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연애소설] 장강명의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적당히 분위기 좋은 바였다. 적당히 어둑어둑하고, 틀어놓은 음악도 적당히 괜찮고, 음량도 적당하다. ‘적당히’라는 말을 ‘무난히’라고 바꿔도 상관없다. 무엇 하나 인상적이지 않다는 뜻도 된다. 연지혜는 그날 그 바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에 대해서도 같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일하면서 만나야 하는 그 직군 종사자 중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적당히 괜찮은 사람. 그러나 바도, 업무 상대도, 모든 면에서 적당히 괜찮기는 참 힘들다. 대개는 인상적으로 안 괜찮은 부분들이 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형사님. 제가 갑자기 뵙자고 한 걸요.”
남자 변호사는 편안하게 연지혜를 맞았다. 예의 바르지만 과하지 않다. 연지혜는 변호사가 내민 메뉴판을 쓱 훑어보고 병맥주를 주문했다. 변호사는 발베니를 마시고 있었다. 연지혜는 병맥주가 나오기도 전에 용건을 물었다.
“이선경 씨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다고요?”
1년 전에 자신이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리한 사건. 그 사건 피의자를 변호했던 변호사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하니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 범죄 추적 유튜브 채널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바람에 국민적 관심사가 됐던 사건이었다. 사건 정황이 이해하기 쉽고 자극적이긴 했다.
이선경은 미모의 요가 강사였다. 세 번 결혼했는데 남편들이 모두 1년도 못 돼 사고사로 사망했다. 첫 번째 남편은 암벽등반을 하다 추락했고, 두 번째 남편은 퇴근길에 음주 운전자가 모는 차량에 치였다. 세 번째 남편은 공사 중인 빌딩 옆을 걷다가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시멘트 포대에 맞아 즉사했다. 죽은 세 남편은 모두 이선경이 수령인으로 되어 있는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돼 있었다. 이 사건들을 수사하고 ‘의혹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린 사람이 연지혜였다.
“그 사건들, 전부 그저 우연이었다고 확신하십니까? 이선경 씨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요?”
“그게 처음부터 변호사님이 주장하셨던 거 아닌가요?”
“지금 형사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선경 씨에게는 범죄 혐의점이 없다는 게 제 결론이에요. 조작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고, 과실치사범들은 제대로 처벌받았어요. 기묘하고 비극적인 우연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도 있어요.”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
변호사가 셜록 홈스의 유명한 대사를 읊었다. 연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를 마셨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스타일이었던가.
“형사님, 운명이나 사주팔자를 믿으십니까? 남편 잡아먹는 사주라든가 과부 될 팔자 같은 게 있을까요?”
“아니요, 변호사님은 믿으세요?”
“저도 안 믿습니다.”
“이제 본론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 합니다.”
예상치 못한 선언에 연지혜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입에 물고 있던 맥주를 간신히 식도로 넘긴 뒤 내뱉은 말은 바보 같은 질문들뿐이었다.
“어떻게···? 언제부터···?”
“변호를 할 때부터 호감은 있었습니다. 형사님도 아시다시피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사람이죠.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의 말투나 태도에 더 매력을 느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살인자 취급을 받고 저주와 악담을 듣는데도 흔들리거나 화내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더군요.”
변호사는 사건이 종결되고 한 달 뒤에 이선경에게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없는 몸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선경을 쫓아다닌 건 자신이었다고, 상대가 자신을 유혹한 게 아니라고 변호사는 강조했다.
“그 사람은 저에게 조금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을 먹고 함께 걸을 때 하늘을 보며 ‘달이 아름답네요’ 하고 말하더군요. 나쓰메 소세키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그렇게 번역했다지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사귀게 되었습니다. 결혼도 제가 고집해서 하는 겁니다. 가족의 반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축하해야 하는 건가? 응원해야 하는 건가? 연지혜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맥주를 마셨다. 맥주 맛이 갑자기 싱겁게 느껴졌다.
“두렵진 않으세요?”
“뭐가요?”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게 정말로 있다면 어떻게 하죠?”
“아까 안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형사님이나 저나.”
“그랬죠.”
“생명보험을 가입했습니다. 그 사람을 수령인으로 해서요.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으니까요. 만약 운명이나 팔자가 있다면 이것 역시 운명이겠지요. 제가 그 사람을 이렇게 만날 운명이고, 이렇게 사랑에 빠질 팔자인 거죠.”
그 순간 음악이 바뀌었다. 연지혜가 좋아하는 블루스 곡이었다. 적당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좋아하는 곡이었다. 간접조명 몇 개가 꺼지면서 바가 조금 더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무난하다고만 여겼던 공간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의 사물들도 더 이상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기묘하게 깊이 있어 보이기도 했고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연지혜는 발베니를 한 잔 주문했다. 변호사에게 건넬 말은 딱히 없었다. 사람들은 결국 믿고 싶은 것을 믿으니까. 운명이든, 사랑이든. VK
장강명 은 동시대 한국을 가장 에너지 있게 이야기하는 작가다. 2011년 <표백>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기자에서 작가로 전업했으며, 장편소설 <열광금지, 에바로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호모도미난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재수사>, 연작소설 <뤼미에르 피플> <산 자들>, 소설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등 누구보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많은 산문집은 지금 우리가 가장 골몰하는 사안을 다루기에 다른 버전의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연애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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