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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기에리 디자이너 로시 마타니의 갤러리 같은 집

2022.07.05

by 가남희

    알리기에리 디자이너 로시 마타니의 갤러리 같은 집

    로시 마타니는 단테의 <신곡>처럼 주얼리 피스를 통해 삶의 어둡고 힘든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 서사의 단상은 그녀의 집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여행을 통해 수집한 고대 로마 도자기와 오브제, 책을 진열한 책장. 맨 위 칸에 놓인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신곡> 오리지널 작품이다.

    런던 도심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클러큰웰(Clerkenwell)은 런던 토박이들도 지나치기 쉬운 소박하고 고요한 동네다. 특유의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주거 지역의 아담한 모습은 오래된 창고, 공장과 함께 어우러져 언뜻 서울 성수동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키 큰 나무가 모여 시원한 그늘을 내주고, 1800년대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그랜빌 스퀘어 골목에 주얼리 브랜드 알리기에리(Alighieri) 디자이너 로시 마타니(Rosh Mahtani)의 타운하우스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내부는 제가 좋아하는 배스(Bath)의 프랜시스 갤러리(Francis Gallery)와 런던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 Gallery)에서 영감을 받아 꾸몄습니다.”

    알리기에리의 팬이라면 그 이름의 어원을 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서를 좋아하던 로시 마타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했지만, 졸업한 뒤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길을 잃었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사색에 잠기곤 했어요.” 그러다 문득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어린 시절 부적처럼 모으던 빈티지 주얼리를 떠올렸고, 그날로 런던의 해턴 가든에서 밀랍 조각 코스를 수강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그녀는 대학 시절 열심히 공부하던 문학 작품을 떠올렸다. 13세기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장편 서사시 <신곡(Divina Commedia)>이었다. 그리고 각 칸토(Canto, 한 곡 구성을 일컫는 말)에서 영감을 받은 주얼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베니스를 여행할 때 발견한 동전을 복원해 밀랍으로 주조한 뒤 만든 목걸이가 대표 아이템이다. 동전에 양각된 사자를 첫 번째 칸토인 서곡에 등장하는 사자와 연결했다.

    “처음엔 뭔가에 집중하려고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밀랍을 가지고 밤새 작업하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어요. 모든 과정은 제가 겪던 불안감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배출구 같았죠. 단언컨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불완전하고 거친 텍스처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든 습작은 친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만드는 것마다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브랜드를 론칭하기로 결심하고 5년이 채 안 되어서 연간 500%의 성장률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밀라노의 10꼬르소 꼬모(10 Corso Como), 파리의 갤러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등 세계 각지의 백화점에 입점하며, 2020년엔 ‘퀸 엘리자베스 2세 어워드 영국 디자인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크림색 소파와 안락의자는 프레드 릭비가 직접 디자인했다. 기하학적 도형이 돋보이는 유리 커피 테이블은 빈티지 제품.

    올 초에 새롭게 문을 연 런던 쇼룸에서 단 5분이면 로시의 타운하우스에 당도한다. “이사할 집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동네를 방문했어요. 쇼룸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길 바랐죠. 저는 시간을 꽤 알차게 쓰는 편이거든요.” 로시가 설명했다. 수소문 끝에 집을 찾았지만, 리모델링에 꼬박 1년이 걸렸다. 팬데믹 시기와 겹쳐 자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욕실과 주방을 완전히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화장실은 파란색 타일로 가득했고, 주방은 끔찍했거든요. 공사 기간 내내 이곳에서 지내야 했는데, 수도가 완성되지 않아 고생 좀 했죠(웃음). 마침내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모든 것이 결국 구현됐음을 발견했죠. 정말 보람 있는 시간이었어요.”

    각종 도기와 책을 열심히 수집하는 로시의 컬렉션을 볼 수 있는 거실의 벽난로 옆 벽장. 문손잡이에는 밀랍으로 조각한 알리기에리의 주얼리 가방이 걸려 있다.

    거리의 화강석, 고대 로마 도자기, 콜롬비아산 도기와 앤티크 거울… 로시는 10대 시절부터 쉽게 스쳐 지나갈 법한 오브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수집해온 모든 기념비적 물건을 진열하기 위해 집 전체가 하나의 갤러리 공간처럼 유기적으로 연출되길 원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프레드 릭비(Fred Rigby)에게 조언을 얻어 나무 바닥을 어두운 갈색으로 물들이는 작업으로 깨끗한 흰 벽과 대조를 이루도록 했다. 현관으로 들어설 때 보이는 천장에 아치를 추가하니 분위기가 더 그럴듯했다.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포함해 제가 살아온 모든 장소의 교차점처럼 느껴지길 원했어요. 전통과 현대 사이의 끊임없는 균형에 관한 곳이죠.”

    가장 좋아하는 서적을 유리 커피 테이블 위에 규칙적으로 늘어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오브제 기능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 좋아하는 서적을 유리 커피 테이블 위에 규칙적으로 늘어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오브제 기능을 톡톡히 해낸다.

    위층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운 건 역시 전 세계 빈티지 마켓에서 발견한 조각들이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유리 커피 테이블 위엔 오래된 서적이 돋보인다. 특히 살바도르 달리의 <달리: 보석 속 그의 예술에 대한 연구(Dali: A Study of His Art in Jewels)>는 알리기에리의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테의 희귀한 초판 도서, 어빙 펜의 사진집 ‘Still Life’, 나카무라 마사야(Masaya Nakamura)의 <아프리카에서의 에마 누드(Ema Nude in Africa)>에 차례로 시선이 머문다. “여덟 살 때까지 잠비아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화와 유산이 제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죠. 사진이 정말 좋아요.”

    이 집을 위해 처음 구입한 지오반니 반치(Giovanni Banci)의 플로어 램프 옆에서 포즈를 취한 로시 마타니.

    벽난로 위로는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멋지게 녹이 슨 빈티지 램프가 나란히 놓여 있다. “땅속에서 발굴한 것처럼 역사가 있는 오래된 것들을 좋아해요. 그런 의미에서 런던은 보물을 찾기에 훌륭한 도시죠. 알피스 앤티크 마켓(Alfies Antique Market), 캠던 마켓(Camden Market), 브로드웨이 마켓(Broadway Market), 엔젤(Angel) 지역의 채플 마켓(Chapel Market)과 주말에 열리는 플리 마켓을 추천해요.”

    내추럴한 컬러와 다양한 텍스처로 편안한 느낌을 더한 주방은 이 집에서 단연 핵심이다.

    내추럴한 컬러와 다양한 텍스처로 편안한 느낌을 더한 주방은 이 집에서 단연 핵심이다.

    로시는 이 집에서 시야가 확 트인 주방 공간을 가장 좋아한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고요한 아침에 긴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꽤 마법 같다. 격자 모양으로 난 시원한 창문 덕에 집 안 곳곳에 따스한 햇살이 들어선다. “사진 찍는 취미가 있어서 카메라가 몇 대 있는데, 이곳으로 놀라운 빛이 쏟아질 때마다 주얼리 피스를 촬영하곤 해요. 정말 완벽한 장소죠.”

    주방과 계단 사이의 벽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열린 형태의 벽으로 시공했다. 덕분에 램프를 켜지 않아도 실내 곳곳에서 찬란한 빛을 감상할 수 있다.

    계단 옆 벽에는 친구이자 조각가 키라 프레이예(Kira Freije)가 선물한 페인팅 작품과 피렌체에서 공수한 조각을 걸었다.

    ‘아시리아 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사자가 조각된 작품은 알리기에리 론칭 초기에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구입한 것이다.

    평화로운 아침 시간과 달리 저녁 시간엔 북적일 때가 많다. 몇몇 친구나 가족을 초대해 소규모 파티를 즐긴다. 단골 메뉴는 이탤리언 요리. 파스타, 토마토와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를 넣은 바질 샐러드, 프로세코 와인이 빠지지 않는다. “정갈하고 예쁘게 차리고 싶지만, 저녁 파티는 어수선할수록 좋아요.”

    부드럽게 풍화된 지중해의 자연처럼 벽면을 연출하기 위해 욕실 전면엔 라임 워시 페인트를 시공했다. 18세기의 석조 싱크에서 오랜 친구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프레드 릭비의 위트가 돋보인다.

    아래층 한쪽 창 밑에 편안한 데이베드를 두고 책을 읽을 수 있는 휴식 공간을 꾸몄다. 바닥의 도기는 피렌체를 여행할 때 발견한 빈티지 제품.

    침대 옆에는 알피스 앤티크 마켓에서 구입한 지오반니 반치의 조각 같은 램프를 두었다.

    집이란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완전히 방전될 수 있는 곳이다. 그녀는 침실과 건식 욕실을 분리하는 대신 침실에서 목욕하기로 했고, 곡선이 일품인 알바 알토의 우드 스크린을 놓아 부티크 스파 같은 느낌을 연출했다. 비로소 이곳은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되었다. “집에 오면 우디 향이 나는 캔들을 여러 개 켜두고, 목욕하는 시간을 즐겨요. 그럼 하루가 꽤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유려한 곡선의 알바 알토 우드 스크린을 욕조와 침대 사이에 놓아 침실에 독립적인 목욕 공간을 만들었다. 하얀 욕조 맞은편 벽에 걸린 사진은 오스트리아에서 로시 마타니가 직접 촬영한 알리기에리 캠페인 사진의 일부.

    벽을 활용해 근사한 책상을 만들었다. 돌로 된 빈티지 의자는 엠카다나(M. Kardana)에서 구입했다.

    바쁜 스케줄에도 자투리 시간엔 여전히 책을 읽는 로시는 해가 잘 드는 아래층 한쪽에 독서 공간을 마련했다. 알리기에리의 초석이 되어준 단테의 진귀한 <신곡> 옛 판본이 보인다. “40권 정도 모았어요. 집에 불이 나면 아마 이 책 먼저 가져갈 거예요(웃음).” 단테의 이야기는 한 남자가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 않나요? 보통 우리가 새삼스레 자신을 찾는 상황은 단테처럼 길을 잃고 헤매면서부터죠. 저는 문학을 공부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밋밋할 수 있는 계단 코너에는 남은 대리석을 활용해 간이 선반을 만들었다. 엔젤 지역의 플리 마켓에서 구입한 화병을 조각품처럼 놓았다.

    이제 그녀는 알리기에리를 통해 불완전함과 취약함에 관한 이야기를 담는다. “고객이 직접 운명을 결정하고, 일련의 감정을 해소하게 하는 주얼리를 만들고 싶어요. 소중한 의미로 가득 찬 하나의 분신 같은 거죠.”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고 일어서는 단테의 작품처럼 그녀의 주얼리는 강인함을 상기할 수 있는 상징물과도 같다. 그날그날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목걸이와 팔찌, 반지를 여러 개씩 더한다.

    계단에서 보이는 테라스의 풍경. 일요일 낮엔 여유를 선물하는 작은 쉼터가 된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집 안 곳곳을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 그곳에서 살아온 것처럼 공간과 잘 어울렸다. 미처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여백이 느껴지는 곳도 있었다. 로시는 집이 미완성의 상태라고 말한다. “주얼리 레이어드와 달리 공간은 비워두는 걸 선호해요. 인생의 다음 챕터를 채우기 위해 기다리는 거예요.”

    “주얼리는 우리의 운명과 감정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런던 클러큰웰의 타운하우스 앞 계단에 앉은 로시 마타니가 말했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김민은
    컨트리뷰팅 에디터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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