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 영화 역사상 가장 낭만적이던 시절의 영화 만들기
카이에 뒤 시네마, 누벨바그, 장 뤽 고다르… 이런 말이 기초 교양이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시네필이었고 시네필이 되고자 하던 때였다. 1960년대 프랑스 영화 사조를 일컫는 ‘누벨바그’는 그중에서도 강렬했다. 이유는 세 가지쯤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사조(思潮)’라는 단어. 한국 교육과정에서 사조는 일단 암기하고 보는 영역이니, 영화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당대의 시네필은 그렇게 본능적으로 끌렸을 것이다. 두 번째는 언어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 ‘뉴웨이브(New Wave)’라고도 할 수 있고, ‘새로운 물결’로 번역해 쓸 수도 있었지만, 프랑스어 발음이 주는 우아함이 교양의 아우라를 만들었다. 세 번째 이유는 결국 작품이다. 누벨바그의 정체가 궁금해 <400번의 구타>(1959)와 <네 멋대로 해라>(1960) 등을 직접 본 사람들 사이에서 ‘누벨바그’는 상식을 넘어섰다. 영화 역사상 가장 모험적이던 시대의 결과물이 이후 전 세계 영화인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 짜릿했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1995) 시리즈와 <보이후드>(2014)를 만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누벨바그>는 바로 그 시절, 영화가 가장 주목받는 예술이던 때를 재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왕년의 시네필만을 위한 기념품은 아니다.


<누벨바그>의 주인공은 장 뤽 고다르(기욤 마르벡)다. 그는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세상에 내놓은 뒤 끊임없이 실험을 이어갔고, 때로는 자신의 이전 작품을 부정하면서까지 새로운 영화를 추구했던 감독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이후’가 아니라 ‘직전’에서 출발한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함께 평론을 쓰던 친구들은 이미 장편영화를 연출해 주목받는 상황인데, 고다르는 단편영화 한 편을 남겼을 뿐 여전히 글만 쓰고 있다. 그는 ’25세 전에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그 말을 들은 친구의 반응은 단호하다. “얼마나 더 뜸을 들이다가 용기를 낼 거야? 하든가, 닥치든가.” 용기 없는 주인공은 실패한 주인공보다 멋이 없는 편이다. 영화는 고다르를 다소 지질한 방구석 예술가의 자리에 놓고 바라본다. 고다르는 친구 프랑수아 트뤼포가 <400번의 구타>로 칸국제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을 본 후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돌입한다. 부러움이 질투가 되고 질투가 열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처럼 이 영화는 당시 고다르가 가졌을 법한 고뇌를 깊이 상상하기보다 그를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 모험가로 묘사한다. 시네필 입장에서는 오히려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누벨바그’가 재현하려는 것은 예술 이전에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낭만’이다.


“전형적인 서사에 없는 즉흥성과 돌발성을 탐구하겠다”는 고다르는 정말 자기 ‘멋대로’ 영화를 만든다. 제작자와 배우에게 미리 시나리오를 주지도 않고, 다음 장면에 대한 구상이 끝나지 않으면 촬영을 중단한다. 아예 촬영을 하지 않는 날도 많다. 현장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내기 위해 동시녹음도 하지 않는다. 이런 ‘기행’은 영화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유머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고다르의 기행을 대하는 주변 스태프와 영화인의 태도가 낭만을 만든다. 스태프는 근본을 찾을 수 없는 연출 방식에 당황하지만, 그래도 그가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영화 속에서 고다르가 만나는 선배 감독이 전하는 조언에도 진심이 묻어난다. “촬영하다가 막히면 중단해. 각본을 쓰는 대신 메모를 하라고.”(로베르토 로셀리니) “서사는 쉽게 만들어. 서브플롯 같은 건 포기해.”(장 피에르 멜빌) “모든 장면에 똑같은 엑스트라를 쓰면 안 돼.”(로베르 브레송) 고다르가 그 모든 조언을 참조해 영화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면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누벨바그’는 프랑스의 많은 영화인이 ‘네 멋대로 해라’의 완성을 돕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처럼 다른 이의 새로운 도전에 너그러운 태도야말로 영화가 포착하는 그때의 낭만이다. 장 뤽 고다르는 그때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에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벨바그’를 보다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전작인 <스쿨 오브 락>(2003)이 떠오른다. 우연히 초등학교 보조 교사가 된 록 밴드 멤버가 수업을 해야 할 시간에 학생들과 밴드를 결성하는 이야기다. 캐릭터의 온도와 소재의 깊이는 다르지만, 예술에 미친 괴짜와 그의 예술에 동참한 이들이 벌이는 대소동극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그러니 <스쿨 오브 락>을 본 후 창고에 보관하던 기타를 다시 꺼낸 사람들처럼 <누벨바그>를 보고 나서 묵혀둔 카메라를 꺼내볼 왕년의 영화인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낭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누벨바그>가 소환하는 그때의 낭만은 더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때의 시네필에게 ‘누벨바그’가 상식이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놈의 낭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낭만 없이 예술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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