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리더’에 여성 멘토를 섭외하는 일에 대하여
〈보그〉가 매년 3월 주최하는 ‘보그 리더’는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여성을 연사로 초대한다. 아늑한 공간에서 독자들과 마주 앉아 대화와 영감을 주고받는다. 어떤 여성을 섭외할지 고민하다 사무실 선후배에게 애틋해졌다.

“이런 자리에 너무 많이 서는 것 같아요.” 3월에 열리는 ‘보그 리더’ 연사 섭외를 거절하는 그녀의 음성이 간곡해 보였다. 보그 리더는 여성 연사를 초대해 대화를 나누고 연대하는 <보그>의 연례행사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예술가인 그녀와의 통화는 1시간째 이어졌다. 우리의 취지에는 공감했다.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라 동아리방에서 다과회 하듯이 여성으로서 겪은 일을 나누는 시간은 필요하고, 자신 또한 그랬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여성 멘토’로 서는 자리가 많아져 의아한 데다 소모되는 듯하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연유를 듣고는 잠시 설득하길 멈췄다. 그러게, 왜 그녀가 피로감을 느낄 만큼 요청을 할까? 그러고 보니 그 인물이 그 인물인 비슷한 행사가 스쳐갔다. 그래도 그녀의 서사를 우리 독자와 나누고 싶었다. 대면으로, 코앞에서. 남성 편향적인 그 업계에서 어떻게 최고가 되었는지, “나도 그런 자리가 필요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데요 선생님, 제 생각에 그만큼 여성 멘토가 드문 거 아닐까요?” 내 뜻이 곡해될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그 리더’를 준비할 때마다 후보를 선정하기 쉽지 않다. 세상엔 분야마다 뛰어난 몫을 해내는 여성은 많지만, 행사 특성상 독자가 궁금해하는 인물로서 대중적 인기도 높아야 한다. 하나 사회와 미디어가 여성을 밀어주는 화력이 약하다고 느낀다. 그간 보그 리더에 함께해준 박세리, 김연아, 심채경, 정서경, 김지윤과 전은환, 송은이와 김숙, 김신록 등은 귀한 존재다. “그래서 더 선생님이 나서주셨으면 해요. 잘나가는 선배 언니의 목소리가 자꾸 담장을 넘어야 하니까요. 그래야 우리도 큰소리 내고 싶어지죠.” 다소 경박한 표현인가 싶어 나는 떨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비슷한 기사를 <타임>에서 발견하고 그녀에게 보낼까 망설였다. 2025년 <타임>은 세계 공동체에 영감을 주는 ‘올해의 소녀’ 10인을 선정했다. 미국의 장기 기증 운동가이자 작가 나오미(12세), 프랑스의 학교 폭력 반대 운동가 조에(15세), 영국의 노숙자 문제 해결에 나선 엔지니어 레베카(12세) 등 나이 때문에 가슴이 더 웅장해진다. <타임>은 “변화를 일으키려고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한다. 흡족하게 기사를 읽던 중 한 부모의 말에 덜컥했다. “소녀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여성 롤모델이 부족해요.” 이 부분을 밑줄 쳐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더 나서야 해요, 선생님.
물론 ‘언니’들은 수십 년간 급진적으로 움직이며 우리의 처우를 개선했다. 나는 그들이 닦아놓은 실크로드에 서 있으니 감히 불평할 수 없다. 이번 호 <보그>에 인터뷰한 백수(白壽)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는 여자가 취업하려면 영어와 타이핑만이 답이던 시절을 지나 1956년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옷을 하면서 우리나라 여성이 깨어나길 바랐어요”라고 회고하셨다. 나는 그녀들이 수놓은 실크로드를 레드 카펫처럼 더 쫙 깔아야 한다고, 연사 섭외할 때 예로 들 걸 그랬나 싶었다. 우리가 더 활기차게 그 위를 걸어야 한다고,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란 노랫말처럼, 눈이 부시게. 아, 그 노래는 모르실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중엔 선생님께 요청을 덜할 만큼 여성 스타 리더들이 넘치는 세상이 와야죠!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옆자리 후배도 그 선생님이 안 되면 어떡하냐며 축 처진다. 나는 사무실을 둘러본다. <보그> 편집부는 여성 직원이 80%다. 그래도 여성이 스피커를 잡는 곳이기에 나는 혜택을 받고 있다. 다시 섭외 전화를 걸기 전 <뉴요커>에 ‘Woman’을 검색해본다. 지난 10월 기사를 읽다가 아직도 ‘마녀’ ‘얼음 여왕’이라는 표현이 나와 흠칫 놀랐다. 여전히 성차별적인 시대라, 여성 리더들은 종종 지나친 야망이라 비난받고 차가운 여왕으로 불리며, 뛰어난 공감 능력과 다정한 태도는 ‘귀엽지만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자질’로 취급받는다. 내가 10년 전 기사를 본 건가. 하지만 지난가을 뉴욕의 풍경이다. 언니들이 깔아놓은 실크로드에 여전히 꿰맬 구멍이 크다. 헛웃음이 들린다. “그걸 <뉴요커>씩이나 봐야 아나요?”
직장에서 숨죽이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작가 조디 앤 뷰리(Jodi-Ann Burey)의 저서 제목은 <진정성: 직장에 그대로의 나를 가져오라는 신화(Authentic: The Myth of Bringing Your Full Self to Work)>다. 경기 침체, 고용 위축, 약화된 근로자 권리로 점차 직장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짚는다. 한마디로 튀려 하지 않는다. “특히 여성과 유색인종이 진짜 자신을 드러내면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에 반발하는 일부 기조로 오히려 직업적 불이익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반면 전 세계 토론 챔피언이었던 케이트 메이슨(Kate Mason)은 공격적이고 엄격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토론에서 우승했지만 본모습은 잃어버렸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 토론 우승자처럼 리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고 거기에 가둔 적 있다. (쿨하고 카리스마 있는 척했지만 그러기엔 술을 너무 좋아했다.) 여성이 자기 모습 그대로 살기란 쉽지 않다. 1985년생으로 34세에 핀란드의 최연소 여성 총리가 된 산나 마린(Sanna Marin)도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정치인들과 8코스 디너를 먹는 대신 클럽에서 새벽 4시까지 논다는 기사로 도배된 적 있다. “적어도 누군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젊어서 체력도 좋다”는 멋진 핀란드인의 댓글이 기억난다. 하지만 ‘파티 산나’라는 별명이 붙고 다음 선거 실패를 그 탓으로 돌리는 여론이 많았다. 마린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노동시간 축소와 복지 확대, 개인의 행복 관련 정책을 주창해온 인물이다. 그녀에겐 퇴근 후 클럽에서 춤출 자유가 당연했고, 죄라면 최연소 여성 총리이면서 그 직함에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녀는 <뉴요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는 사람이길 늘 바랐습니다.”
유흥의 속사정은 모르지만, 단면을 봤을 때는 ‘나다운’ 파티 마린을 응원한다. 나답게 사는 것. 얼마나 지키기 힘든지 아니까. 억지 리더가 되기 위해 없는 성격을 만들어내거나 구설에 오를까 봐 무색무취로 있는 것. 생각해보니 나는 둘 다 해봤다. 게다가 요즘은 AI 시대다. 주도성을 갖기 더 힘들다. 주도성은 주인 주(主)에 인도할 도(導), 말 그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이끌어나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젠 타인과 사회가 주도성을 갖다 못해 챗GPT에 넘기지 않는가. 대신 생각해서 결론을 내려달라고 말이다. 나만 “그래서 오늘 뭐 먹을까?”라고 물어봤던가? 점, MBTI, 생성형 AI에 대신 내 이야기를 부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인쇄 직전의 <보그> 3월호 17개 커버를 본다.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여자라는 것. 대중적 인기가 있다는 것. 브랜드도 사랑하는 패션 아이콘이라는 것. 피처 에디터로서 인터뷰하며 느낀 점은 ‘자신을 탐구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진짜다. 수십 년 차 배우든 10대 아이돌이든 그랬다. 15년 전만 해도 아이돌을 인터뷰할 때 꿈을 물어보면 비욘세나 마이클 잭슨을 언급하고 가끔 빌보드 차트 진입이나 도쿄 돔 공연이 나왔다. 지금은 ‘나답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답변이 많다. 내가 뭘 좋아하고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는 중이며 타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이것으로 통계도 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음악과 연기를 하고 <보그> 커버에 나온다.
이달에 주도성에 관한 인상적인 순간이 또 있었다.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Cartier Women’s Initiative, CWI)는 여성 창업가를 지원한다. 유방암 환자를 위한 브래지어, 성 불평등 데이터 분석 도구 등 기업의 면면이 기발하다. 까르띠에 코리아 김쎄라 대표이사는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다. “이 여성들은 사회문제와 불편함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 솔루션을 실천하고 현실화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 사무실에도 그런 여성이 많아요.”
사회의 기대를 떠나 나다워지고, 생각에 멈추지 않고 실천하는 행동력의 그녀들. 여기 사무실에도 있다. 그렇다면 보그 리더의 내년 연사는 우리 주변의 평범하지만 비범한 여성을 세우면 어떨까 싶다. 세상이 화려하게 주목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멋짐을 드러내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먼저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을까. 섭외 여부는 비밀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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