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멜로 ‘우리영화’
<우리영화>(SBS 금·토)는 여백이 많은 드라마다. 예컨대 남자 주인공 이제하(남궁민)가 여자 주인공 이다음(전여빈)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장면. 한밤중 편의점 앞에서 혼자 포도 주스 세 병을 늘어놓고 앉아 있던 다음은 우연히 마주친 제하에게 불쑥 한 병을 내민다. 제하가 거절해도 막무가내고, 왜냐 물어도 히죽대기만 한다. 현실이라면 미친 여자가 아무나 죽이려고 주스에 독을 타고 기다렸나 싶어 도망가겠지만 제하는 다음을 한참 쳐다보고 섰다. 이다음이 이제하의 팬이었고, 포도 주스가 세 병인 이유는 2+1 행사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진다.

남자 주인공 제하는 거장 소리를 듣던 영화감독의 아들이자, 그 자신이 데뷔작 이후 몇 년째 차기작을 못 찍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그러던 차에 친한 제작자가 아버지의 유작을 리메이크하자는 제안을 한다. 시한부 환자의 사랑 얘기인 아버지의 유작은 세간의 추앙과 달리 제하에게는 상처다.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하고 얼마 안 가 아버지가 내연 관계의 여배우와 함께 찍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유작을 찍은 배우가 제하를 찾아와 다른 사정이 있다고 암시하지만 제하는 들으려 하지 않고,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
어찌저찌해서 리메이크를 결심한 제하는 시한부 환자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 의사를 만난다. 자문 의사는 줄곧 반말로 무례한 언사를 늘어놓더니 제하를 장례식장으로 보낸다. 거기 만날 사람이 있다는 말뿐, 그게 누군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왜 만나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인공들은 용케 만나서 통성명을 한다. 의사가 제하에게 자문 역으로 추천한 게 시한부 환자 다음이었다.

상술한 장면들에서 <우리영화>의 인물들은 대화를 빙자한 독백을 한다. 자못 의미심장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부조리한 동문서답이 작품 곳곳에서 돌출된다. 그 때문에 자주, 드라마가 연극처럼 보인다. 대사의 여백은 긴 클로즈업으로 채워지곤 한다. 멜로에서 드문 작법은 아니나 아직 인물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 도입부에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장면들이다.
이 드라마의 목표는 뚜렷하다. 감정과 감성의 향연이다.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멜로 예찬이 대사로 직설되기도 한다. 영화인 집안의 아들이자 데뷔작으로 유명해진 영화감독, 아버지가 의사라서 생활비 걱정은 없는 배우 지망생 출신 시한부 환자, 두 주인공의 조건은 그들이 오롯이 자기 감성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세팅되었다. 피상적으로 보일 만큼 현실감이 탈색된 세계지만 절절한 연애 감정으로 승부하겠다는 선전포고로는 충분하다. 드라마는 심지어 여주인공의 병명이 뭔지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도입부만 봐서는 이 드라마가 자기 세계에 빠진 낭만주의자의 혼잣말로 남을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는 멜로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직은 작품의 감정선이 시청자를 앞지른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강하게 호기심을 끄는 요소가 있다.
제하가 리메이크하려는 아버지의 유작은 제목부터 고풍스럽고 센티멘털한 <하얀 사랑>이다. 병 때문에 배우의 꿈을 접은 대신 캠코더 앞에서 일인극을 펼치곤 했던 이다음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하얀 사랑> 오디션을 본다. 다음이 없는 캐릭터 이다음은 시한부 주인공 역할에 진짜 시한부 환자인 자기만큼 적합한 배우는 없다고 주장한다. 제하는 다음이 촬영 도중 죽을까 봐 걱정되어 묻는다. “언제까지 살 수 있는데요?” 다음은 답한다.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건데요?” 그렇게 그들의 ‘우리영화’가 시작된다. 다음이 언제까지 살지, 영화는 마무리될 수 있을지, 그들이 만드는 영화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우리영화>에는 병과 죽음이 자주 언급된다. 다음은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다. 그 때문에 죽음에 대해 오래 사색했다. 제하도 어머니의 투병을 오래 지켜보았다. 다음과의 인터뷰는 제하에게 영화를 위한 취재일 뿐 아니라 어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메인 테마인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제하는 <하얀 사랑> 초고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발견한 후 늘 아픈 모습으로만 기억해온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다. 그에게 이 영화 작업은 어머니의 죽음이 아닌 삶을, 그리고 부모의 애정 관계를 다시 해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 드라마의 각본은 일상어로는 어색한 면이 많지만 사색을 구술할 때는 여운이 있다. 회차가 거듭되면서 감정이 쌓이고 멜로가 궤도에 오르면 파급력이 있을 것이다. 사랑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기대된다.
남궁민과 전여빈의 어울림은 좋아 보인다. 대사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배우들의 몫이 크다는 의미다. 남궁민의 절제된 연기 덕에 낭만적 클리셰인 예술가 캐릭터 제하가 덜 진부해 보인다. 이다음은 극한의 명암을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다. 낮고 느린 초반 호흡에서 다음의 과장된 밝음과 수선스러움이 유난히 튀기도 한다. 시청자가 다음의 어둠을 받아들이면 그 밝음도 여운이 될 터다. 연기 스펙트럼 넓은 전여빈이 이 캐릭터를 어떻게 풀어갈지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멜로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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