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뉴스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023.02.10

by 신은지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비비안 웨스트우드, 81세로 우리 곁을 떠나다.

    아시아 최초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쇼를 위해 서울을 찾은 비비안 웨스트우드. 지금은 없어진 리츠 칼튼에서 열린 패션쇼를 마친 다음 날, <보그 코리아> 2001년 7월호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하이패션이라는 동떨어진 세계에 펑크와 정치라는 테마를 가져온 영국의 강렬한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Dame Vivienne Westwood)가 지난해 12월 29일 81세로 런던 남부 클래펌 지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품속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음을 대변인이 확인했다.

    페티코트, 뷔스티에, 엉덩이 패드, 타탄 체크와 독특한 테일러링을 만들어내기 한참 전에, 비비안 이자벨 스와이어(Vivienne Isabel Swire)는 1941년 4월 8일 체셔 지방의 틴트위슬(Tintwistle)이라는 마을에서 소시지 공장 노동자인 아버지 고든, 채소 가게 점원인 어머니 도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7년 부모님의 우체국 사업을 위해 런던 근교 해로우로 이사 가기 전까지 글로섭 중등학교를 다녔다. 해로우 예술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은공예를 배웠으나 예술계에 겁을 먹고 비서학과에 진학했고, 후에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다. 1961년 어느 무도회에서 비비안은 후버 공장 견습생인 데릭 웨스트우드를 만났고, 1962년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그와 결혼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아들 벤자민 웨스트우드를 얻었으나, 세 살이 되던 해에 결별했다.

    그 후 예대생이던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을 만나 1967년 두 번째 아들인 조셉 코레(Joseph Corré)를 낳았고, 그녀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던 남부 런던에서 두 아이를 키웠다. 2007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웨스트우드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 아주 좋은 교사였어요. 모두 골칫덩이로 여기던 아이들을 좋아했다는 것만 빼면요. 발칙한 아이들 있잖아요.”

    1971년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킹스 로드에 ‘Let It Rock’이라는 1950년대 수집품과 댄디한 수트를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저녁에만 몇 시간씩 열었다. 1970년대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 의상을 만들기 전에는 그곳에서 테디 보이 스타일의 바지와 드레이프 코트, 모헤어 스웨터를 제작했다. 또 닭 뼈로 색색의 글자 모양을 만든 슬로건 티셔츠, 앞에서 뒤로 지퍼가 달린 바지, 타이다이 톱을 팔기도 했다.

    이 상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번 이름을 바꿨는데, 1972년에는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에서 1974년에는 페티시즘이 가득한 고무 소재 드레스, 니플 클램프, 스파이크 슈즈를 선보이며 ‘Sex’로 바꾸었고, 1976년에는 ‘Seditionaries’(폭동 주동자라는 뜻), 1979년에는 마침내 ‘Worlds End’라는 이름이 붙었다. “섹스 마니아라는 명성을 얻은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에요. 진 쉬림튼(Jean Shrimpton)의 말을 대신 인용할게요. ‘섹스는 내 우선순위 리스트에서 순위가 결코 높았던 적이 없다.’”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각자의 길을 가기 전 ‘세상의 끝(Worlds End)’이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뉴 로맨틱에서 영감을 받았고, 1981년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해적(Pirate)’ 컬렉션을 함께 내놓았다. 그해 영국 <보그> 커버를 장식한 자카드 팬츠, 프릴 슬리브 블라우스, 뻣뻣한 펠트로 만든 모자였다.

    “사람들의 시각을 바꿨죠.” 웨스트우드는 자신의 대표 컬렉션을 1982년의 ‘버팔로(Buffalo)’나 ‘노스탤지어 오브 머드(Nostalgia of Mud)’, 1985년 미니 크리니(Mini-Crini) 치마, 1993년 ‘앵글로마니아(Anglomania)’로 꼽았다. “펑크의 메시아 같았다고 생각해요. 기존 시스템이라는 바퀴에 살을 하나 더 갖다 댈 수 있는지 확인했죠. 새로운 아이디어 없이는 전복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1983년 첫 번째 파리 패션쇼를 열고 나서 몇 년 후, 패션 평론가들은 웨스트우드의 디자인을 “파리의 크리스찬 라크르와 스타일에 대한 영국식 답변”으로 칭하며 영국 패션 신의 부흥에 기여했음을 인정했다. <WWD>를 창간한 존 페어차일드(John Fairchild)는 1989년 자신의 저서 <Chic Savages>에서 웨스트우드를 “패션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묘사하며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6인 중 한 사람으로 거론했다. 같은 해 웨스트우드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주문했지만 아직 받지 못한 수트를 입고 대처 총리로 분한 채 <Tatler> 표지를 장식했다.

    웨스트우드가 패션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70년의 경력은 그녀를 패션의 역사로 거듭나게 했다. 펄럭이는 해적 셔츠, 1990년대 타탄 데리에르 패딩, 1980년대 미니 크리니는 모두 17세기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반면, 조세핀 황후 드레스와 풍성한 코르셋은 18세기 드레스에서 유래한 디자인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이름은 또한 패션 역사상 가장 기릴 만한 순간에도 기록되었다. 이를테면 나오미 캠벨이 1993년 가을 런웨이에서 퍼플 컬러 파이톤 소재 플랫폼 힐을 신고 넘어진 것이나 1995년 봄 패션쇼에는 미니스커트, 모자, 힐만 달랑 착용한 케이트 모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런웨이를 걷는 모습 등이다.

    또 199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4등 훈장을 수훈할 때 속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빙글빙글 돌아 치마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죠. 사진작가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 그렇게 화려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여왕님이 즐거워하셨다고 들었죠.” 웨스트우드는 2006년 여사(Dame) 칭호를 받았으며 카밀라 왕비와 2018년 웨스트우드의 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마일리 사이러스 같은 다양한 고객을 두었다(웨스트우드와 여왕의 관계는 늘 아슬아슬했다.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웨스트우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God Save the Queen’ 티셔츠에 프린트된 여왕의 입술에 안전핀 피어싱 장식을 했다).

    2002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웨스트우드를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고, 그녀만의 펑크 스타일은 2013년 다시 한번 코스튬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펑크: 카오스에서 꾸뛰르까지(Punk: Chaos to Couture)’로 주목받았다. 7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중 하나는 웨스트우드가 운영하던 ‘세디셔너리’에서 영감을 받아 열렸다. 2004년에는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했으며, 1990년과 1991년, 2006년에 영국패션협회로부터 올해의 영국 패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패션 디자인 분야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BFC상을 받았으며 2018년에는 꾸준한 기후변화 대응 활동에 대해 ‘스와로브스키 포지티브 체인지’를 수상했다.

    콘데 나스트의 최고 콘텐츠 책임자이자 <보그> 글로벌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이런 말을 전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분이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튬 인스티튜트의 전시 중 하나인 ‘앵글로마니아(Anglomania)’는 영국 패션을 기념했지만 실제로는 비비안이 더 돋보였어요. 웨스트우드는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고 모든 디자이너가 갈라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였습니다. 역사, 계급, 성, 낭만주의, 전통이 독특하게 혼합된 영국 특유의 뒤섞임을 통해 가장 마술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의상을 제작했어요.”

    웨스트우드의 런웨이는 오랫동안 정치적 플랫폼이기도 했다. 2006년 봄 컬렉션에 “저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체포하지 마세요(I Am Not a Terrorist, Please Don’t Arrest Me)”라고 적힌 티셔츠를 선보였고, 2008년 가을 쇼에서는 모델들이 관타나모 수용자에 대한 공정한 재판 기회를 달라는 사인을 들고 워킹했다. 2013년 봄 쇼에서는 기후변화 이슈를 주제로 내세웠다. 또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와 내부 고발자 첼시 매닝에 대한 지지뿐 아니라 정당, 쿨어스(Cool Earth)와 그린피스(Greenpeace) 같은 환경 단체에 대한 기부, 2011년에는 월가 점령 시위(Occupy Demonstrations)에 참여했다.

    “세상의 종말이 코앞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웨스트우드는 2016년 봄 시즌 쇼 <WWD>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쇼에서는 “수압 파쇄법은 범죄다” “긴축은 범죄다”라는 슬로건이 잔뜩 걸려 있었다. 2014년에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의 새빨간 머리털을 밀어버리기도 했다.

    웨스트우드의 이름을 딴 레이블로는 꾸뛰르, 웨딩드레스와 남녀 기성복 컬렉션이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비엔나 응용미술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오스트리아 출신의 패션 학도 안드레아스 크론탈러(Andreas Kronthaler)를 만났고 1992년에 결혼했다. 이 커플은 웨스트우드라는 레이블 아래 파트너 관계를 맺었지만, 2016년에 크론탈러는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으며, 메인 라인을 안드레아스 크론탈러 포 비비안 웨스트우드(Andreas Kronthaler for Vivienne Westwood)로 새로 이름 붙였다.

    웨스트우드의 슬라우치 파일럿 부츠는 2000년대 케이트 모스와 시에나 밀러가 주목받으면서 덩달아 다시 떠올랐고, 최근에는 ‘포트레이트(Portrait)’ 컬렉션에서 로코코 회화풍 프린트가 들어간 코르셋이 MZ세대에게 각광받았다. 늘 독립적이던 웨스트우드의 신념과 헌신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놀로 블라닉은 <보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는 뚜렷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급진적 선구자였으며, 평생에 걸친 영국 패션 산업에 대한 공헌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관습에 도전했고, 20세기에 가장 상징적인 디자인을 창조했죠.”

    2009년 <타임> 인터뷰에서 웨스트우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 회사를 직접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업가들이 제게 뭘 하라고 말하거나 뭔가가 팔리지 않으면 걱정하는 것을 본 적이 없군요. 작은 가게에서 제 옷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늘 옷을 사는 대중에게 저만의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어요. 많이 팔진 못하더라도 항상 몇 벌은 팔 수 있었고, 우연히도 사람들이 좋아해줬기에 어떻게든 제 사업이 성장한 겁니다.” (VK)

    81세의 이 특별한 디자이너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나오미 캠벨(이 디자이너의 1993년 가을 패션쇼에서 플랫폼 하이힐을 신고 워킹하다 넘어진 일화로 유명하다), 벨라 하디드, 도나텔라 베르사체, 마크 제이콥스, 스텔라 맥카트니에 이르기까지 웨스트우드 여사의 패션계 지인과 협업자 외에 팬들까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패션계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에게 쏟아진 감동적인 조사(弔詞)를 <보그>가 기록했다.
    Anna Wintour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는 정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인 동시에 열정적으로 모든 신념과 열의를 추구한 보기 드문 인습 타파주의자였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튬 인스티튜트 전시 중 하나인 <Anglomania>는 영국 패션을 찬양하는 것이었지만, 비비안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했어요. 전시 중심에 웨스트우드 여사가 있었고 모든 디자이너가 그 갈라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죠. 게다가 선동가였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게 뭔지 심오하게 이해했어요. 역사, 계층, 성, 낭만주의, 전통을 영국 스타일로 믹스해 가장 멋지고 창의적인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Jun Takahashi

    “내가 스무 살 때였죠. 웨스트우드는 초기 매장 ‘Sex’ ‘Seditionaries’ ‘Worlds End’의 작품으로 패션쇼를 열었습니다. 당시 문화복장학원에 재학 중이던 나는 히로시 후지와라를 통해 그 패션쇼에 모델로 합류하게 됐죠. 비비안이 패션쇼 피날레에 인사하러 나가면서 제 손을 잡더니 런웨이 끝까지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펑크의 대모가 손을 잡아주니 정말 황홀했죠. 그녀는 반항적인 음악과 패션을 말콤 맥라렌과 연결해 ‘펑크’라는 무브먼트를 창시했고,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나는 비비안의 펑크 정신이 다음 세대로 조금이라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편히 잠드시길 기도합니다.”

    Manolo Blahnik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는 목적을 가진 급진적 이상가였으며, 평생 누구보다 영국 패션 산업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인습에 도전하며 가장 상징적인 20세기 디자인을 탄생시켰죠. 안드레아스를 비롯한 유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Naomi Campbell

    “패션계를 이끌던 원조 여왕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는 아내이자 엄마였고 할머니이자 친구였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 하교 후 버스로 귀가하면서 킹스 로드에서 과감한 옷과 헤어스타일의 펑크족을 본 기억이 납니다. 가히 혁명적이었죠. 그 펑크의 원조인 당신을 1986년 처음 만나 함께 일하며 친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당신의 힘은 남자들이 장악하던 패션계에서 놀라웠습니다. 타고난 힘이 있었기에 계속 전진하도록, 모델 분야 외에 열정을 가진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나에게 늘 용기를 줬습니다. 당신의 정직한 성품은 더없이 소중했어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실감 나고 진정성 있게 사실을 전했죠. 당신이 창조한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모두가 모방하는 장엄하고 획기적인 스타일로 가득해요. 또한 안드레아스와 동화처럼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탄생시키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사랑 이야기를 수십 년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어요. 당신의 유산은 이제 시작 단계이며 영원히 남을 겁니다. 패션계에 대한 헌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까요. 어떤 상으로도 당신의 공로는 제대로 치하할 수 없을 겁니다. 얼마 전 당신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고, 그 추억은 마음에 늘 자리할 거예요. 안드레아스와 조(Joe)를 비롯한 유가족과 친지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합니다. 여왕님,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왕좌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Donatella Versace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너무 슬펐습니다. 비비안은 패션계의 상징적인 선구자이자 패션계의 가장 위대한 펑크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독립, 반란, 권력에 대해 말하는 옷을 만들기 위해 모든 기성 규칙을 깼습니다. 그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부여했죠. 비비안은 우리 업계에서 몇 안 되는 선도적 여성으로서 저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줬습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싫다’고 답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비전은 순수하며 전혀 여과되지 않았습니다. 비비안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권세 속에 잠드시길.”

    Marc Jacobs

    “정말 가슴 아픕니다. 당신은 뛰어나고 의미심장한 본질을 지닌 놀라운 스타일을 늘 먼저 세상에 선보였죠. 저는 당신이 했던 말과 당신의 놀라운 창작품을 통해 계속 배워갑니다. 우리가 이브 생 로랑을 향한 사랑으로 결속했던 그 밤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당신은 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충격적일 만큼 대단한 것을 보여줬죠. 당신뿐 아니라 안드레아스와 공유했던 순간이 새삼 감사히 느껴집니다. ‘평안’이라는 말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사랑하는 비비안, 부디 편히 잠드세요. 안드레아스와 남은 가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Stephen Jones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가 없었다면, 레이 가와쿠보, 존 갈리아노 같은 수백 명의 디자이너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1976년 처음 만난 그녀는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영원히. 비비안,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여왕입니다. 우리에게 주고 간 모든 것, 정말 고맙습니다.”

    Bella Hadid

    “사랑하는 비비안, 펑크의 여왕이여! 여사님은 첫 만남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 전날보다 더 웃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배우고, 더 사랑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당신의 삶에 작으나마 함께한 것은 영원히 감사할 일입니다. 나에게는 물론이고 패션계와 인류에게 비비안, 당신은 태양이었습니다. 이 지구에 살았던 가장 멋지고, 가장 재미있고, 가장 놀랍고, 가장 겸손하고, 가장 창의적이며, 가장 거칠고, 가장 지적이고, 가장 지독한 사람이여! 사랑과 평강 안에서 편히 잠드소서. 많이 그리울 거예요. 안드레아스를 비롯한 유가족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녀는 참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군요.”

    Stella McCartney

    “제가 이런 조문을 쓰고 있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영국 패션계 역사상 최고의 아이콘을 떠나보냈습니다. 제가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내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용감하고 대담한 디자이너로서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펑크를 처음 만들어낸 주인공이잖아요. 사진가 유르겐 텔러의 생일 만찬에서 종이접기 하듯 정밀하게 식탁보를 접어가며 그 모서리를 몇 시간 동안 조곤조곤 분석한 일이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 저는 그녀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아주 작은 패턴을 만들고 버릴 것 없는 물건을 디자인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녀는 천재였습니다. 비비안은 우리 모두를 일깨우고 패션계를 뒤흔들던 역사적인 패션 디자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녀는 패션계가 발전하도록 이끌었으며, 불공평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세상에 고하고, 불편한 질문을 제기했죠. 비비안은 패션계의 발전을 직접 본 것처럼 말했습니다. 패션계를 더 낫게 만들고 싶어 했죠. 넘치는 자신감으로 모든 경계를 하나하나 허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건방지고 격의 없으며 내가 아는 누구보다 가장 ‘지독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죠. 그래서 더 그녀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녀처럼 더 투쟁하고, 창조하고, 뭔가를 기념하고 싶어요. 비비안 여사님,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신의 가호가 웨스트우드 여사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펑크 록이여, 영원하길!”

    Christy Turlington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 인습을 타파하는 사람, 환경 보호주의자였습니다. 무엇보다 한발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아티스트, 펑크족, 워킹 맘이면서, 지금도 여전히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였습니다. 나는 패션계에서 중요한 경력을 쌓아가던 시기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개빈 본드(Gavin Bond)의 저서 <Being There>를 통해 아름답게 기록한 그 시기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한번은 비비안이 1990년대 초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패션쇼 초대장을 손 글씨로 써서 팩스로 보냈습니다. 최근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Lady with an Ermine’을 보며 제가 떠올랐다고 말해줬죠. 분명 담비가 아니라 그 여인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비비안, 본인의 원칙과 가치관에 충실하고, 활기차고 재미있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Helena Christensen

    “어쩐지 비비안을 몸이 수백 개쯤 되는 것처럼 상상했죠. 밝혀야 할 긴급 사안, 지지해야 할 대의, 거침없이 밝혀야 할 부당한 것, 창조해야 할 신비로운 옷까지 그녀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죠. 재능 넘치고 훌륭한 이 여사님은 모든 면에서 펑크족답게 대단히 독특하고 과격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늘 그렇게 해왔죠. 저는 그녀가 영감을 주며 함께해준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아갈 겁니다. 영광스러운 권세 안에 잠드시길 기원합니다.”

    Karen Elson

    “정말 슬픈 소식입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영국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줄곧 두려움을 모르는 독보적인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여성성과 성에 대한 의식을 이끌어내고, 기후 문제에 더 힘쓸 것을 패션계에 처음 요구한 사람이기도 했죠.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독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옷 입는 방식과 우리가 입었던 옷을 만들어낸 위대한 여성과 작별하며, 패션계와 문화 예술계는 깊은 슬픔에 잠길 겁니다.”

    Erdem Moralıoğlu

    “패션계의 전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가 별세했다니 참 슬프군요. 20년 전 그녀의 작업실은 제가 유일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렇게 함께한 시간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항상 기억 속에 여사를 담아둘 겁니다.”

    Sarah Mower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의 유산은 끝없이 복제되는 ‘펑크’를 세상에 안겨줬다는 사실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녀가 그 업적을 남긴 시초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환경 파괴의 시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패션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문화적이고 비판적이며 급진적인 사고를 옹호하는 데 투지를 갖고 봉사했습니다. 또한 내가 패션계에서 만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최고의 미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팀 워커가 촬영한 포트레이트가 그런 면을 잘 담아내고 있죠.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변함없이 시대를 앞서가는 가장 위대한 영국 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친절하고, 평범하고, 메시아적이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과찬에도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았고, 예지력 있는 힘으로 조화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1990년대 어느 날 나는 그녀를 인터뷰하고 싶었습니다.하지만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외출이 어려웠습니다.그랬더니 그녀가 저를 찾아오겠다고 말하더군요. 별일 아니라는 듯 자기 집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죠. 그 후로 그녀가 교육자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젊은이들과 소통해온 것이 늘 뇌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녀가 영국 북부 틴트위슬 출신의 교사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그녀로부터 계속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입니다!”

    에디터
    신은지
    Ellen Burney, Liam Hess, Alex Kess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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