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랑, 기적을 믿고 싶게 만드는 드라마 ‘첫, 사랑을 위하여’
<첫, 사랑을 위하여>(tvN)는 제목만 들으면 순박한 이성애 드라마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리는 사랑의 형태와 범주는 여러 가지다. 그 통찰로 삶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든다. 유머, 슬픔, 감동, 때로 통쾌함으로 마음을 씻어주는 드라마다. <갯마을 차차차>(2021), <일타 스캔들>(2023), <엄마친구아들>(2024) 등 연속으로 히트작을 낸 유제원 감독이 연출에 참여했다. <첫, 사랑을 위하여>도 초반 시청률은 3%대로 저조하지만 만듦새가 좋아서 앞으로가 기대된다. 성우진 작가는 이번이 메인 크레디트에 오른 첫 장편 드라마다.

주인공 이지안(염정아)은 건설사 현장 소장으로 일하는 싱글맘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한국대 의대에 다니는 딸 이효리(최윤지)다. 먹고사느라 회식에 끌려가서 윗사람 비위라도 맞추는 날에는 보란 듯 효리를 불러다가 나한테 이런 딸이 있다고 자랑을 하고, 효리에게 빨리 의사가 되어서 자기를 봉양하라고 응석도 부린다. 그때마다 효리는 툴툴거린다.
효리는 미혼모의 딸이라고 수군대는 것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일생 무리를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독하다고 욕을 먹었고, 교수들에게는 의사감이 아니라고 구박을 받았다. 그러니 엄마의 기대가 편치 않다. 청천벽력 같은 뇌종양 판정을 받은 효리는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는 혼자 학교를 자퇴하고 연고 없는 시골로 떠나버린다.
지안과 효리가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은 명장면의 연속이다. 딸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안은 혼자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친구 선영(김선영)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뜸 짜증을 퍼붓는다. 지안이 전후좌우 없이 “왜 열무김치를 줬다 안 줬다 사람 약을 올려!”라고 쏘아붙이자 자다 깬 선영은 얼떨떨하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챈 선영은 그 새벽 지체 없이 지안에게 달려간다. 그제야 둘은 부둥켜 안고 운다. 염정아와 김선영은 각각 심리적 회피와 공백 상태에서 출발해 현실 자각, 폭발로 이어지는 감정선을 정교한 호흡으로 연기해낸다. 처음 전화를 받을 때 선영의 반응은 약간 코믹하기까지 한데, 그것이 이 시퀀스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기는커녕 리얼리티를 더해준다. 이들의 노련한 연기가 드라마의 주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지안과 효리의 관계에서, 작가는 뛰어난 관찰력을 발휘한다. ‘최애’ 자식 앞에서 엄마가 보이는 일방적 흥분과 소소한 제스처, 그걸 귀찮아하다가 끝내 쏘아붙이고 후회하는 딸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렸다. 아직 탯줄로 연결된 것 같은 모습이지만 이들은 사실 혈연이 아니다. 지안은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그 후 가까운 친구마저 죽자 친구의 딸인 효리를 거뒀다. “내가 엄마가 왜 싫은지 알아?”라는 효리의 대사로 시작해 지안이 상실의 두려움을 고백하고 두 사람이 화해하는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그들의 특수한 관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보편적 모녀 관계의 애증을 절절하게 담아낸 대목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족애는 자주 인간애로 대체되거나 보완된다. 지안에게는 혈연 대신 연민으로 맺어진 자매 같은 친구들이 있다. 효리의 생모가 그랬고, 이제 선영이 그렇다. 선영은 효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연한 듯 치료비를 공동 부담하기로 한다. 지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독종인 척하지만 마음이 약해서 돈을 빌려주고 못 받는 일이 잦다. 효리는 그런 지안을 타박하지만 채무자의 형편이 곤궁한 걸 보고는 저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집 아이들을 돌봐준다. 지안은 효리의 치료비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채무자의 상환을 연기해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딸은 나보고 호구라던데, 나는 로맨티스트야. 나는 기적을 믿거든요. 기적이 뭐 별건가. 우리같이 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호구 소리 들을지언정 잠시라도 서로 살게 해주는 거, 그게 기적이지 뭐.” 폐쇄적인 가족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에 기반해서,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도 환영받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질병이 소재라니 물기 가득하고 청승 맞은 이야기일 것 같지만 이 드라마는 의외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특히 청해마을 주민인 미미할매(강애심), 고이장(정영주), 고이장의 남편(박수영)이 곳곳에 등장해서 추임새를 넣는데, 그게 아주 맛깔나다. 효리가 폭언하는 교수를 들이받는 장면이나, 지안이 건설사를 나오면서 “실업 급여는 내 권리야. 네 자선이 아니고!”라 외치는 장면처럼 신랄하고 통쾌한 순간도 있다.
지안과 효리가 청해마을에 정착하면서 <첫, 사랑을 위하여>는 힐링 로맨스물에 가까워진다. 지안은 건축사가 된 첫사랑 오빠 류정석(박해준)을 마주치고, 채무자에게서 돈 대신 받은 폐가를 함께 고치기로 한다. 효리는 마을 청년들과 어울려 농사짓고 서핑 다니고 연애 감정도 느끼면서 치유와 재생의 시간을 갖는다. 도입부의 핍진한 드라마에 비해 로맨스와 귀농 힐링 파트는 도식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하지만 구성을 떠나 중견 배우들의 앙상블, 재치 있는 대사, 시원한 영상은 여전히 흥미롭다. 사람, 사랑, 기적을 믿고 싶은 시청자들에게 위안이 되어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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