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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피플 햇빛 졸업기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3.01.27

by 이소미

    경기 피플 햇빛 졸업기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출근하기 싫다. 추워서.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에는 옷을 어떻게 입든 하루에 1시간은 덜덜 떨 각오를 하며 집을 나선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10분, 지하철역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5분,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평균 10분, 정류장에서 회사까지 5분. 퇴근길은 거꾸로 반복.

    출근길에 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널 때뿐이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시간상 해가 덜 뜨기도 했거니와 고만고만한 낮은 높이지만 빼곡히 들어선 빌라 건물 탓에 내가 걷는 길은 늘 그늘지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고가도로 밑이기 때문에 햇빛을 바라볼 순 있어도 맞을 순 없다. 정류장에서 회사까지 가는 길은 높은 건물이 즐비해 햇빛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서 버스에 탈 때만큼은 기를 쓰고 왼쪽에 앉는다. 그래야 햇빛을 직방으로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만 덜하다면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끓어 넘치는 햇빛을 맞을 수 있다. 그때 잠깐이나마 한기에 전 옷과 몸을 녹인다.

    나는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컸다. 엄마가 무리해서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오직 나와 내 동생이 등하교할 때 찻길을 건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초·중·고등학교 내내 찻길을 건너 등하교한 적이 없다. 대신 오랫동안 공원 길을 걸었다. 내가 사는 도시는 아파트 단지와 동네가 모두 공원 길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적하고 평화롭고 허허벌판이었다. 덕분에 12년의 세월 동안 나는 매일 그날의 날씨를 온전히 느끼며 자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나는 늘 엄마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었다. 그 나이엔 단장에 별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원래 다 그러는 건 줄 알았다. 무엇보다 엄마가 내 옷을 골라주는 걸 즐겨 했다. 겨울,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마다 입는 바람막이 외투가 있었다. 엄마가 날 깨우며 ‘일어나, 오늘 바람 세게 분대’라고 말하면 그날은 곧 그 바람막이를 입어야 하는 날이었다. 노란색 바람막이였다. 샛노란 개나리색은 아니었고 옅은 햇빛을 모아 녹이면 이런 색이 아닐까 싶은, 크림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다. 안에는 누비로 되어 있었고 겉 소재는 으레 바람막이가 그렇듯 폴리에스테르였다. 목과 손목 부분에는 아이보리 컬러의 ‘시보리(조르개)’가 잡혀 있었고 지퍼에는 별 모양 고리가 달려 있었다.

    지금 보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옷이지만 그때는 그 옷에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었다. 나는 지금보다 낯을 더 심하게 가렸다. 학교에 갈 때면 투명 망토를 입지 않는 이상 내 몸뚱이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존재감은 어쩔 수 없다 치고 그 외에는 최대한 시선을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모르는 아이가 복도에서 말을 걸거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만 시켜도 눈물이 차오르는 나에게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노란색 옷을 입는다는 건 숨을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그 옷을 입으면 내가 병아리 같다고 좋아했지만 겨우 아홉에서 열 살 된 아이에게 자기가 병아리처럼 보이든 닭처럼 보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때 내게 중요한 건 오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에 극도의 소심한 성격까지 더해져 엄마에게 이 옷이 싫다는 말조차 미안해서 잘 못했다. 등교 준비를 마치고 신발장 앞에 가면 엄마가 두 손으로 옷의 양쪽 어깨 부분을 쥐고 한 번 툭 털었다. 그럼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한 팔씩 소매에 옷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야무진 손길이 목도리까지 꽁꽁 동여매고 나면 빨간색 가방을 메고 그 휑한 공원 길을 향해 집을 나섰다.

    아침의 공원은 햇빛이 아주 잘 들었다. 난관이라면 아파트 단지 옆 공원 길이었다. 아파트 그림자 탓에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등굣길은 햇빛이 들지 않은 파란 구역과 빛으로 가득 찬 노란 구역의 반복이었다. 푸른색 셀로판지를 통해 보는 것 같은 어스름한 그림자 구간을 통과하면 고해상도 사진처럼 선명하고 아늑한 노란 햇빛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늘 걸음 수를 세며 걸었다. 58걸음만 걸으면 햇빛, 48걸음의 햇빛을 맞고 나면 다시 36걸음의 그늘진 곳.

    지옥 같은 파란 구역을 지나 드디어 노란 구역에 발을 들이면 그제야 좀 살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추운 건 똑같지만 얇고 보드라운 막이 쳐진 것처럼 미약한 햇빛의 열기가 몸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옷의 냉기도 살짝 가신다. 몇 걸음이면 끝날 행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어깨를 활짝 펴고 온몸으로 햇빛을 맞으려 노력했다. 햇빛이 유난히 넉넉한 날이면 부러 걸음을 늦추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햇빛으로 희미하게 익은 폴리에스테르의 온기를 동력 삼아 어둡고 스산한 그림자 구간을 지났다. 겨울 등굣길에서 배운 인생의 참맛! 나는 열 살의 나이부터 스스로를 당근과 채찍 시스템에 길들인 타고난 노예였던 것이다…

    그렇게 힘겨운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도착이다. 싫어하는 옷을 입었다는 사실에 이미 주눅이 잔뜩 든 채로 교실에 들어선다. 친구들은 내게 인사 대신 “색종이 왔네!”라는 말을 건넸다. 노란색 외투에 빨간색 책가방을 멘 내 모습이 문방구에서 파는 양면 색종이 중 빨간색과 노란색이 각 면을 차지한 색종이와 똑같다며 붙여준 별명이었다. 겨울에는 다들 부럽게도 시커먼 색의 외투를 입고 왔기 때문에 더 창피했다. 가자마자 얼굴이 빨개진 채로 노란색 바람막이를 벗는 것이 이 옷을 입은 날 학교에서의 첫 일과였다. 체육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도 노란색 외투를 입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추위에 떠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하교할 때도 외투를 입지 않는 오기를 부린 적도 많았다. 이런 날에는 문 앞에서 외투를 다시 입은 다음 태연하게 집에 들어갔다. 언제까지 싫다는 말도 못하고 이러고 살아야 하나 걱정했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엄마에게 싫다는 말뿐 아니라 더 심한 말도 거뜬히 해내는 어엿한 불효녀로 성장해 굳이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나는 추운 날 아침, 20년 전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엄마가 해주던 매듭대로 목도리를 매고 햇빛을 향한 걸음 수를 세는 대신 속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스러운 욕을 되뇌며 지하철과 버스의 시간을 체크하고, 누가 옷을 가지고 놀렸다고 해서 주눅이 들지도 않는다(주눅 들 다른 이유가 넘쳐나서 겨우 그날 입은 옷 가지고 주눅 들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밀도 높은 도시를 헤치며 출근할 때면 가끔 그때의 듬성한 공원 길과 노란 햇빛이 생각난다. 싫어하던 옷과 함께한 추운 날의 기억이지만 그 추위를 뚫고 맞았던 미약한 훈기 덕에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좋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5,00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한다. 그때는 태양이 그리 멀리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고가도로 밑에서 보는 그 햇빛과 멀리 떨어진 그 신도시의 공원과 아파트에 비치는 햇빛이 같은 곳에서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노란색 외투는 햇빛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폴리에스테르 덕에 보기 싫게 변색되었다. 혹시나 그때의 햇빛 냄새를 아직도 머금고 있진 않을까 하는 낭만적인 기대로 코를 박아보았다. 후회했다.

    에디터
    이소미
    포토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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