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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무거움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3.03.17

by 이소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그 옷과 헤어질 결심

    내가 옷이 많은 이유는 옷을 버리지 못해서이지 옷 자체를 미친 듯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때그때 입는 옷만 입는다. 나머지 옷은 그냥 일기장이나 전리품 정도에 불과하다. 무슨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단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점이 아주 피곤하고 즐거웠다. 쇼핑을 같이 할 때면 피곤했고, 모두 훌륭한 쇼핑 메이트였기에 즐거웠다.

    지금 애인은 한술 더 떠 내게 옷 선물을 미친 듯이 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간 그가 선물한 옷으로 집을 도배할 수 있을 정도다. 한 벌씩 주는 것도 아니고 늘 묵직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한번은 영화 <미드소마>에 나온 의상이 예쁘다고 무심코 말했다가 자수의 문양도, 색깔도 모두 다른 스웨덴 전통 원피스 여덟 벌을 받았다. 밀리터리 야상을 살까 고민 중이라 했을 땐 정확히 한 달 뒤 그는 누비가 있는 야상, 환절기에 입을 수 있는 야상, 포켓이 여러 개 달린 야상, 뒷면에 패턴 자수가 들어간 야상, 야상 코트, 카키색보다 조금 더 연한 야상을 들고 나타났다.

    앞서 말했듯 난 입는 옷만 입는다. 그가 선물한 수백 벌 중 정말 마음에 드는 옷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옷은 회사 갈 때 입으면 딱일 것 같아서”, “저 옷은 너 자주 입는 그 청바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이건 외출할 때 입기 좋을 것 같아서”라며 세심하기 그지없는 그의 구매 동기를 듣고 있을 때면 도저히 입 밖으로 이 괴랄한 선물 이벤트 좀 제발 멈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을 하며 한 벌 한 벌 골랐을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애써 싫은 소리를 할 정도의 큰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점점 미어터지는 드레스 룸과 쿠팡에서 주기적으로 옷걸이를 주문하는 것과 행어에 기약 없이 걸려 있는 옷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미약한 죄책감 빼고는…

    딱 한 번, 한 벌의 옷만 선물한 적이 있다. 그도 이례적이었는지 상자를 건네며 “이번엔 한 벌이야”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애인은 늘 그랬듯 포장을 뜯는 내내 해외 직구로 어렵게 구한 옷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 옷을 사주고 싶었던 이유와 무용담에 가까운 치열하던 구매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비싸고 귀한 옷이라는 거였다.

    그 옷은 레더 재킷(의 탈을 쓴 갑옷)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작 과정이든, 세탁 과정이든, 뭐든 어딘가 문제가 분명히 있는 옷이었다. 심히 무거웠고, 대단히 딱딱했다. 이 옷에 비하면 보통의 레더 재킷이 지닌 묵직함은 내 다리털 한 올 무게도 안 된다. 입는 순간 어깨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좋은 옷은 무릇 가볍고 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삶의 무게를… 표현한 걸까?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더 건강한 연애 아닐까? 고민했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집어치웠다. 건강하려고 연애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은 내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예쁘다고 했다. “좀 딱딱하긴 하네. 가죽이라 길들이면 금방 괜찮아져.”

    하지만 짧고 굵은 피팅식 이후로는 한 번도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으로 받은 ‘단독’ 옷 선물이었기에 문 바로 뒤에 걸린 ‘단독’ 옷걸이에 보기 좋게 걸어주었다. 옷걸이 역시 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드레스 룸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최대한의 악력을 동원해 늘어진 옷걸이를 원상태로 휜 뒤 다시 그 재킷을 걸어둘 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가 대체 그 옷은 왜 안 입냐는 전에 없던 채근을 하지 않았다면, 잔소리에 못 이긴 내가 그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탈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팔을 굽히기도 힘든 그 옷 때문에 기어이 짜증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브레이크와 액셀 정도는 구분할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그래서 외제 차를 들이받지 않았다면, 눈물의 배상을 하고 난 뒤 이 모든 원인을 그에게 돌리지만 않았다면, 받은 옷만큼 쌓인 내 죄책감과 분노를 그에게 필터 없이 쏟아내지만 않았다면, 아니 그 전에 너의 그 사랑 가득한 옷 선물이 내겐 부담이라고 털어놓았다면, 괜찮았을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지. 괜찮은 건 피투성이가 된 다리와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던 내 상체뿐이었다. 그 옷은 정말 갑옷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랜 대화 끝에 찝찝함 없이 화해할 수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순 없다.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만큼 속마음을 꺼내기 힘든 것도 여전했고,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상대가 알아주지 못하는 게 야속한 것도 여전했다. 여전히 기상천외한 문제로 꾸준히 싸운다. 서로에 대해 이토록 무지하다는 것에 매번 놀라면서. 눈에 띄는 변화라면 옷 선물 대신 함께 쇼핑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 옷을 버리기로 결심한 날, 나는 그에게 기념으로 레더 재킷을 한 벌 사주겠다고 했다. 평소 그가 가고 싶어 하던 옷 가게를 도장 깨기 하듯 돌았다. 쇼핑 내내 그는 신나 보였다. 마지막에 들를 가게를 향해 걷는 중이었다. 피곤해? 애인이 물었다. 아니, 즐거워. 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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