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예술계 기강 세우는 전시 3

2026.04.11

예술계 기강 세우는 전시 3

파괴된 조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고, 졸고 있는 전통을 깨우며, 관람 방식을 새롭게 제안하는 전시 셋.

병뚜껑으로 직조한 영혼의 울림 <LuwVor>

세계적인 작가 엘 아나추이(El Anatsui)의 신작을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전시 <LuwVor>가 4월 18일까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개최됩니다. 가나 출신으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평생공로상을 받은 그는 30여 년간 버려진 병뚜껑을 예술적 자원으로 활용해 생성과 소멸, 그리고 문화적 서사를 탐구해온 거장이죠. 전시 제목인 ‘루보(LuwVor)’는 작가의 모국어인 에웨어(Ewe)로 ‘영혼(Spirit)’을 뜻하며, 전시가 열리는 ‘서울(Seoul)’과 ‘영혼(Soul)’의 음성적 유사성을 활용해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번 전시는 병뚜껑 작업을 확장한 대규모 신작들을 아시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로, 작가가 처음으로 조각의 앞면과 뒷면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브랜드가 인쇄된 면은 토양을 닮은 화려한 색채를, 그 반대편은 미묘한 은빛 평면을 이루며 설치 방식에 따라 관람객에게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죠. 작가는 작품을 고정된 형태가 아닌, 장소에 따라 흐르듯 드리워지는 ‘비고정적 형태’로 정의합니다. 수천 개의 유색 금속을 자르고 펼쳐 구리선으로 정교하게 엮어낸 조각은 “깨뜨리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재탄생을 위한 조건”이라는 그의 철학과 과거로 돌아가 배움을 얻는다는 아칸 문화 개념 ‘산코파(Sankofa)’와 맞닿아 있으며, 과거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탈식민주의적 신념을 보여주죠. 엘 아나추이의 이번 신작들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시작해 화이트 큐브 홍콩과 아트 바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장소 화이트 큐브 서울 예매 무료 인스타그램 @whitecube

El Anatsui, 'LuwVor I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52×258cm | 99 3/16×101 9/16in. © El Anatsui. Photo © White Cube (Theo Christelis)
El Anatsui, 'LuwVor I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52×258cm | 99 3/16×101 9/16in. © El Anatsui. Photo © White Cube (Theo Christelis)
El Anatsui, 'LuwVor II', 2025, Aluminium, copper wire, 270×303cm | 106 5/16×119 5/16in. © El Anatsui. Photo © White Cube (Theo Christelis)
El Anatsui – ‘LuwVor’, White Cube Seoul – 18 March – 18 April 2026.

졸고 있는 전통 깨우기 <안구선사>

박찬경 작가는 옛 그림을 재해석해 졸고 있는 전통을 깨웁니다. ‘선문답’은 선불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주고받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문답을 뜻합니다. 전시작 ‘안구선사’(2025)는 작가의 회화적 선문답의 결과물로 손가락 하나를 잃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구지선사’ 이야기에 영감받아 눈을 잃은 동자승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화가 또는 작가 자신을 비유한 동자는 항상 무언가를 모방하다 눈이 뽑히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죠. 작가는 이처럼 전통 회화의 도상을 간추리거나 만화적으로 과장하며 전통 미학이 내재한 그로테스크와 숭고, 판타지, 유머를 새롭게 끌어냅니다. 이 외에 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랐다는 혜가의 고사를 그린 ‘혜가단비도’(2025)와 불법을 배우고자 머리에 화로를 이고 갔다는 혜통의 이야기를 해석한 ‘혜통선사’(2025) 등 박찬경 작가의 ‘선불교 그로테스크 SF’ 회화 작품 20여 점은 5월 10일까지 감상할 수 있습니다. 장소 국제갤러리 예매 무료 인스타그램 @kukjegallery

박찬경(b. 1965), '안구선사', 2025, Oil on canvas, 139.5×203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박찬경(b. 1965), '혜가단비도', 2026, Oil on canvas, 130.5×19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박찬경(b. 1965), '고란사', 2024, Oil on canvas, 70×70cm(3 panels).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조선의 사적인 예술 감상을 현대 갤러리로
<테스터 황 갤러리>

황규민 작가의 개인전 <테스터 황 갤러리>는 관람 방식을 새롭게 제안해 눈길을 끕니다. 매주 화요일이면 전시장에는 ‘황씨 노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시 관람은 그에게 커피를 주문하며 시작되죠. 황씨는 작가가 설정한 캐릭터로 그와 함께 작품 위에 앉아 작품을 만져보고 대화를 나누며 관람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작가가 그림을 직접 만졌을 때 느낀 긍정적 감상에서 비롯된 방식으로 그는 ‘손바닥 감상은 작가와 소장자의 특권으로 남았다’라며 그림을 직접 만져볼 때의 감동을 관람객도 경험해보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런 감상 방식은 과거 조선의 선비들이 방에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손으로 그림을 만지고 돌려보던 사적인 감상 방식을 현대의 공공 전시 공간으로 불러온 것입니다. 한지 위에 수묵과 호분, 석채로 그린 ‘헤레스 조각상’과 ‘부암 동구’ 등의 작품을 손바닥으로 직접 느끼다 보면, 날씨와 습도에 따라 숨 쉬듯 변하는 그림의 생생한 질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토대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새롭게 창안할지 고민하는 황규민의 실험적인 ‘그림 모임’은 4월 18일까지 이어집니다. 장소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예매 무료 인스타그램 @space_willingndealing

황규민, '헤레스 조각상', 2025, 한지에 수묵, 호분과 석채 채색, 180×130cm.
황규민, '부암 동구', 2025, 한지에 수묵, 호분과 석채 채색, 130×180cm.
황규민 개인전 '테스터 황 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 한황수
황규민 개인전 '테스터 황 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 한황수
김성화

김성화

프리랜스 에디터

<보그> 컨트리뷰팅 에디터로 전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오디너리>와 기내지 <아시아나>에서 여행과 문화, 미식을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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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큐브 서울, 국제갤러리,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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