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방콕과 카오야이에서 만나는 치유의 순간_미술 실크로드

2026.04.08

방콕과 카오야이에서 만나는 치유의 순간_미술 실크로드

화재로 버려진 건물은 방콕 쿤스트할레가 되었고, 벌목하고 상처 입은 땅은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로 변모했다.

자연에 둘러싸인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 일본 아티스트 후지코 나카야(Fujiko Nakaya)가 하루에 세 번, 수백 개의 호스로 수증기를 뿜어내는 ‘안개 조각’을 선보였다.

태국에 한국인이 만든 미술관이 있다. 결혼과 함께 태국으로 귀화한 마리사 찌아라바논(Marisa Chearavanont) 대표는 태국 최고 기업 CP그룹 안주인으로서 국제 교류에 힘써왔다. 최근 미술관 두 곳을 개관하면서 현대미술 공간이 부족했던 태국에 세계인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그녀가 선보인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는 방콕 시내에 있는 미술관이고,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Khao Yai Art Forest)는 국립공원 인근의 야외 미술관이다. 두 곳 모두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꾼 곳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불이 난 폐건물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방콕 쿤스트할레.

미술관은 꼭 유명한 건축가가 만들어야 할까? 그녀의 미술관은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21세기 건축을 재고하게 한다. 방콕 쿤스트할레 건물은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폐허였다. 원래 교과서를 인쇄하는 유명 출판사 건물이었는데, 25년 전 화재가 발생해 버려진 것. 팬데믹 이후 미술관을 만들기로 결심한 마리사 대표가 이 건물을 발견했다. 이곳에 담긴 세월의 흔적에 매료된 그녀는 재빨리 계약해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는 것을 막았다. 외관만 보아서는 미술관 같지 않은 크고 낡은 건물이다. 들어가는 입구도 작지만, 막상 입장하면 웅장한 공간이 펼쳐진다. 마리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층 건물 세 동이 연결된 낡은 건물이에요. 처음에는 유명 건축가와 손잡고 리노베이션할 계획이었는데, 그가 이 아름다운 구조를 모두 허물고 싶어 해서 협업을 취소했어요. 정식 개관에 앞서 지난겨울 문을 열었는데, 일부러 리노베이션을 최소화했죠. 그러는 바람에 비가 새는 데도 있지만, 그곳에는 작품이 망가지지 않을 미디어 아트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멋진 기둥이 그리스 신전 같은 루프톱 테라스에서도 천장을 굳이 만들지 않고 필름을 상영합니다.”

전기, 에어컨, 엘리베이터 같은 기본 공사만 했고, 건물 대부분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다. 개관 이후에는 작가가 직접 전시하고 싶은 공간을 정하면, 그 층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최소한으로 리노베이션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 중이다. 마리사 대표는 이곳이 전시를 통해 조금씩 변화하길 기대하면서도 아직 고민 중이다. 이런 최소한의 리노베이션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새로운 건축가와 전체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할지 말이다.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에도 새로 건물을 짓기로 했지만 취소했고, 자연 속 조각 공원 컨셉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그녀는 한꺼번에 새롭고 근사한 미술관을 완성할 욕심을 자제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두 미술관의 관장은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Stefano Rabolli Pansera)로, 심지어 헤르조그 앤 드뫼롱 건축사 사무소에서 근무한 건축가 출신이다. 건축에 대해 두 사람은 계속 고심하고 있다.

그녀는 전시를 위해 늘 태국 작가를 먼저 초대한다. 작가는 그녀가 운영하는 레지던시에 머물며 작품을 구상하고, 태국 작가들과 교류한다. 이 두 미술관은 여러 아티스트 상주 프로그램과도 연계되어 있어 태국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도 해외에서 초대를 받을 수 있다. 각국 예술가들이 상호작용하며 독창적 예술 언어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방콕 쿤스트할레 개관 이후 오노 요코, 미셸 오데르, 리처드 노나스, 마크 브래드포드의 전시가 열렸다. 프랑스 필름메이커 미셸 오데르는 이 건물에 입주한 첫 아티스트였다. 특히 방콕 거리의 일상을 담은 작품은 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유명한 작가만 소개하진 않는다. 마리사 대표가 한 대학생의 작은 돌 설치 작품을 발견해 전시를 주선했다.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녀는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무니페리와 유진 한나 박의 영상 작품도 상영했다.

방문 당시 개관 1년을 맞은 미술관에서는 세 개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미타 델 산티(Mitta del Santi)> <일상적 오브제(Vernacular Objects)> <장소 없는 설명(Description Without Place)>이 그것.

방콕 쿤스트할레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태국 섬유 예술가 플로엔찬 무크 비냐라튼의 전시 ‘미타 델 산티’를 선보였다.

<미타 델 산티>는 태국 섬유 예술가 플로엔찬 무크 비냐라튼(Ploenchan Mook Vinyaratn)의 놀라운 직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플로엔찬은 섬유 직조를 물질적 과정을 넘은 사회적 행위로 소개하며 ‘치유’라는 예술 기능을 중시하는 미술관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여러 서사가 얽혀 있는데, 먼저 이 직물 설치는 과거 인쇄소였던 미술관의 역사를 반영했다. 작품은 총 399개 원형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각마다 과거 이곳 인쇄소에서 제작했던 아동 교육 서적에서 발췌한 단어를 새겼다. 텍스트 조각이 모여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되면서, 장소의 기억은 살아 있는 이야기로 변화했다. 한구석에는 천 조각이 인쇄소의 원래 로고인 세 개의 원이 서로 맞물린 형태를 떠올리는 원형으로 정교하게 잘려 있다.

이 작품은 작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함께 훈련하고 작업해온 태국 여성들을 초대해 같이 작품을 완성했다. 아름다운 공동 작업을 통해 직조는 공예이자 공동체 예술이 되었고, 재활용하거나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직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카세트테이프, 낚시용 나일론, 황동 줄, 루렉스 얀(Lurex Yarn)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재료를 사용하는 그녀의 작품은 장식의 범주를 넘어 집단 경험에 대한 촉각적 서사를 만든다. 그래서 관람객은 작품을 통해 도시의 역사와 환경의 연관성을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또한 어두운 역사를 극복하는 회복력을 표현한다. 섬유 작품이 구불구불 바닥으로 뻗어나가고 벽을 감싸기도 하는 광경은 아름답다. 직조는 본질적으로 씨실과 날실이 연결되어 관계를 이루는 행위이며, 작가에게 이는 직물 생산 이상의 연결과 협력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창작이다. 낡거나 버려진 것으로 보이던 것들이 멋진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모습은 이 미술관의 탄생과도 맞닿아 있고, 복잡다단한 시대를 반영하는 듯하다.

<일상적 오브제> 전시는 방콕 출신의 큐레이터 마크 찌아라바논(Mark Chearavanont)이 큐레이션했다. 제목 그대로 미술관 주변에서 수집한 레디메이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야오와랏(Yaowarat) 지역 특유의 오브제 중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물건이 재미있다. 거리에서는 영역을 나타내는 오브제지만, 맥락을 달리해 미술관에 전시하면 미적이고 문화적인 유물이 되는 것. 이런 사물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으면 단편적인 단어들이 텍스트를 이룬다. 큐레이터인 마크는 이를 통해 야오와랏 지역 특유의 토착 언어가 만들어진다고 표현했다. 방콕 쿤스트할레 인근은 여러 산업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플라스틱 끈으로 묶은 두 개의 타이어는 산티팝 로드의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나온 것이고, 둥근 아크릴판은 로터리 주변의 간판 가게에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 부서진 선풍기, 우유병, 플라스틱 의자를 조합해 정물화를 만든다. 전시 기간 동안 오브제 배치는 계속 달라진다. 반복적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문장과 의미를 만들어내며, 신성한 예술 오브제의 기존 관념에 도전한다. 두 개의 전시는 2월 8일, 3월 15일까지 진행됐다.

마지막 전시는 <장소 없는 설명>이다. 이스라엘계 프랑스 작가 압살론(Absalon, 1964~1993)이 구상한 여섯 개의 ‘셀(Cells)’을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라는 점이 특별하다. 작품 6점은 가정과 소속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각 셀은 작가의 신체 사이즈에 정확하게 맞춰 제작한 1:1 크기의 주거 공간으로 파리,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뉴욕, 텔아비브, 도쿄 등 여러 도시에 동시에 존재하도록 구상되었으며, 특정 지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셀은 맥락 없는 집이자 땅 없는 영토다. 압살론은 이를 ‘도시 속 바이러스’라고 묘사했다. 집, 재산,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자율적 존재라는 뜻이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표면, 부피, 개구부는 일상적 몸짓의 크기에 맞춰 정밀하게 조정되었다. 압살론에게 셀은 도피처가 아니라 변혁의 방법이었다. 셀에 거주한다는 것은 일상을 안무 행위로 바꾸고, 거주 자체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기도 하다. 셀은 스스로 부과한 폐쇄인 동시에 우리를 형성하는 제도적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다. 압살론의 프로젝트에서 거주는 한계이자 자유가 된다. 이 작품은 가정생활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집을 중립적 배경이 아니라 삶이 의식적으로 형성되는 무대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방콕 쿤스트할레와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를 설립한 마리사 찌아라바논과 디렉터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아래 서 있다.

“방콕 쿤스트할레와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예술로 서로를 치유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방콕 쿤스트할레에서는 버려지고 불이 났던 건축물과 현대의 미술품이 서로를 보듬고,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는 벌목하고 상처 입은 땅을 예술로 치유합니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세계의 예술가들이 태국과 교류하고 있으니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마리사 대표는 전쟁과 테러, 첨단 기술과 AI의 출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기에 예술이 더욱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어느 때보다 치유가 중요하며, 예술은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상처를 승화시킨 방콕 쿤스트할레는 현대인에게 더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VK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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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나랑
    이소영(미술 전문 저널리스트)
    사진
    COURTESY OF BANGKOK KUNSTHALLE, KHAO YAI ART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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