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F/W 파리 꾸뛰르 위크, 나의 패션 문화유산 답사기
2025 F/W 파리 꾸뛰르 위크, 패션과 예술이 서로의 언어를 통역하는 순간. 도시와 옷에 대한 노트.

6TH OF JULY, 7월 6일 일요일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7월 6일의, 어쩌면 2025 가을/겨울 꾸뛰르 위크의 하이라이트, 마이클 라이더의 첫 번째 셀린느 쇼가 열리는 날. 셀린느 앰배서더 박보검의 촬영을 위해 에펠탑이 보이는 작은 아파트를 빌렸고, 그는 도착하자마자 10명이 넘는 스태프의 이름을 물으며 인사를 건넸다. <보그> 촬영도, 마이클 라이더의 첫 번째 2026 봄 컬렉션도 모두 성공적이었다. 마이클 라이더는 에디 슬리먼과 피비 파일로, 이 세기에 가장 인상적인 두 디자이너의 유산을 자기 언어로 해석했다. 에디 슬리먼을 연상시키는 스키니 팬츠, 어깨 부분에서 툭 잘라낸 듯한 피비 파일로식 테일러링 재킷, 반다나처럼 묶은 실크 스카프, 커다란 럭비 티셔츠, 당장 이번 겨울부터 입고 싶은 코트··· 마이클 라이더는 “그 옷은 과거, 현재, 미래, 기억과 실용성, 환상 그리고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습니다”라는 노트를 남겼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컨셉추얼하면서도 입고 싶은 옷. 셀린느 쇼를 보고 나오는 길, 편집장은 벌써부터 ‘위시 리스트’를 체크해놓았다고 슬쩍 털어놓았다.
그리고 2026 봄/여름의 빠투(Patou) 쇼를 위해 ‘화학의 집(Maison de la Chimie)’ 앞에 도착했을 때는 우산 없이는 서 있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파리 사람들은 우산의 용도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야외 정원에서 열리기로 한 쇼가 내부로 장소를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획을 급히 변경한 탓에 시트 넘버와 이름이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길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서 커다란 창문 너머로 정원을 바라봤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오웬 윌슨)’이 말한 것처럼, 역시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답다. 영화와 달리 내 경우에는, 지붕 아래서 바라볼 때 더욱 그렇다.

7TH OF JULY, 7월 7일 월요일
오전 10시, 스키아파렐리 쇼. 스키아파렐리 쇼에 간다는 건 드디어 꾸뛰르 위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뜻이다. 스키아파렐리는 평소처럼 웅장했으며, 예상보다 절제되어 있었고, 향수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미래적이었다. (패션이 기계적이면서 우아할 수 있다니!) 하지메 소라야마의 일러스트, 그리고 올라퍼 엘리아슨이 기술로 만든 자연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아이리스 반 헤르펜 쇼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기분을 선사했다. 해파리를 닮은 나풀나풀하고 전위적인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푸른 레이저를 뚫고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걸어 나왔다. 산소가 부족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아이리스 반 헤르펜 쇼 이후 급하게 봉 마르셰 백화점 옆 케어링 본사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쇼핑을 위해서는 아니다. <발렌시아가 바이 뎀나(Balenciaga by Demna)>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꾸뛰르 주간에는 패션쇼뿐 아니라 각종 하이 주얼리 프레젠테이션과 예술 전시가 곳곳에서 열린다. <발렌시아가 바이 뎀나>는 스키아파렐리 쇼만큼 오늘의 중요 일정이었다. 7월 9일에는 뎀나의 마지막 발렌시아가 쇼가 예정되어 있었고, 이건 2016년 3월부터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뎀나가 지난 10년간을 마무리하며 직접 보내는 작별 인사였으니까.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경건한 음악이 낮게 깔렸고 차가운 대리석과 일종의 성전처럼 꾸민 벽과 벽 사이로, 10년 동안의 인비테이션이 주르르 줄지어 있었다. 패션이 종교라면, 아마 사원은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본 전시장은 좀 더 런웨이를 닮았다. 뎀나는 <보그> 인터뷰에서 “저에게 지난 10년은 어디까지 경계를 밀어붙일 수 있을까를 탐색한 여정이었어요. 특히 럭셔리의 맥락 안에서 패션을 어떻게 다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를 말이에요”라고 털어놓았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그 말이 단번에 이해됐다. 그는 다르다. (민망한 표현이지만) 이건 ‘뎀나이즘’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십자가 형태의 하얀 무대 위로, 한동안 인스타그램 피드를 도배한 발렌시아가 남성복 인턴십 거절 레터로 시작해(뎀나는 <보그>에 “그걸 찾으려고 예전 핫메일 계정을 뒤졌어요. 다행스럽게도 떨어졌더군요”라고 말했다. ‘다행스럽다’니, 저 여유를 보라) 뎀나의 첫 번째 발렌시아가 쇼 오프닝을 장식한 아티스트이자 뮤즈 엘리자 더글러스(Eliza Douglas)의 극사실주의 마네킹이 생생하게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브루클린 미술관의 <솔리드 골드(Solid Gold)> 전시에 등장한 ‘페레로 로쉐’ 초콜릿 포장지 같은 골드 가운, 2021 가을/겨울 컬렉션의 중세 시대 기사가 입었을 법한 갑옷 부츠, 살짝 구겨진 ‘스파이시 칠리 칩스’ 클러치, <심슨 가족>을 패러디한 패션 필름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발렌시아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소셜 미디어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트롱프뢰유, 레디메이드, 업사이클링 등 현대 예술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상징적인 피스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을 위해 아껴둔 것이 분명한) 발렌시아가 아카이브 피스로 멋을 낸 힙스터를 비롯해, 우리 엄마의 소장품과 아주 유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50대 여성, 바로 아차산을 등반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어텍스 ‘풀착’의 미국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유심히 뎀나의 도발적인 피스를 들여다보는 풍경이었다. BGM으로 작업의 아이디어와 과정에 대한 뎀나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실제 목소리를 녹음한 것은 아니고, 놀라울 정도로 닮게 합성한 AI 음성이라 더 기묘했다. 전시장을 나오는 길,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어떻게 입는가. 그리고 패션과 럭셔리 사이의 미묘한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장만 남았다. 과자 봉지나 이케아 백 같은 걸 당당하게 들게 만든 뎀나의 궁극적인 질문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퐁피두 센터였다. 렌초 피아노(그는 천재다)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지 50년 가까이 된 이 파리의 랜드마크가 곧 문을 닫는다. (대신 곧 서울에 퐁피두 센터가 오픈한다.) 아예 철거하는 건 아니고 약 5년간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한동안은 퐁피두 센터 방문을 핑계로 근처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마실 일이 드물어진다는 뜻이다. (이제 서울의 퐁피두 센터 근처에서 마실 수 있으려나?) 리노베이션 직전, 퐁피두 센터가 선택한 예술가는 볼프강 틸만스다. 2층에 위치한 공공 정보 도서관(Bi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 Bpi)은 거의 모든 책과 자료를 비웠고, 지금은 (그리고 9월 22일까지) 틸만스의 사진전 <우리를 준비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모든 것이 우리를 준비시켰다(Nothing Could Have Prepared Us-Everything Could Have Prepared Us)>가 6,000㎡에 달하는 방대한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사실 볼프강 틸만스만큼 퐁피두 센터에 잘 어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작업 성격과 전시 방식이 그렇다. 퐁피두 센터는 그의 40여 년에 걸친 작업 전반을 보여달라고 요청했겠지만, 그래서 40여 년간의 작업을 한 번에 볼 수 있지만, 이건 회고전이나 연대기가 아니다. 오히려 공간에 대한 응답에 가깝다. 특유의 파란 배관이 퍼즐처럼 천장을 가로지르고, 바닥에는 군데군데 얼룩진 투박한 회색 카펫이 깔린 곳. 하얀 벽과 테이블, 도서관 책상과 책장, 복사실, 오래된 데스크톱이 듬성듬성 보이는 낡았지만 느슨한 분위기의 도서관. 틸만스는 이 공간을 그대로 살린 채 전시를 구성했다. 그 유명한 ‘Moon in Earthlight’(2015)는 소화기 옆에,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Aufsicht (Interrupted)’ (2000)는 방화문과 함께, 통창에는 건물 사이로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Himmelblau’(2005)가 풍경처럼 걸려 있다. 검은색에 가까운 바다를 담은 대표작이자 대형 작품 ‘The State We’re In, A’(2015)와 엽서 크기의 작은 사진이 치밀한 구성 같은 건 없다는 듯 나란히 붙어 묘한 질서를 이룬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힙하게, 어떤 사진은 액자에, 어떤 프린트는 집게로 무심하게, 또 어떤 건 벽에 옹기종기 붙은 채로, 자연스럽게 공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장소 특정적’ 전시를 무기로 하는 아티스트여서도 그렇지만, 나는 틸만스가 매거진 같은 사진 예술의 대량 복제 시스템이나 기술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지 않아 그를 특히 좋아한다. 전시장 한가운데서 그가 촬영한 잡지는 물론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최근 작품과 1988년 흑백 작업 같은 것들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는 텍스트와 포스터, 데스크톱에서 내가 직접 클릭해서 볼 수 있는 영상(이 작품은 Autoformation, ‘자기 주도 학습’이라고 부른다) 디지털 기술을 향한 틸만스의 내레이션이 담긴 사운드 설치 작업 등도 흥미로웠지만,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본 것은 창밖의 무성한 나무를 촬영한 사진 ‘Tree Filling Window’(2002)였다. 무한하고 선명한 초록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보기만 해도 머릿속이 청량해졌다.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에서 수없이 보던 틸만스의 사진인 데다, 내 아이폰 사진첩에도 그때 촬영한 사진이 100장 넘게 남아 있지만, 그걸 아무리 뒤적여도 퐁피두 센터에서 받았던 느낌은 결코 재현할 수 없다. 이미 내 러기지는 가득 찼지만 결국 친한 사진가와 에디터가 떠올라 엽서를 두 장, 나를 위해서는 1995년 타셴에서 발매한 두꺼운 사진집을 한 권 샀다. 호텔로 돌아와 사진집을 다시 넘겨보다가 분명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틸만스의 사진은 언제나 찬란하다. 보편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장면도 그의 프레임 안에서는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퐁피두 센터에서는 더 그랬다.

8TH OF JULY, 7월 8일 화요일
어제 산 볼프강 틸만스 사진집보다 더 크고 두꺼운 책 한 권이 호텔 방에 도착했다. 2025 가을/겨울 샤넬 꾸뛰르 쇼 인비테이션과 함께 지난 샤넬 꾸뛰르를 총망라한 책이었다. 늘 그렇듯 장소는 그랑 팔레였지만(5년 공사 끝에 다시 오픈했다) 이번에는 좀 더 사적이었다. 하얀 카펫, 벽을 둘러싼 거울, 베이지색 벤치로 장식된 그랑 팔레 위층 공간. 소수만 초대받은 것 같은 은밀한 분위기는 과거 캉봉가 본사에서 열리던 배타적인 ‘살롱 쇼’를 연상시켰다. 마티유 블라지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전 마지막으로 샤넬 크리에이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한 컬렉션답게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고요했지만, 그만큼 샤넬 공방의 섬세한 기술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처럼 보슬보슬하고 두툼한 소재가 분명하고 포근하게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고 강렬하게 지나갔다. 스테판 롤랑(Stéphane Rolland)은 예상보다 훨씬 기괴하면서 좋았고, RVDK는 무려 1시간 늦게 문을 열었으나(“5분 후에 시작한다”는 PR의 거짓말에 10번쯤 속아가며 서 있는데 다리가 실시간 퉁퉁 부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극적이었으며, 아르마니 프리베에서는 거장을 향한 존경심이 다시 일었다. 90세가 넘었는데도 저렇게 많은 의상을 디자인할 수 있다니, 역시 미스터 아르마니다. 자, 오늘은 이만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전시는 내일 잔뜩 보자.

9TH OF JULY, 7월 9일 수요일
서둘러 잠에서 깼다. 어제의 다짐(게으름에 대한 대가)대로 오늘의 캘린더는 이미 빼곡했다. 7월 9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작과 끝의 날이었다. 뎀나의 마지막 발렌시아가와 글렌 마르탱의 첫 번째 메종 마르지엘라 꾸뛰르 쇼가 각각 오후 12시와 7시 30분에 예정돼 있었다. 본래 의식적으로, 가능한 한 냉정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무조건반사적으로 “정말 멋졌어요”라고 말해서 상대방도 나도, 서로 어색해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우린 이미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이날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뎀나의 마지막 꾸뛰르 쇼는 ‘아름다운 이별’이 패션계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희망적인 예다. 이 컬렉션은 지난 10년간 뎀나가 만든 발렌시아가의 진정한 마침표였다. 쇼는 전시처럼 발렌시아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음성과 함께 시작했다. 킴 카다시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등장했고(실제 테일러가 소장한 다이아몬드를 착용했다), 이자벨 위페르는 조형적인 터틀넥을 입고 비틀거리며 지극히 파리지앵 같은 느낌으로 걸어 나왔다. 슈퍼모델 에바 헤르지고바의 엉덩이를 직각으로 강조한 네온 컬러 드레스와 뎀나의 남편 BFRND가 입은 오버사이즈 비즈니스 수트와 쭉 당긴 듯 늘린 더비 슈즈까지, 이건 그저 ‘끝’ ‘굿바이’라는 게 아니라 뎀나식 실루엣과 뮤즈의 총체 같은 것이었다. 그의 옷은 내게 언제나 ‘입을 수 있는 것’보다는 ‘사유 혹은 감상해야 하는 대상’처럼 다가온 게 사실이지만, 그토록 단호하고 고유한 언어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이틀 전 보고 온 <발렌시아가 바이 뎀나> 전시를 자연스럽게 곱씹으면서, 또 다른 패션 사원으로 향했다. 아예 전시 제목부터가 <Rick Owens: Temple of Love>다. 패션이 컬트라면, 교주는 아마 릭 오웬스일 거다. 릭 오웬스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진정한 아웃사이더, 단 한 번도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라지 않는 사람,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그러므로 신비로운 존재. 그런 그가 회고전을 여는 곳,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패셔너블한 장소인 팔레 갈리에라는 실내뿐 아니라 야외 정원까지도, 릭 오웬스 특유의 변태적이고 음침한 기운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팔레 갈리에라 곳곳에 미공개 작품, 100여 벌의 옷과 그가 어린 시절 읽은 책, 30여 점의 브루탈리즘 조각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그중 하나는 릭 오웬스가 소변을 보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릭 오웬스니까’가 유일한 답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1980년대 나이트라이프를 탐색하고 파리로 무대를 옮겨 쾌락을 파고들다가 일탈로 치닫는 릭 오웬스적 삶이 생생하고 기이하게 펼쳐졌다. 그의 커리어 연대기를 보여주는 10곳을 지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릭 오웬스가 소통을 원한 적이 있을까? 나는 늘 그가 ‘제안자’라고 여겼다. 그는 또 다른 실루엣, 몸과 옷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또 다른 혼돈과 리듬을 우리에게 던지곤 했다. 무엇보다도 릭 오웬스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본능적이면서도 고결하다는 점에서 대체 불가하다. 그 안에는 순수한 도발 혹은 원초적 사랑이 내재돼 있다. 릭 오웬스의 “여성에게는 존경과 사랑을 느낍니다. 반면 남성에게는 제 안의 수많은 결함 때문에 엄격한 질타를 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라는 전시 노트처럼, 애정과 비판이 혼재한 분위기가 공간의 공기를 더 독특하게 만들었다. 아내 미셸 라미(Michèle Lamy)와의 캘리포니아 침실을 재현한 공간 ‘The Bedroom’이 특히 그렇다. 아주 사적인 성소를 보란 듯이, 친밀하게 공개한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전시 제목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았다. ‘사랑의 성전’이 바로 이곳이구나.
그런가 하면 편집장이 꼭 보라고 신신당부한 <루브르 꾸뛰르> 역시 신화적이었지만, 장르가 좀 달랐다. 이건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 안에 들어간 듯했다. 전시는 매우 루브르다운 방식이었다. 제목엔 ‘꾸뛰르’가 붙었지만 패션 전시라고 보긴 어려웠다. 촘촘하면서도 광활했다. 무슨 얘기냐면, 발렌시아가부터 지방시, 디올, 스키아파렐리, 샤넬, 언더커버, 톰 브라운까지 꾸뛰르 피스를 프랑스 역사와 장식미술이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배치했다는 뜻이다. 어딘가에서 발굴한 것 같은 금속 마스크, 화려한 십자가 펜던트와 돌체앤가바나의 장식적인 드레스가 함께 있거나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꾸뛰르 컬렉션 피스와 그가 영감을 받았을 법한 18세기 서랍장이 놓여 있는 식이었다. 공예품이나 오너먼트 종류가 훨씬 많았고 가끔 직물도 볼 수 있었지만 태피스트리 같은 실내 장식물의 형태였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장식미술관 관장이자 큐레이터 올리비에 가베(Olivier Gabet)는 미국 <보그> 인터뷰에서 전시의 접근법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꾸뛰르의 탄생, 그리고 컬렉팅이 어떻게 디자이너에게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해주었는지를 함께 놓고 보면, 우리가 이 전시를 해야 할 문화적, 사회적, 사회학적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죠. 디자이너들은 루브르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에서 영감을 얻어, 어떻게 재해석해왔는가?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패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고대, 바빌론, 아테네, 베네치아 회화와 프랑스 조각에 이르기까지 정말 모든 곳에요. 루브르에서 패션은 ‘소장되는 것’이 아니라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 넓은 공간이(그 안에서 두 번 정도 길을 잃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족히 10개는 넘는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방에는 요지 야마모토와 자크뮈스, 언더커버의 예술적인 꾸뛰르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선 탓에 드레스를 10초 영접하기 위해 1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규모나 정교함으로 봐도, 희소성의 측면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다웠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이자 클라이맥스로는 글렌 마르탱의 메종 마르지엘라. 나는 디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도 한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르탱은 스스로를 놀라게 만들고 싶다고 연신 강조했다. “나는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다른 이들은 물론 스스로를 놀라게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요”라면서 말이다. 나는 이번 쇼 이후에 그가 목적을 100%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룩인 비닐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내 앞을 지나가자마자 평소 칭찬에 인색한 파리의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름다워(Looks Beautiful).” 아마 <보그 코리아> 사무실에 있는 다른 에디터들처럼 그도 어딘가에서 온라인 라이브로 쇼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쇼가 끝나고 전 세계 프레스들이 자꾸 “너무 멋있다” “아마 이번 시즌 최고의 쇼일 거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어색할 걱정 따윈 없었다. 솔직하게, 냉정함이나 객관성 같은 건 다 제쳐두고, 나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쇼와 글렌 마르탱이 좋다. 그리고 개인 인스타그램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글렌답다”고 적었다. “브왈라(Voilà)!”

10TH OF JULY, 7월 10일 목요일
“봄을 취소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하세요(Do Remember They Can’t Cancel The Spring).” <데이비드 호크니 25> 전시가 열리고 있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 외관에는 분홍색 네온사인으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그가 팬데믹 동안 수선화 드로잉과 함께 친구들에게 보낸 문구인데, 그 말이 꼭 맞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붓과 물감, 아이패드로 봄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다. 2023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처럼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역시 그의 미술적 일생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총 11개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초기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색감은 심심하고 구성은 촘촘해서, 사실 예상 밖이었다. 함께 간 사진가는 그림만 봤으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인지 추측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에서부터는 우리가 아는 호크니가 등장한다. 바꿔 말하면 이건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자기만의 색채를 찾았는지, 그러니까 ‘진화’했는지 자연히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아이패드로 그린 꽃 작업(디지털 태블릿으로 그린 그림을 전통적인 액자에 넣어서 전시하고 있다), 집착적으로 그린 산사나무 연작, 라임나무, 자화상과 초상화, 본인 전시장에서 풍경을 ‘캡처’한 그림이 초현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특히 요크셔, 노르망디, 런던에서 보낸 25년간의 작품은 찬가처럼 느껴질 정도로 황홀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데이비드 호크니다. 이유도 단순하다. 바로 생명력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펄떡이는 움직임, 빛, 피고 지는 순간이 고스란히 저장돼 있다. 장면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 말이다. 방과 방을 거닐면서 희망이 차올랐다. 빛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한낮이었다가 금세 고요한 밤이 되고, 눈부실 정도로 만개한 나무와 푸른 언덕, 황금색 들판이 작품마다 들어차 있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무표정했지만 이상하게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A Bigger Splash’(1967). 이 시대의 모나리자가 있다면 바로 저 그림이구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두 번째로 북적였던 건 단연 해리 스타일스의 초상화다.) 차분히 차례를 지켜 첨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 그림 앞에 섰을 때 어쩐지 감동이 밀려왔다. 차가운 물로 머릿속을 씻어내는 기분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칭이랄까,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을 생각도 못했다. 과거 아트 잡지를 만들면서 받은 고통을 이유로 대체로 삐딱한 시선으로 예술을 보아왔지만 이건 애틋한 마음이 절로 일었다.

하지만 ‘최애’는 따로 있다. 우리 집 냉장고에 마그넷과 엽서로 붙어 있는 그 유명한 그림을 다 제쳐두고, 놀랍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전시실 10의 몰입형 설치 작품이다. ‘몰입형’이라는 단어는 예술계에서 지나칠 정도로 흔히 쓰이는 표현이고, 그때마다 2분을 채 참지 못하고 전시실을 떠나면서 ‘전혀 몰입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해왔지만, 여기서 나는 충실한 관람객이었다. 오페라 애호가인 호크니가 1970년대부터 선보여온 무대미술을 새롭게 재해석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빈백에 누워 하염없이 감상했다. 내내 조잘대던 사진가와 나 모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서, 감탄을 반복하면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온기를 느꼈다면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Pinault Collection)에서는 서늘한 명상을 경험했다(우리끼리는 편의상 피노 미술관이라고 부르곤 한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 1층,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로툰다 내부에는 원형 수조가 조성돼 있었고, 그 위로는 수많은 세라믹 그릇이 둥둥 떠다녔다. 2026 봄/여름 생 로랑 남성 쇼의 런웨이였던 셀레스트 부르시에-무주노(Céleste Boursier-Mougenot)의 수면, 음향 설치 작업 ‘클리나멘(Clinamen)’이다. 이곳에서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물가에 앉아 가만히 그릇의 움직임과 지붕으로 쏟아지는 빛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며 내는 청아한 소리와 불규칙적인 리듬은 자연이 내는 음성 같았다. 모두 수조를 따라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거나 걷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고, 순간순간이 광대하게 다가왔다. 요가 수련을 한 듯 마음이 개운해진 상태로 인상적인 몇몇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했더니 시인인 나의 친구(볼프강 틸만스의 사진집 <Today is the First Day>에 시를 쓰기도 했다)에게서 DM이 왔다. 평소 우리의 대화는 비아냥이 8할인데, 그런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10분도 못 있을 줄 알았는데 2시간 넘게 거기 앉아 있었어.” 세상 부정적인 아이리시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나 역시 농담 같은 건 완전히 배제하고 답했다. “나는 1시간 30분. 이건 명상이나 목욕 같은 거야.”
7월 6일에 세차게 내리던 비는 멎었고, 7월 10일의 빛이 건조하게 들어왔다. 지난 5일간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패션과 예술이 공명하는 방식이다. 런웨이는 미술관을 욕망하고, 미술관은 다시 몸을 꿈꾸었다. 뎀나의 작별 인사는 패션이 하나의 언어임을, 릭 오웬스의 사랑의 성전은 예술이 하나의 몸짓임을 증명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색채와 감정을, <루브르 꾸뛰르>는 장식미술 위에 꾸뛰르를 포개며 ‘입혀지는 역사’를 보여주었고, 물과 그릇을 악기로 한 부르스 드 코메르스의 소리는 시간을 들려주었다. 결국 패션은 예술의 문맥을 빌려 스스로를 보존하고, 예술은 패션의 속도를 통해 현재성을 확장한다. 그래서 이번 주의 파리는 패션이 전부였고, 또 전부가 아니었다. VK
- 디지털 디렉터
- 권민지
- 일러스트레이터
- 유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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