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를 캐릭터가 없다 ‘파인: 촌뜨기들’
디즈니+ <파인: 촌뜨기들>은 <도둑들>을 연상시키는 활기찬 케이퍼 범죄물이다. 강렬한 캐릭터, 컬러풀한 1970년대 미술, 사투리의 진한 말맛으로 쉴 새 없이 이목을 자극하며 꽉 찬 느낌을 주는 드라마다. 웹툰 원작자인 윤태호는 <내부자들>, <이끼>, <미생> 등을 통해 다양한 계층, 형태의 한국 마초이즘을 탐구해왔다. <파인: 촌뜨기들>은 제목이 암시하듯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직관적인 마초들의 향연이다. 영화 <범죄도시> 1편, 디즈니+ 시리즈 <카지노>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이 여기에 뜨거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파인: 촌뜨기들>은 익히 알려진 신안 보물선 사건을 소재로 사기꾼, 물주, 건달, 뱃사람들, 경찰, 그리고 사모님이 얽히고설킨 얘기다. 배경은 1977년. 주요 인물은 좀도둑질과 사기로 생계를 이어온 오관석(류승룡)과 그의 조카 오희동(양세종)이다. 그들은 감옥에서 만난 골동품상 송사장(김종수)의 제안으로 700년 전 침몰한 중국 보물선을 도굴하기로 한다. 그런데 사기꾼들이 서로를 신뢰할 리 없다. ‘쩐주’ 천회장(장광)과 송사장이 각자의 심복을 원정대에 딸려 보내면서 젊은 멤버들의 기싸움이 시작된다. 현지에서 만난 보물 감정사, 선장, 잠수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들이다. 바다 사정까지 열악해서 진행비는 천정부지로 솟는다. 보물선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은 감옥에 갇힌 상태고 전혀 입을 열 생각이 없다. 유명한 골동품 사기꾼 ‘김교수(김의성)’가 부산에서 원정을 와서 동네 건달 ‘벌구(정윤호)’와 팀을 꾸리면서 셈법은 더 복잡해진다. 김교수를 잡으러 온 무시무시한 싸움꾼 덕산(권동호), 벌구와 앙숙 관계인 순경 홍기(이동휘) 등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등장인물이 많으니 이야기가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파인: 촌뜨기들>은 열전식 구성으로 각 캐릭터의 서사나 특징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몰입도를 높여간다. 이만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절정이다 싶은 순간마다 새로운 ‘센캐’가 등장해서 판을 흔들어놓는다. 배우들은 모두 강박(스트롱 비트)을 연주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들의 관계성에 따라 섬세하게 액션과 리액션을 오가며 앙상블을 펼친다. 그리하여 모두의 개성이 뚜렷이 구분되고 극에도 리듬감이 생겼다. 신인급 배우들은 물론이고 동네에서 딱지 치는 꼬마 단역까지 능란해 보이는 건 연기 연출의 수준이 높다는 방증일 테다.


저 많은 남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때로 살벌하게, 때로 유치하게 기싸움을 벌이는 동안 정작 도굴 프로젝트를 휘두르는 인물은 여주인공 양정숙(임수정)이다. 그는 천회장의 회사 경리였다가 탁월한 금전 감각을 인정받아 안주인 자리를 꿰찼다. 그러고는 전남편 전출(김성오)을 비서로 들여 내연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런데 오관석이 진행비를 따내기 위해 ‘선물’로 보낸 희동의 접대를 받고 정숙의 마음이 흔들린다. 선물 에피소드는 관석과 정숙의 수완, 돈밖에 모르는 ‘사모님’의 가면 뒤에 감춰진 정숙의 욕망을 재치 있게 드러낸다. 짧은 시퀀스 안에서 진지하지만 허를 찌르는 대사와 소소한 반전이 이어지고, 성적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이후 정숙은 골동 프로젝트의 전면에 나서고, 선명한 스토리라인을 선호하는 관객들은 정숙의 남자 관계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홀로 넘쳐나는 남성성을 압도하고 작품에 성적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정숙은 <타짜>의 정마담(김혜수)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육감적인 섹스 심벌과는 거리가 먼 임수정이 이 역을 맡은 게 의외인데, 특유의 이미지가 주는 이점이 있다. 팬들에게는 아직 그의 중년 연기와 메이크업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게 사모님과 여자 양정숙의 괴리를 실감나게 만든다. 정숙 자체가 욕망을 위해 제 나이와 취향에 맞지 않는 정체성을 연기하는 인물이고, 임수정이 그의 연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 배우가 한가득인 작품에서 성을 이용해 부와 권력을 차지한 여성 캐릭터를 암술처럼 배치하는 게 요즘 트렌드는 아니다. 다른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도 위험한 구석이 있다. 다방 레지 선자(김민)가 희동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말하고, 화가 난 관석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는 대목은 2025년 기준으로는 너무 야만적이다. 심각한 인권 침해가 해프닝처럼 묘사되는 게 당황스럽다. 여성 시청자 입장에서는 오관석이 제아무리 정감 가는 캐릭터라도 결국 범죄자고 나쁜 놈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캐릭터와 거리를 두게 된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참작할 사정이 있다. 이 작품은 배경이 1970년대고, 남녀 공히 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추잡한 군상을 전시한다. 정숙과 선자가 작중 인물들에게는 성적 대상이지만 시청자에게 직접 섹스 어필하는 캐릭터는 아니고, 오히려 각자 카리스마와 비주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도 긍정할 만하다. <파인: 촌뜨기들>은 마초의 향연이라고는 하나 여배우를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작품은 아니다.
신안의 해양 환경과 빈티지 다이빙 장비, 위조, 바이어 물색 등 골동품 인양과 유통에 대한 풍성한 디테일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자꾸 공부를 시킨다는 등장인물들의 불평과 달리 시청자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다. 미덕이 많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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