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아주 납작해진 병뚜껑을 한참 들여다보면

2026.04.02

아주 납작해진 병뚜껑을 한참 들여다보면

한국 미술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몇몇 장면 혹은 전시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엘 아나추이의 전시가 그렇습니다. 2019년쯤이었을까요, 베니스 비엔날레 아르세날레에 설치된 엘 아나추이의 대규모 설치 작품을 보면서 무척 감탄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현대미술계가 지금처럼 제3세계 작가를 눈여겨보기 훨씬 전부터 가나 출신의 1944년생 작가 엘 아나추이는 대형 병뚜껑 작업으로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탈식민주의 예술 형식과 재료 실천을 일리 있게 풀어낸 작가로 미술계에서 회자됐습니다. 금속 폐기물로 만든 거대한 천 같은 조각을 보면서, 아마도 그에게는 병뚜껑이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이지 않았을까 짐작하기도 했지요. 그때처럼 화이트 큐브 서울 전시장에 그의 금속 작업이 설치되었습니다. 시대와 맥락이 모두 변화한 지금도 아나추이의 작업은 뭉클한 감흥을 선사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진보한 조각의 본질을 함께 보여줍니다.

엘 아나추이 개인전 ‘LuwVor’의 모습.
엘 아나추이 개인전 ‘LuwVor’의 모습.

아나추이의 작업은 멀리서 볼 때는 장엄하고, 가까이서 보면 정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작품은 설치된 장소와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반응하고 변화합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릴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신작은 아나추이의 금속 작업 가운데 최초로 ‘완전한 상호성의 논리에 따라 구상되고 전시되도록 기획’한 작품이라는군요. 조각의 안과 밖, 앞과 뒤 중 더 중요한 면이 없고 심지어 서로 대등하다는 겁니다. 보통 병뚜껑의 안쪽 면은 은은한 은색으로 반짝이고, 바깥쪽 면에는 브랜드가 인쇄되어 있지요. 공간에 놓인 그의 작업은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제 형태와 아우라를 발산합니다. 일반적으로 관람객이 보게 되는 앞면과 숨은 뒷면,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조각의 모든 면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죠. 더군다나 작은 병뚜껑을 일일이 절단하고, 펴고, 접고, 구리철사로 엮은 그의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작업을 가능케 했을 모든 이의 존재까지 떠오릅니다.

‘LuwVor I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52×258cm.
‘LuwVor I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52×258cm.
‘LuwVor I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52×258cm.

보통 조각이 가지는 양감, 부피감에 대한 인식은 아나추이의 작업에서 표면으로 이동합니다. 납작한 대상이 이토록 풍성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신기한데요. 언뜻 명확한 평면체로 보이는 작업은 안과 밖,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없애면서 공간에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듯 유기적인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작은 틈새, 원형의 구멍, 불규칙한 끊김의 지점에서 드러나는 철사와 구조체의 존재는 이 작업이 순수한 창조 과정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재발명된 조각’임을 시사합니다. 그동안 아나추이의 작업이 어떤 서사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이번 작업은 자신의 조각이 작동하는 원리를 정직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더 나아가 이 작품이 어떤 확장성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장소에서 어떻게 변형될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참고로, 아나추이의 이번 작품은 같은 기간 홍콩에서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엘 아나추이 개인전 ‘LuwVor’의 모습.

당연하게도, 모든 미술 작업은 그 작가의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아나추이의 작업 역시 그가 살아오고 보아온 세상을 담고 있을 겁니다. 여기에는 과거가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이라는 탈식민주의 신념도 있고, 과거로부터 계승된 감각을 새로운 조형 언어로 바꿔내는 예술가의 도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금속 작업을 완성된 오브제로 여기는 대신 시간 안에서 끝없이 순환하며 회귀하는 대상이라고, 지금, 이 순간은 그 과정의 한때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나추이만의 영원한 유동성, 유동적인 무한함에 대한 통찰이 우리가 사는 현재의 이곳을 다시 보도록 이끕니다. 조금씩 흔들리고 움직이는 조각은 그렇기에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

‘LuwVor I’, 2025, Aluminium, wood, copper wire, 224×250cm.
‘LuwVor IV’, 2025, Aluminium, copper wire, 260×300cm.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보기
정윤원(미술 애호가, 작가)
사진
화이트 큐브 서울 제공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