀립의 작품을 처음 만납니다. 그러고는 마침 고국에서의 안정된 조건을 뒤로한 채 새로운 자신의 추상 세계를 발전시키고자 뉴욕으로 이주했죠. 우연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움직임은 부지불식간에 김환기의 삶과 작업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이번 전시의 묘미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두 사람 간의 연결 고리를, 다름 아닌 관객이 찾아낼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비슷한 시기, 즉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작된 두 사람의 작품은 보는 이를 그 시대로 데려갑니다.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형태로 구성된 고틀립의 ‘상상의 풍경’ 같은 작품, 그리고 본격적인 점화로 발전하기 직전 십자 및 사분면 구조를 활용한 김환기의 추상 ‘무제’ 등은 서로 다른 층에서 오묘하게 공명합니다. 특히 이 시기 김환기의 작품들을 보니, 궁극의 지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강렬한 열망이 느껴지더군요. 고요해 보이는 캔버스의 표면은 많은 걸 말합니다.


이렇게 색채와 구조, 상징을 매개로 한 인간 존재와 우주적 감성은 서울 한가운데서 겹치고 또 서로에게 자리를 내줍니다. 이 대화의 순간은 추상이야말로 시대와 국경, 감정과 사유를 관통하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광경입니다. 고틀립과 김환기는 열 살 차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같은 해에 뉴욕에서 타계했습니다. 그곳에서 이들은 친분을 쌓으면서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수십 년 후 이렇게 후대 관객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줄 거라 예상했을까요. 예술가들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남습니다. 아담한 규모의 이번 전시는 그럼에도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그 힘으로 살아남은 예술의 결정적 순간을 발견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최신기사
추천기사
-
워치&주얼리
에디터 푼미 페토와 함께한 불가리 홀리데이 기프트 쇼핑
2025.12.04by 이재은
-
아트
2025년의 마지막, 요리와 식사 초대법을 알려줄 요리책 12
2025.12.01by 박수진, Lilah Ramzi, Emma Specter
-
아트
현실을 벗어난, 이상한 나라의 전시 3
2025.12.05by 김성화
-
아트
'독서 휴양'이 새로운 여행 트렌드가 된 이유
2025.11.16by 김성화, Kristine Hansen
-
아트
2025년, 올해의 목표 독서량을 달성하게 해줄 짧지만 여운 긴 책 4
2025.11.12by 조아란
-
아트
이런 추상 저런 추상, 본질을 이야기하는 전시 3
2025.11.14by 김성화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