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악적인 콘텐츠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친절한 히어로 ‘캐셔로’
<캐셔로>(넷플릭스)의 메타포는 쉽다. 너무 쉬워서 뼈아프다. 주인공은 비행, 격투, 재생 능력 등을 지닌 히어로인데, 현금을 몸에 지닐 때만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능력을 쓰면 실시간으로 현금이 줄어든다. 섣불리 강한 상대와 맞붙거나 비행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돈이 초능력이다.” 현실 한국 묘사라 해도 틀리지 않은 이 말이 <캐셔로>에는 더 정밀하게 들어맞는다. 히어로물에서마저 뻔한 현실 비판을 봐야 하나 지레 피곤할 수 있는데, <캐셔로>는 이 설정을 제법 경쾌하게 풀어낸다.

주인공 상웅(이준호)은 구청 공무원이다. 그와 9년간 사귄 민숙(김혜준)은 중소기업 회계팀 직원이다. ‘수도권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이성애 부부’라는 한국 ‘정상 가족’ 이상형에 근접한 커플이고, 그 이상을 완성해줄 신축 아파트 입성을 노리고 있다. 이 꿈은 상웅과 민숙의 처지에 살짝 버겁다. 그래서 이들은 빈곤하지 않음에도 돈 걱정이 많다. 상웅이 아버지에게 초능력을 물려받자 민숙은 금액당 능력치를 정량화한 다음 ‘기계보다 가성비가 나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용을 말린다. 이 장기 연애 커플의 짠내 나지만 사랑스러운 모습, 특히 김혜준이 연기하는 총명한 민숙 캐릭터가 드라마의 산뜻함을 고양시킨다.
상웅은 어린 시절 자신의 돼지 저금통까지 털어갈 정도로 가계를 등한시한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민숙의 말을 따랐다. 친절에 돈이 들까 무서워서 돈 안 드는 친절까지 끊었다. 지하철 계단에서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려다 멈추고, 무거운 생수통을 들고 쩔쩔매는 동료를 외면했다. 그럴 때 상웅은 몸이 근질거리고 마음이 불편했다. 속으로는 ‘나도 돈이 아주 많았으면 아주 착하게 살았을 거다’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사람들을 구하느라 엄마의 곗돈을 날리고 청약통장을 깨고 사채까지 끌어 쓰면서야 상웅은 평온을 되찾는다. 말끝마다 ‘돈돈’ 하며 살지만 상웅은 사실 착한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옳다고 믿는 일은 반드시 해내는 근성도 있다. 돈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영웅을 만드는 거라고, 드라마는 강조한다. 돈을 향한 집념이 부족하고 흥정에 서툴러서 거액을 만질 기회를 번번이 날려버리는 게 속 터지긴 하지만, 상웅은 확실히 정감이 가는 캐릭터다.
액션물로는 아쉬운 대목도 있다. 초능력자가 여럿 등장함에도 액션이 다양하지 않다. 대형 사고를 막은 뒤 정체가 노출된 상웅은 대한히어로협회 멤버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면 약간의 괴력과 더불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변호인(김병철), 칼로리를 섭취한 만큼 염력이 강해지는 방은미(김향기)가 고정 멤버다. 호인은 힘이 별로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캐셔로보다 동력원 구하기가 쉽고 파워도 있는 방은미를 두고 왜 자꾸 상웅이 센터를 맡는지 알 수 없다. 주인공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조력자들이 빠졌다가 재등장하는 것도 불가결한 연출이긴 하나, 매번 극적 원인과 타이밍이 어설프다.


주인공 무리는 히어로들의 능력을 빼앗아서 그걸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돈을 벌려는 재벌 회장(김의성) 일가와 대립한다. 그들이 집안 싸움까지 불사하며 초능력 칵테일을 만들어서 하고자 하는 일은 강남 클럽에 마약을 유통하고 정·재계 인사들과 수익을 나눠 먹는 것이다. 형사물, 검사물, 심지어 학원물까지, 요즘 한국 콘텐츠에서 판을 깔았다 하면 기본 안주처럼 펼쳐지는 얘기다. 강한나, 이채민이 연기하는 섹시한 악당 남매가 스토리의 진부함을 희석시켜주긴 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계가 없는 게 돈”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도 세계 정복 같은 큰 뜻을 품지 못하고 고작 로컬에서 대장질하는 게 꿈인 옹졸한 빌런들의 모습이 한국 지배층의 고질병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여전히 안타깝다.
상웅을 쫓는 경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납득 불가다. 왜 그들이 상웅을 대형 재난의 용의자로 점찍는지, 왜 상웅이 조사를 회피하는지, 민숙은 뭘 알고 경찰에 대드는지, 무슨 근거로 영장이 발부되었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후반 반전을 위해 깔아둔 포석이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형국이다. 다만 8부작이라는 간결한 구성 덕에 약점에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치밀한 각본이나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캐셔로>는 엉뚱한 B급 유머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착하게 삽시다’라는 단순하지만 따뜻한 메시지, 정의로운 주인공이 이웃들과 힘을 모아 얼렁뚱땅 위기를 극복하는 결말이 연말연시 카우치 타임에 꼭 어울리기도 한다. 대국민 친절 캠페인인 양 뻔한 구석이 있지만, 위악적인 콘텐츠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다. 초반 반응이 좋아서 다음 시즌까지도 기대할 수 있겠다.
관련기사
-
엔터테인먼트
불편한 것들을 불편하지 않게 얘기할 수 있을까? ‘프로보노’
2025.12.26by 이숙명
-
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기다리던 웰메이드 로맨스 ‘경도를 기다리며’
2025.12.17by 이숙명
-
엔터테인먼트
연기 대가들의 앙상블, ‘자백의 대가’
2025.12.10by 이숙명
-
엔터테인먼트
2025년 최고의 영화 11편
2025.12.26by 강병진, Hillary Busis, Rebecca Ford, John Ross, Chris Murphy, Marisa Meltzer
-
엔터테인먼트
‘타임’ 선정 2025 한국 드라마 베스트 10
2025.12.23by 오기쁨
추천기사
-
아트
우리는 무엇으로 살까, 올해를 되돌아볼 책 4
2025.12.08by 조아란
-
뷰티 트렌드
가죽의 언어가 향이 된 순간, 크리스챤 디올 '뀌르 새들'
2025.12.30by 이주현
-
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기다리던 웰메이드 로맨스 ‘경도를 기다리며’
2025.12.17by 이숙명
-
아트
깨지고 삐뚜름하고, 취약함은 개성이 된다
2025.12.12by 하솔휘
-
라이프
운동에도 에티켓이 필요하다
2025.03.20by 오기쁨
-
뷰 포인트
비웃고 진저리 치면서 계속 막장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
2025.12.24by 하솔휘, María Quiles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