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시작은 사랑, 끝은 봄

2023.03.18

by 정지혜

    시작은 사랑, 끝은 봄

    회화나무 ‘괴(槐)’, 뫼 ‘산(山)’, 한자에 담긴 뜻 그대로 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의 숲속 작은 책방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 <에어리얼(복원본)>(엘리, 2022)과 만났다. 자그마하고 단정한 책방에서 데려온 책은 대형 서점에서 구입한 책과는 다르게 책과 만난 그날의 분위기, 그때의 계절, 함께한 사람들까지를 모두 포함해 기억나게 한다. 이제 막 봄의 얕은 기운이 밀려오던 볕 좋은 2월이었다. 책방에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세 여자는 넉넉히 떨어져 앉아 한참 동안 말없이 각자의 책을 보다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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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어리얼(복원본)>에는 세 여성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듯하다. 그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작가 실비아 플라스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있다. 서문을 쓴 작가의 딸 프리다 휴스의 강렬한 목소리도 들려온다. 번역을 맡은 진은영 시인의 사려 깊은 목소리도 흐른다. 서문을 시작으로 실비아의 시들을 거쳐 부록과 주, 옮긴 이의 말까지. 그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고 읽다 보면 시집 전체가 실비아 플라스의 <에어리얼>을 오독하지 않고 더 정확히, 더욱 가까이 읽기 위해 전심을 다해 소리 내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3년 2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검은색 스프링 바인더 공책에 지금의 이 시들을 남겼다. 그녀가 쓰고 배열한 시 그대로 옮긴 게 이번 복원본이다. 1965년 <에어리얼>이 처음 출간됐을 땐 그녀의 남편이자 시인 테드 휴스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시가 배치됐다. 끝장난 부부 생활과 실비아의 죽음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테드의 이런 편집 개입을 둘러싸고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런 만큼 실비아 플라스의 목소리가 독자와 온전히 만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비범한 시인이자 한 명의 인간이기도 한 어머니를 기억하며, 그녀의 죽음만 운운하며 그녀 삶을 허구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며, 그녀 삶이 축하받길 바라던 프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에어리얼>의 원고를 ‘사랑(Love)’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봄(Spring)’이라는 단어로 끝나게 만들었다. 이는 분명 결혼 생활이 파탄 나기 직전부터 새로운 삶의 결단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하고, 아울러 그 사이에 겪은 극심한 고통과 분노를 담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 원고는 나아가기 위해서 떨쳐내야 할 것들을 낱낱이 찾아내고 있었다.”(p. 13~14) 시집의 첫 번째 시 ‘아침 노래’는 “사랑이 너를 통통한 금시계처럼 가도록 맞춰놓았지”로 시작하고, 마지막 시 ‘겨울나기’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벌통은 살아남으려나, 글라디올러스 꽃들은
    또 다른 해를 시작하기 위해
    자기의 불을 묻어두는 데 성공하려나?
    그들은 무엇을 맛볼까, 크리스마스 로즈?
    벌들이 날고 있다. 그들은 봄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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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실비아는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지 못했으나, 실비아는 시를 통해, 실비아의 시는 봄을 맛본다. 역자이자 시를 쓰는 진은영은 말한다. “절정에서 절망으로, 다시 절망에서 절정으로. 삶은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도 그랬다. 마지막 순간의 자살 사고가 시인의 삶을 자꾸 비극적인 이야기로만 읽히도록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지만, 시들은 시인이 살았던 순간들, 절정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그가 느낀 모든 떨림을 보여준다.”(p. 275)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실비아는 무엇보다 이 시집이 음악적이길 바랐다. 역자 역시 그 의도를 살려 번역에 신경을 썼고, 독자에게 마침표의 위치까지도 주의를 기울여 꼭 소리 내 읽길 권한다. 실비아가 직접 낭독한 표제시 ‘에어리얼’을 들으며 그녀가 바란 시의 음을 느껴보길.

    포토
    교보문고, 엘리 출판사 인스타그램,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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