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에 부활한 조선의 십장생
해, 달, 물, 돌, 산, 소나무, 학, 거북, 사슴, 불로초. 조선의 십장생이 현대적인 미학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무병과 장수, 진정한 ‘웰니스’를 위하여.


싱그러운 한 장의 사진에 반한 패션 크리에이터 서영희가 협업을 제안했고, 파리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정창기가 화답했다. 서로의 창의력을 알아본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의 십장생으로 결실을 맺은 사연.
채소와 식물을 겹겹이 쌓아 올린 한 장의 사진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이었습니다.
서영희 지인의 제안으로 2024년 11월에 열린 기획 전시 <장르탈출 Ⅱ>에서 정창기 선생님의 사진을 처음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내추럴함을 이토록 세련되게 찍는 사람이 있나 감탄했죠. 마침 현장에 있던 선생님께 곧바로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제안을 드렸어요.
정창기 7년 전쯤 루아르와 시농 옆에 있는 샤토(Château)에서 다빈치 500주년 기념전을 연 적 있습니다. 40인의 작가는 1년 동안 다빈치 정신으로 작품을 완성하라는 미션을 부여받았죠. 거기에 참여했을 때 호박을 쌓아서 사람처럼 만든 토템을 촬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비슷한 느낌의 사진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마케팅 디렉터이자 수집광인 아내 캐서린이 노트북 카메라를 향해 해당 작품인 ‘La Donna Bianca’ 사진을 들어 보였다.) 서영희 선생님이 좋게 봐주신 사진이 바로 이거예요.

협업 주제로 ‘십장생’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학, 거북, 사슴까지 10가지 요소로 영원에 대한 이상을 드러내는 조선 후기의 상징 체계죠. 이번에 함께 완성한 정물화 사진에서는 돌과 족두리, 사슴과 진주 댕기, 물과 남바위, 거북과 은장도 등 십장생의 10가지 요소가 여성의 장신구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영희 파리에서 활동하는 선생님이 이국적인 정서를 갖고 있기에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재미있게 풀어낼 만한 주제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십장생을 떠올렸어요. 과거에 보석을 소재로 작업한 적도 있기에 어렵지 않게 멋진 결과물을 상상했죠. 선생님이 자주 활용하는 깃털이나 꽃이 한국 오브제와도 잘 어우러지겠다 싶었고요.
정창기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주제였습니다.(웃음) 캐서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찾아갔죠. 그림도 그리고 자료도 모으고 사진도 찍으면서요. (캐서린이 사진과 그림, 글자로 빼곡한 작업 노트를 카메라에 비추었고 정창기가 그중 석류와 멜론, 당근이 켜켜이 쌓인 사진을 가리켰다.) 이건 ‘La Donna Fatale’라는 저의 지난 작업인데 여기서 이번 작업의 영감을 받아보자 했던 거고요. 서영희 선생님과 캐서린이 정리해준 자료를 보면서 십장생의 10가지 요소와 한국 여성의 전통적인 장신구를 매치하는 아이디어를 드렸어요.


이번 작업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 있다면요?
정창기 십장생을 형상화한다면 10개의 주제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 목표는 서로 다른 10가지 스피릿에 맞춰 제 분신 하나하나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해, 돌, 산 등의 주제를 의인화한 토템을 말이죠.
서영희 여인들의 장신구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사실 제일 컸고, 십장생을 의미하는 오브제는 말 그대로 오브제로서 보조 역할을 맡고 있어요. 또한 장신구에는 삶에 대한 여러 염원이 깃들어 있잖아요. 아이의 무탈함을 바라거나 신혼부부가 앞으로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비는 마음 같은 거요. 이를 숙지하고 살면, 우리 것이 더 예뻐 보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커진다면 다음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신과 예술이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했고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라면, 우리 것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 그 마음이 깊이 쌓인 다음에는 새로운 울림을 주는 것이었어요.


각각 파리와 서울에서 활동합니다. 협업 과정은 어땠나요?
서영희 선생님이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주었어요. 예를 들어 이 주제에서는 어떤 액세서리가 들어가는 게 좋은지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이 종종 서울에서 전시를 개최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나서 상의할 수 있었고요.
정창기 처음 서울에서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마침 캐서린이 옆에 있었습니다. 주제를 들은 주말, 곧바로 황학동 거리를 함께 누비며 브론즈로 만든 학을 비롯해 이런저런 소품을 샀죠. 촬영은 한국에서 3일 진행했습니다. 한국에서 사서 주변에 맡겨놓은 것이 이미 많았고, 파리에서 평소 수집해온 것도 캐리어 두 개를 꽉 채워 가져왔는데 서영희 선생님은 아예 한 트럭을 가져오셨죠.(웃음)
서영희 우리가 하는 일은 원하는 그림을 구현하는 것이잖아요. 더불어 한복, 한국의 공예품, 그런 것을 멋지게 표현하는 그림을 원하죠. 정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예술이 그저 한 시대의 민속품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어요. 십장생을 상징하는 10가지 장식품 하나하나에는 소중한 염원과 예술혼이 담겨 있죠. 그 모두를 귀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인물 사진 전문이었던 정창기 선생님은 1993년부터 정물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해 꽃과 일상 사물 사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미니멀한 구도 안에서 선명한 붉은색이 방점을 찍는 ‘양귀비(Poppy)’ 시리즈도 떠오르는데요. 정물화를 통해 어떤 미학을 꾸준히 추구해왔나요?
정창기 처음에 주로 찍은 사진은 사진가의 개성이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 아주 고전적인 흑백사진이었죠. 그러다 점점 컨셉추얼하고 다소 팝아트적인 작업을 시도했고요.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는데, 아까 언급한 다빈치 500주년 기념 전시가 좋은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과일과 곡식, 채소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정물화 또는 인물화로 유명하다)와 다빈치의 중간쯤 되는, 그러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돈나(Donna)’ 시리즈를 만든 거죠. 진실에 가까운 사진 작업을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서영희 선생님과의 작업 역시 그런 생각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었고, 제 손과 생각은 그런 믿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사실 댕기, 버선, 복주머니 같은 것은 사진 작업을 위한 정물로는 그리 매력적인 오브제는 아닙니다. 민속공예품은 표현과 재해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다른 것과 매치하는 과정에서 두 전문가(서영희와 캐서린)의 상상력이 십분 발휘되었습니다. 걱정한 것과 달리 촬영 과정은 아주 수월했어요.

에디터, 스타일리스트, 예술감독 등으로 활약한 서영희 선생님은 ‘코리아니즘’의 아이콘으로서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비주얼 작업으로 여전히 <보그>와 손발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창기 사진가와의 협업은 어떤 면에서 새롭고 즐거웠나요?
서영희 2002년에 처음으로 한국적인 정물화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뭔가를 한국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저의 DNA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죠. 그 후 30년 동안 잡지 작업을 하면서 패션 화보만큼 오브제 화보도 자주 작업했는데 저에겐 늘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건 좀 지나치게 한국적이지 않나?’ ‘너무 촌스럽지 않나?’ 또는 ‘<보그>다운가?’ 같은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시대가 바뀌었죠. K-컬처가 부흥하고, 한국적인 것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분위기에서 더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 잘 어우러졌죠. 이번 화보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결혼 기념품 ‘글로브 드 마리에(Globe de Mariée)’ 같은 것을 소품으로 활용한 경우에도 정창기 선생님의 감각을 믿고, 이 또한 한국의 멋이라는 자신감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우리 것을 글로벌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점에 활약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정창기 이번 작업은 평소 제 작품에서 느껴지는 밀도와 분위기에 비해 아주 평온한 온기가 느껴져요. 저의 ‘꾸뛰르 가든(Couture Gardens)’ 시리즈는 이번과 비슷하게 꽃과 장신구를 주제로 작업했지만, 훨씬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죠. 렘브란트 그림처럼요. 하지만 이번에는 사진 속에 놓인 오브제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편안합니다. 개인적으로 틈이 없는 작업을 하는 편인데 그런 느슨함이 새로웠어요.

십장생의 요소인 구름 대신 달을 주제로 삼았죠. 십장생은 풍경화가 아니라 상징과 해석이 중요한 사상화에 가깝다는 점에서 두 분의 상상력을 가미할 여지가 많았을 것 같아요.
서영희 바로 그거예요! 원래는 우리도 구름을 형상화하려 했는데, 찾아보니 변함없는 뭔가를 상징하는 달의 의미가 더 중요하겠더라고요. 꽉 차 있는 달은 복이 꽉 찬 느낌을 주고요. 그래서 주제를 바꿨죠. 그런 식으로 조사를 계속하며 더하거나 빼는 식으로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플로리스트 유승재, 장인희 작가, 전통한복 김영석, 오수 작가 등 프로젝트에 손길을 더한 또 다른 장인들도 많습니다.
서영희 지난 30년간 쌓아온 노하우죠. 전부 <보그>를 통해 얻은 감사한 인연이고요.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보유자 황수로 선생님이 만든 연꽃도 아주 귀한 작업입니다. 거북이 있으니 왠지 연꽃을 놓고 싶더군요.(웃음) 저와의 오랜 인연으로 흔쾌히 내준 장인들의 소중한 유산을 다룰 때마다 성실하게 임한 지난 세월에 대한 감사를 느낍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더 깊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도 생겼을까요?
서영희 저는 캐서린의 의견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어요. 선생님의 사진도 좋지만 캐서린이 바라보는 한국 문화도 흥미로워서 다음에는 셋이 공동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정창기 (옆에서 캐서린이 건넨 말을 듣고) 자연을 지배하는 문화가 일반적인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이 독특하다고 하는군요. 요즘 캐서린은 아주 열정적으로 수석을 모으고 있답니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서영희
- 포토그래퍼
- 정창기
- 리터처
- 김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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