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다른 설명은 불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만하다. 세계적인 작가, 누군가의 원더랜드, 누군가의 무궁한 세계, 누군가의 일상의 리추얼.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으며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하루키 덕후라고 자부한다면, 이제 막 하루키 세계로 들어선 초심자이자 입문자라면, 놓칠 수 없는 전시가 열린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플랫폼엘)가 개관 10주년을 맞아 야심 차게 준비한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간 플랫폼엘은 렉처, 전시, 퍼포먼스, 영상 작업을 두루 오가며 동시대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작가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자리해왔다. 10년의 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예술 애호가들이 꾸준히 찾아 읽고 탐닉하는 작가, 작가들의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호명한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니. 전시 제목이 딱 알맞고, 전시 형식에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진다. 하루키 앞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니까. 하루키가 그리는 작품 속 세계만큼이나 말이다. 방대하고 구체적인 하루키 세계를 전시로 옮겨왔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무라카미 하루키가 와세다 대학교 국제문학관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에 기증한 개인 소장품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이를테면 하루키가 직접 수집한 40여 개국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실물 출간본, 1974년 하루키가 직접 운영한 재즈 카페 ‘피터 캣’에서 사용한 LP, 하루키가 직접 그린 드로잉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
두 번째는 하루키가 30여 년간 함께 작업을 이어왔으며, 그야말로 창작과 인생의 긴밀한 동반자인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원화 200여 점을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귀하다. 색을 입힌 필름을 칼로 오리고 붙이는 방식인 팬톤 오버레이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온 그의 작업 공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소장한 그림과 오브제가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 하루키와 안자이 두 사람이 서로를 떠올리며 쓰고, 서로의 작업을 통해 영향받은 지점을 전하는 에세이 일부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 씨와의 작업에 대하여” 같은 안자이의 글이 발췌돼 벽면을 채우거나, 반대로 하루키가 기억하는 안자이에 대한 글이 공간을 채운다. 창작자로서뿐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사려 깊은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이 끝나면 한밤중에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첫 소설을 쓰던 나날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문학동네) 중 일부
하루키를 말할 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면, 단연 고양이다. ‘피터 캣’이라는 재즈 카페 시절부터 하루키는 고양이와 함께했다. 고양이는 그의 영원한 친구다. 집필할 때도 고양이를 곁에 두고 함께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또한 고양이는 하루키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곤 한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는 고양이가 실종되면서 일상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며 인간이 아닌 비인간 서사로의 문을 허물없이 스르륵 열어젖혔다.

“그나저나 연필이란 제법 귀여운 필기구다. ··· 단순하다면 실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 수많은 수수께끼와 예지가 함축되어 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문학동네) 중 일부
하루키를 말할 때 이야기하는 또 하나를 들자면 그의 엄청난 수집광적 기질과 ‘취미 부자’의 면모다. 하루키가 찾아낸 ‘행복을 위한 사적인 리추얼’에 가깝다. 이번 전시는 하루키의 행복한 의식과 의례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취미 세계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끔 꾸렸다. 연필 애호가뿐 아니라 그는 티셔츠 수집가이기도 하다. 티셔츠는 그에게 단순한 옷이 아니라 기억과 생활의 정서가 깃든 감성적 가치가 있는 집합체다. 관심과 애정을 잔뜩 담아 잡지 <뽀빠이>에 1년 반 동안 티셔츠를 주제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애정하는 것을 창작으로 이어지게 했으니 이만한 선순환이 또 없다. 잘 알려져 있듯 달리기 역시 그가 오랫동안 빠져 있는 의식이자 활동이다. 달리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귀를 읽다가 눈을 돌리면, 그가 참가한 마라톤 대회에서 얻었다는 메달, 그가 신은 운동화가 전시된 걸 발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는 하루키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조명해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플랫폼엘은 하루키에게 영감을 받은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 5인을 초대해 그들에게 하루키에 대한 재해석을 청했다. 강애란, 김찬송, 이원우, 순이지, 한경우. 이들 작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키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만의 개성으로 작품화했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그 경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허무는 하루키 세계의 특징과 강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회화, 설치, 미디어 등 다양한 현대미술 언어를 활용한 저마다의 해석이 관람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궁금해진다. 하루키의 영향 아래 있는 동시에 하루키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즐거움이랄까. 느슨하게 이어진 감각의 공동체랄까.


플랫폼엘 전관에서 대대적으로 열리는 전시의 마지막 묘미는 전시관 자체의 공간 미학이다. 루이까또즈의 곡선을 건물의 형상으로 구현한 듯한 건축이 주는 안온하고 부드러운 인상, 하나의 전시관에서 다른 전시관으로 이동할 때 외부로 이어지는 공간이 주는 환기, 낯선 세계로 간다는 모종의 즐거움, 그때 내려다보는 중정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루키 세계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듯하달까.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하루키 월드를 탐색하며 누벼볼 만한 그럴듯한 장소다.
- 포토
- 플랫폼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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