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서 만나는 가에타노 페셰의 가구

가구와 사랑에 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난해 4월 두양문화재단 오황택 이사장이 우연히 네덜란드의 한 갤러리에서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의 캐비닛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페셰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로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며 아방가르드에 가까운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인 작가다. 오 이사장은 1년에 서너 번 각국의 디자인 옥션과 갤러리를 누비며, 수만 점의 인더스트리얼 가구와 폴란드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던 중 페셰에 빠져버린다. “그 전까지 모던하지 않은 가구에 관심 없었어요. 하지만 그 캐비닛을 기점으로 작가를 파고들기 시작했어요. 84세의 나이로 작고하기 전에 직접 만났으면 어땠을까, 아쉽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유족, 스튜디오 스태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오 이사장은 1년간 세계를 누비며 수집한 페셰의 대표작 60점을 자신이 설립한 경기도 양평의 복합 문화 공간 이함캠퍼스에서 선보인다. 페셰 회고전 <Different is Beautiful>이다. 대표작은 에디션이 없는 유니크 피스가 많아서 고가의 현대미술 작품만큼 가치가 높다. 하지만 그가 페셰의 가구에 매료된 이유는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거부한 정신, 대량생산보다는 단 한 점의 작품을 만드는 철학이 새로운 세상을 열었기 때문일 거다. 더불어 단추 회사 두양을 설립했던 경험에서, 단추 소재인 플라스틱과 페셰가 사용한 레진이 비슷한 계열이라는 데서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오 이사장과 함께 기획을 맡은 이종명 기획자(MK2 대표) 역시 바우하우스 모더니즘의 열렬한 추종자임에도, 이번 전시를 계기로 페셰의 작품에 사로잡혔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페셰의 빅 팬 두 명이 기획한 전시는 기대할 만하다.
이함캠퍼스는 총 6개 전시장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지난해 별세한 페셰를 애도하는 엄숙한 공간이다. 의자 3개가 세로로 높이 설치된 레드 컬러의 ‘업 5 & 6 체어’가 시선을 압도한다. 이 의자는 1969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처음 선보였고, 전시 포스터 이미지로도 사용됐다. ‘업 5’는 여체의 곡선미를 형상화했지만, 같이 연결된 동그란 ‘업 6’는 여성에 대한 여전한 속박을 상징한다. 이 의자는 1960년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진공포장 상태로 배송됐는데, 뜯는 순간 의자가 부풀어 올라 자유롭게 해방되는 여성을 상징하며 호평받았다. “정치적이지 않은 디자인은 사람의 삶을 무시하는 디자인입니다.” 페셰는 전성기였던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급격한 산업화, 여성해방운동, 냉전 종식, 이민자 문제, 자본주의의 확장을 디자인 언어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두 번째 전시장에선 앞서 언급된 ‘노바디스 퍼펙트 캐비닛’(2002)이 제일 먼저 맞이한다. 레드와 블루 컬러, 투명함이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캐비닛은 샴페인을 올려놓으면 어울릴 듯하다. 오 이사장이 꼽은 또 다른 주요 작품은 ‘홀랜드 테이블’(1996)과 ‘선라이즈 소파’(1980)다. ‘홀랜드 테이블’ 상판은 네덜란드 지도 형상으로 물음표 모양 다리가 받치고 있다. 선라이즈 소파는 말 그대로 뉴욕 빌딩 숲의 노을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출신 페셰가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해왔기에 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페셰는 이렇게 설명한 적 있다. “뉴욕만큼 에너지가 강렬한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죠. 그럼에도 나는 이 소파를 만들며 도시의 그림자와 빛을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대도시에는 쇠퇴의 순간이 있죠.” 페셰는 대도시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어 작품 제목을 ‘선셋 오브 뉴욕’으로 지었다. 하지만 유통업자는 제목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니 ‘선셋 인 뉴욕’으로 바꾸자 제안했고, 절충안인 ‘선라이즈 소파’가 됐다는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또 하나 눈여겨볼 작품은 ‘프랫 체어’(1984~2018) 시리즈다. 이 의자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며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레진 의자지만, 각기 다른 농도와 색, 경도를 가진다. 소재 배합 실험의 진행에 따라 1번부터 9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어떤 것은 너무 휘어져 앉을 수도 없다. “완벽함은 신의 것이고,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페셰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다양성을 존중했다. 이 시리즈를 통째로 구입한 최초의 컬렉터는 가구 브랜드 비트라(Vitra)의 소유주인 롤프 펠바움(Rolf Fehlbaum)이었으며, 사람들은 형상보다는 3번이나 4번 같은 선호하는 특정 번호를 구입했다.
전시가 열리는 이함캠퍼스는 2022년 김개천 건축가의 설계로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남한강이 보이는 대지에 전시장, 공연장, 정원, 카페 등을 갖춰 산책 삼아 방문해도 좋다. 곳곳에 폴란드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뉴욕 타임스>에서 관련 컬렉터로 취재할 만큼 오 이사장이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페셰의 가구 전시는 국내 최초로, 2026년 9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전시가 시작된 지금도 새로운 가구 두 점을 들여오는 중이며, 새로운 컬렉션이 앞으로도 계속 추가될 것 같다. 사랑은 끝이 없으니까.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소영(미술 전문 저널리스트)
- 사진
- Courtesy of E-ham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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