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머티리얼리스트’, 저열한 욕망까지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사람들

2025.08.06

‘머티리얼리스트’, 저열한 욕망까지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사람들

뉴욕 한복판에 160억원대의 아파트를 가진 사모펀드 매니저. 뉴욕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과 함께 사는 연극배우인 전 남자 친구.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어느 날 이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커플 매칭 매니저 여성의 이야기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포스터와 예고편, 간단히 정리된 줄거리만 보면 고색창연한 느낌이다. 꿈으로 가득하지만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연인,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호감을 보이는 재벌 2세 실장님의 구도이니 말이다. 커플 매칭 매니저란 직업에서도 단번에 ‘로맨틱 코미디’의 여러 공식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진부한 설정의 영화에 ‘물질주의자(Materialists)’라는 제목이라니. ‘속물’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더더욱 로맨틱하지 않은 제목이다. <머티리얼리스트>는 그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것들이 엮인 이야기다. 각자의 조건에 맞는 결혼 상대를 찾던 사람들은 마침내 조건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사랑보다 조건을 우선시하는 게 옳은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저열한 욕망을 품고 있지만, 정작 그 욕망에 충실하지도 못한 이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나아간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주인공 루시(다코타 존슨)는 자신을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칭하는 커플 매칭 매니저다. 40대 후반의 남성 고객이 “이제는 말이 통하는 성숙한 여성을 만나고 싶다”며 ‘20대 후반’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해도, “앞서 만난 네 명의 여성이 가진 장점을 다 가진 사람을 찾아달라”고 해도, “BMI 지수 20 이하인 여성”을 고집하는 고객 앞에서도 루시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루시의 현실은 곧 이 영화가 품은 냉소적인 유머다. 하지만 <머티리얼리스트>가 매칭 매니저란 직업을 유머의 소재로만 쓰는 건 아니다. 그녀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람들이 가진 속물적인 욕망을 낭만적인 감정으로 치환하는 데에 있다. 결혼을 주저하던 고객은 루시에게 지금 자신이 느끼는 자괴감의 정체를 고백한다. “그 남자는 언니의 질투심을 유발해요. 언니 남편보다 좋은 직장에 좋은 외모를 갖고 있거든요.” 고객은 결혼을 결심했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이유’를 이야기한 것인데, 루시는 그마저도 포장한다. “결국 가치의 문제네요. 그 남자가 당신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있는 거예요.” 가장 속물적인 욕망이 담긴 말을 품위 있고 낭만적인 언어로 바꾸는 것. <머티리얼리스트>가 보여주는 현대 물질주의자들의 풍경이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이 결혼식에서 루시는 두 명의 남자를 만난다. 한 명은 신랑의 형제이자 사모펀드 매니저인 해리(페드로 파스칼)이다. 다른 한 명은 케이터링 업체 직원으로서 결혼식 파티장에서 서빙을 하고 있던 전 남자 친구 존(크리스 에반스)이다. 이후 루시가 두 남자와 대화하며 느끼는 감정 또한 냉소와 낭만을 오간다. 결혼하고 싶은 남성의 조건을 묻는 해리의 질문에 루시는 “절대 포기 못하는 조건은 부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있으면 좋은 조건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사무치게 부자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잠시 후 존의 차를 타고 가던 그녀는 그와 헤어졌던 그날을 떠올린다. 두 사람의 기념일을 뉴욕의 근사한 식당에서 맞이하려던 계획은 가는 곳마다 주차비가 비싸다고 투덜대는 존의 신경질 때문에 무너진다. 결국 루시는 낭만을 포기한다. “네가 가난하다고 널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지금은 그래. 그런 내가 너무 싫어.” 속물이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속물처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찾아오는 자기혐오다. 하지만 이 영화의 냉소가 여기서 머무는 건 아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루시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더 잔인한 사건이 이어진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머티리얼리스트>는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랐던 셀린 송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실제 뉴욕에서 생계를 위해 매칭 매니저로 일했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구상했다. 당시 셀린 송 감독이 발견한 건, 사람들이 매칭 매니저에게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게 욕망을 털어놓는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매칭 매니저에게는 매우 솔직한데, 심리 상담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상담사와 나누는 대화는 영혼에 관한 것이고 심리적 위기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매칭 매니저를 상대할 때 사람들은 ‘아, 연애를 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이런 스펙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과거의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당사자들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솔직한 말이 <머티리얼리스트>에 가득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루시가 만나는 고객은 양립할 수 없는 조건뿐 아니라 인종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까지 털어놓는다. 루시는 해리에게 직접 연봉을 물어보며, 그가 레스토랑의 계산서를 “한 번의 망설임 없이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집는 걸 보고 좋아졌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꺼낸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가장 로맨틱해야 하는 순간에도 ‘계산’, ‘투자’, ‘가치’ 등의 단어가 난무한다. “난 당신의 무형자산을 보고 만나려는 거예요. 이건 좋은 투자예요. 당신의 가치는 앞으로 더 날카로워질 테니까.” 이런 말이 로맨틱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이다. 진실한 감정보다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는 만족감이 더 큰 낭만이라고 할까? 그렇듯 <머티리얼리스트>는 모두가 꿈꾸는 욕망이면서 겉으로는 손가락질하는 욕망에 관해 탐구하는 영화다. 겉보기와 달리 냉소적이고 잔인하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