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칼더의 순수한 열망으로 탄생한 공간
모빌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의 순수한 열망으로 꽉 채운 공간이 필라델피아에 등장했다. 그의 예술 철학에 공감한 미다스의 손들 덕분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근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를 내려다보면 3대에 걸친 칼더 가문의 예술 계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멀리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시청 꼭대기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조각 거장이자 이 도시에 55년간 거주했던 알렉산더 밀른 칼더(Alexander Milne Calder)가 만든 11.3m 높이의 윌리엄 펜(William Penn) 청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시선을 도심으로 옮겨 중간쯤 이르면, 그의 아들 알렉산더 스털링 칼더(Alexander Stirling Calder)가 조각한 아르데코풍 인물상 3점으로 장식된 분수가 보인다. 누운 자세로 조각된 이 세 인물은 도시를 관통하는 세 하천을 상징한다. (분수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24년으로,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탱고를 추었다고 전해진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안에는 칼더 계보를 잇는 마지막 세대이자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모빌 작품이 걸려 있다. 부드러운 모래 빛깔 돌기둥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하얀 원판이 가벼운 움직임으로 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칼더는 종종 가문이 이룩한 예술적 유산을 이야기할 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발칙한 유령이 남긴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살아생전 칼더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 붙이기를 주저했다. 그가 자신이 창조한 모빌을 ‘유령’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이다.

오랜 시간 안갯속에 감춰져 있던 ‘칼더 가든(Calder Gardens)’이 드디어 대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최근 칼더가의 예술사가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됐다. 칼더 가든은 익숙한 박물관 형태가 아니라 칼더의 예술을 생경한 관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오직 칼더의 예술만을 위해 존재하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장소를 위해 건축가 자크 헤르조그(Jacques Herzog)가 설계를,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조경을 도맡았다. 파크웨이를 따라 늘어선 화려한 대형 건축물과 달리, 칼더 가든은 높이가 낮고 날렵하게 생긴 금속 구조물이 야생화와 자생식물이 군집한 초원 너머로 조심스럽게 솟아오른 형태다. 입구에는 그 흔한 표지판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여한 칼더의 설치 작품 ‘Cock’s Comb(닭 볏 혹은 맨드라미꽃)’이 공간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게 할 뿐이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무덥고 습한 지난 7월 말 오후로, 현장을 방문했을 때 눈에 띈 임시 울타리에는 ‘9월에 공개될 예정’이라는 간략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의 목적은 유희적인 방식으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에요. 방향 감각을 잃는 것, 그것이 공간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죠.” 칼더 가든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후아나 베리오(Juana Berrío)가 프로젝트 매니저 윌리엄 맥도웰(William McDowell)과 나에게 정원을 안내하며 이야기했다. “이곳은 당신을 깊숙한 내면의 세계로 이끌 겁니다.” 그녀는 ‘침묵의 날(Silent Days)’과 주술사 방문 행사도 기획 중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관람층을 칼더의 작품 세계로 초대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1898년 이 도시에서 태어난 칼더는 ‘필라델피아의 아들’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붙은 시설이 탄생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30여 년 전, 칼더 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해 안도 다다오에게 건축 설계를 의뢰했으나 여러 이유로 결국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필라델피아 자선가 H. F. 제리 렌페스트(H. F. Gerry Lenfest)가 또 다른 자선가 조셉 뉴바우어(Joseph Neubauer)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디어를 실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사실 저는 이민자 출신이에요.” 뉴바우어가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뮤지컬 <해밀턴> 주인공처럼, 그는 스스로를 “어떤 일이든 해내고야 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10대 시절 미국으로 건너왔다.) 뉴바우어는 세계적인 미술 교육 기관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을 필라델피아 외곽에서 도심으로 옮기는 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유명 미술 컬렉션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접근성이 훨씬 좋아진 덕분에 방문객은 크게 늘었다. 렌페스트는 그런 뉴바우어에게 칼더의 고향 필라델피아에 그의 예술적 유산을 기리는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조셉, 자네가 이 일을 도와주길 바라네. 특히 샌디가 꼭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게.”
여기서 샌디는 알렉산더 칼더의 손자이자 칼더 재단 대표인 샌디 로워(Sandy Rower)다. 로워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 조셉 뉴바우어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대뜸 할아버지 고향에 박물관을 세우자고 제안하는 거예요.” 자신은 미래주의자에 가깝다고 설명한 로워는 솔직히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터놓았다. 그런 그의 미지근한 반응에 뉴바우어는 웃으며 이렇게 되받아쳤다. “칼더의 작품을 밀폐된 곳에 가두고 그 옆에 설명을 적어놓는 그런 뻔한 공간을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뉴바우어는 로워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로워가 흥미를 느낀 지점은 바로 그의 할아버지가 예술적으로 지향했던 것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재구성하겠다는 뉴바우어의 아이디어였다. 전 세계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상품화된 모빌이 아니라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신비로운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 고양된 정신을 체험하게 하는 작품이 지배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뉴바우어의 주장은 종교적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설치물을 떠올렸다.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당이나 천장에 구멍이 뚫린 공간에서 하늘의 변화를 감상하게 하는 제임스 터렐의 대표작 ‘스카이스페이스’ 같은 것 말이다. 동시에 예술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종교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티스의 작품을 보유한 방스(Vence)의 로사리오 예배당과 마르크 샤갈이 디자인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뉴욕 포칸티코 힐스의 유니언 교회(Union Church of Pocantico Hills)처럼.

물론 시 당국이 반스 재단을 이전하기 위해 뉴바우어에게 부지를 빌려준 것처럼 이번에도 기꺼이 토지를 제공할 의향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배당’이라 불리는 신성한 장소에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로워와 뉴바우어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건축가 헤르조그를 고용했다. 하지만 헤르조그 역시 처음에는 그런 아이디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의미는 피하고 싶었어요. 괜한 허세로 비치는 것도 원치 않았고요.” 헤르조그의 말이다.
모두가 헤르조그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지 반신반의했다. 피에르 드 뫼롱(Pierre de Meuron)과 함께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 건축 사무소를 공동 설립한 스위스 출신 건축가 헤르조그는 많은 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거장이었으니 말이다. 테이트 모던으로 개조된 뱅크사이드 발전소와 ‘버즈 네스트(Bird’s Nest)’라는 별명을 가진 베이징 국립 경기장 등 헤르조그의 과거 업적에 비해 칼더 가든은 규모가 훨씬 작았다. 7,933㎡ 부지에 세워진 1,851㎡ 크기의 건물로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 규모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에게는 너무 소박한 프로젝트였죠.” 로워가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헤르조그에게 칼더 가든은 서서히 매력적인 도전으로 여겨졌다. 가장 솔깃한 지점은 공간의 기본 컨셉이었는데, 전통적인 미술관과 차별화되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칼더 가든은 상설 컬렉션을 따로 소장하지 않고 작품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역동적인 전시장을 목표로 했다. 더 나아가 이곳이 칼더 재단의 깊은 사명감을 기리는 공간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요소였다. 헤르조그가 회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단계를 밟을 때마다 계속 새로운 미션을 마주했죠.”
어느 날 헤르조그는 우연히 프랑스 콜롱브 도르 호텔의 수영장 주변에서 무성한 수풀 사이에 있는 칼더의 조각품 사진을 보게 됐다. 머릿속에 각인된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곱씹으며 헤르조그는 칼더의 새 미술관이 하나의 건축물이 아닌 정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젤 근교 저택에서 마주한 헤르조그가 이야기했다. “그 순간 저는 칼더의 작품이 어떤 물체나 형태로 존재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 전시될 예술품의 일부는 칼더 재단 소유이며 나머지는 대여품이거나 개인 소장으로 지금껏 세상에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죠. 이 모든 것이 존재를 드러낼 공간이 어딘가에는 필요했던 거예요.”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당연히 공간은 만들어야 했어요. 지하로 향하는 길을 트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건물을 짓는 ‘건축’이라기보다는 새 공간을 파헤치는 일종의 ‘발굴’에 가까웠어요.”
나는 오래전에 헤르조그의 강연을 들은 적 있다. 헤르조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베일에 가려 있던 칼더 가든의 다양한 구성 요소를 설명해주었다. 렌즈처럼 오목한 원반, 경기장 좌석처럼 생긴 계단, 지하 갤러리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공중을 가르는 천장과 연결된 거대한 벽 등. 이론상으로 접한 그 복합적인 구조물을 마주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미로 같으면서도 대성당에 온 것 같은 웅장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뉴바우어의 바람대로였다.
많은 건축가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주장한 ‘압축과 해방’의 원리를 즐겨 따른다. (좁은 공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개방된 공간의 감각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다는 개념이다.) 헤르조그의 칼더 정원에서도 그 효과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선을 거치기 때문에 넓은 공간으로 들어설 때 느껴지는 개방감이 더 크게 와닿았다. 일부 방에서는 아주 원초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콘크리트 벽에는 나뭇결의 흔적이 유령처럼 남아 있고, 자갈이 섞인 검은색 혼합물로 마감된 부분도 돋보였다. “저는 이곳을 ‘웜홀(우주 공간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잇는다고 간주하는 가상의 통로)’이라 부르죠.” 우리가 좁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베리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지구의 여러 층을 통과하며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다가, 어느 순간 빛으로 가득 찬 ‘아트리움’에 들어서게 된다. 태양의 주기에 맞춰 교묘하게 계산된 각도 때문인지 햇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상적인 빛의 공간이 탄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오히려 공간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헤르조그는 각 전시실이 단순히 예술품을 강조하거나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마다 개성을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큼지막한 공간 뒤쪽에 마련한 숨겨진 공간에서는 황량한 배경 속에 밝고 또렷한 모빌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좁은 틈새처럼 설계된 작은 전시실을 어둡게 조성하고 칼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어머니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건축은 단지 유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능도 갖춰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는 이를 유혹해야 해요.”
건물이 그 내부를 거닐 때 비로소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은밀한 구조물이라면, 정원은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나는 정원이 미완성 상태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정원을 둘러보니 무더위에도 검은 눈동자를 닮은 수잔꽃 무리가 가뿐히 흔들리고, 뒤룩뒤룩 살찐 호박벌이 에키네이셔꽃 사이를 유유히 떠다녔으며, 연보랏빛 알리움의 공 모양 꽃송이가 가느다란 초록 줄기 위에서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뉴욕 하이 라인과 시카고 루리 가든처럼 도심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는 아이코닉한 정원을 설계하며 토종 식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고요한 혁명을 일으켜온 아우돌프는 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원예 콜라주 작업에도 색채는 자신의 주요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 정원이 품은 색채는 2주나 3주, 길면 4주 정도만 지속되는 일시적인 요소일 뿐이에요. 절대 거기에만 의존할 순 없어요. 다양한 식물종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배치하느냐가 관건이죠. 식물의 개성을 악보의 음표처럼 여기면서 이 정원을 하나의 심포니같이 조화롭게 꾸미는 것이 목표입니다.”
아우돌프의 신념은 길고 반복적인 작업으로 이어졌다. (“조경은 건축을 뒤따를 뿐이죠. 앞에서 어떤 작업을 했든, 저는 거기에 맞춰야 하는 거예요.”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이 정원 디자인의 상당 부분은 팬데믹 시기에 진행됐다. 당시 헤르조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종이에 스케치한 다음 팀원들에게 보냈다. 로워에 따르면, 그는 종이가 없을 땐 “냅킨이든 식탁보든” 개의치 않았다. 헤르조그는 자신과 로워, 뉴바우어가 “거의 모든 단계에서” 긴밀히 서로 소통하고 협력했다고 강조했다. 그 덕분에 그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성스러운 예배당 같은 전시 공간과 정원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칼더 가든이라고 이름 붙은 이곳은 도시와 세상에 새로운 파동을 일으키는 태풍의 눈과 같은 역할을 떠안게 될 것이다. 칼더의 부친은 한때 “교회 밖에서도 영적인 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쓴 적 있다. 그리고 우린 칼더의 오랜 추종자뿐 아니라 공원을 산책하는 여행객,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과 씨앗이 매달린 줄기의 움직임에 감탄하는 방문객이 이곳에서 그와 같은 영감을 발견하고 위로받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VL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글
- Chloe Schama
- 사진
- Buck Ellison
- 아트
- ©2025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Courtesy of the Andreas Feininger Estate and Bonni Benrubi Gallery, Nyc. Saint Louis Art Museum / Gift of the Feininger Family.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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