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이 예술로 좁혀지는 네 번의 산책, 2025 프리즈 네이버후드 나잇
도시의 낮이 서서히 접히고 골목과 갤러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때, 작품은 낮과는 다른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9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리는 ‘네이버후드 나잇(Neighborhood Nights)’은 을지로·한남·청담·삼청 네 구역을 무대로 여러 갤러리가 밤 10시 정도까지 문을 열고 관람객을 맞는다. 아래는 나흘의 동선을 시뮬레이션한 코스다.

을지로 나잇: 9월 1일(월)
보물찾기하듯 빌딩 사이에 숨은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는 을지로는 옛것과 오늘의 감각이 뒤섞이며 다층적인 매력을 자아내는 곳이다. 을지로 나잇은 동선의 출발점으로 전시 공간 d/p를 추천한다. 낙원악기상가에 자리한 d/p는 9·10월 ‘즉흥’을 주제로 워크숍, 공연,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을지로 나잇 당일에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첼로 즉흥연주와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음악가 이옥경의 장시간 솔로 공연 <Opening(여는)>이 펼쳐진다.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특별 게스트 아티스트의 개입이 더해진 즉흥적 소리 풍경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를 모은다. RSVP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고 자율 입·퇴장이 가능하다.
다음 목적지는 양혜규 작가의 스튜디오 전시 <얇은 도약의 나날들>이다. 지난 10여 년간 작가의 작업실이었던 종로구 연건동 토토빌딩 3층에서는 2021년에 첫선을 보인 평면 연작 ‘황홀망’을 중심으로 작품 변천사를 보여주는 도서와 미공개 소형 조각이 함께 전시된다. 평소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 전시는 을지로 나잇에 한해 일반에 공개한다.
토토빌딩을 나와 도시의 일상과 역사가 뒤엉킨 종로 일대를 10여 분간 모험하듯 산책하면 두산갤러리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2011년부터 큐레이터를 발굴·지원해온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출신 김여명, 김진주, 신재민이 공동 기획한 전시 <녹색 섬광>이 진행 중이다. 을지로 나잇에는 전시장에 상주한 큐레이터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식음료를 즐길 수 있다. 또한 오후 6시부터 8시까지는 워크숍 참여 작가 김정각·백윤석이 ‘공룡상담소’를 연다. “우리 안에 웅크린 외로움을 동시대적 정서로 바라보고, 그것을 공동의 일로 받아들이며 헤쳐나가는 시간”을 목표로 하며, 참여 신청은 @doosanartcenter_gallery에서 받고 있다.
이제 을지로 한복판으로 향할 시간이다. 2024년 철공소 골목에 문을 연 PS 센터에서는 아트 위크 기간에 인도 뭄바이에서 활동하는 나레쉬 쿠마르 개인전 <March to March>가 열린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양진영 큐레이터는 이 작가를 “인디고빛과 오래된 종이를 사용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저항의 연대와 공동체적 상상을 제안하는 날카롭지만 따뜻한 작가”라고 소개했다. 을지로 나잇에는 밤 10시까지 작가와 함께 다과와 와인을 곁들이며 작품에 관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갤러리 투어를 하다 보면 샴페인의 기운이 돌고 허기가 느껴질 법하다. 퇴계로 쪽으로 발길을 돌려 함흥냉면으로 요기를 하는 건 어떨까? 나란히 자리한 오장동함흥냉면과 오장동흥남집 가운데 줄이 짧은 곳으로 골라 한 그릇 비우고, 걸어서 5분이면 비평 공부 모임에서 시작된 전시 공간 옐로우 펜 클럽(YPC)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아트 위크 기간 박미미 개인전 <Pink>를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을 직접 본 적이 없다면 호기심이 더 커질 테고, YPC 인스타그램 소개문(“박미미는 가지고 있던 정보를 파쇄한 조각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처럼 알쏭달쏭한 단서를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을지로 아트 신의 터줏대감인 공간 형이다. 이곳에서는 세대 간의 시선과 경험을 나누는 전시 <형 누나 언니 오빠>가 열리고, 모든 세대를 초대하는 ‘형나이트’ 파티가 마련된다.




한남 나잇: 9월 2일(화)
남산 기슭을 따라 너르게 자리한 갤러리 군집이 특징인 한남 나잇의 출발은 P21을 추천한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사거리 근처 소월로에서 회나무로로 내려가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다. 오렌지빛 노을을 배경으로 5분 남짓 걸어 갤러리에 도착하면 <아트리뷰 아시아>와 함께하는 드링크 리셉션이 기다리고 있다. P21에서는 최하늘, 사이먼 후지와라 등 국내외 아티스트 10인이 참여한 단체전 <Pigment Compound>를 통해 화장품 소비문화를 재해석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회나무로를 따라 5분가량 내려가면 휘슬에서 현남 개인전 <필드 안의 둥지> 오프닝 리셉션이 진행 중일 것이다. 작가는 도시 풍경의 무질서에서 영감을 얻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 도처에 흐르는 전자기파에 투사된 실체 없는 공포와 믿음”을 다양한 물질 실험으로 형태화한 야심 찬 신작을 선보인다.
이제 이태원을 가로질러 메가 갤러리 지역으로 이동할 차례다. 리만머핀에서는 유약을 입힌 세라믹 벽면 설치와 조형적 회화 패널을 통해 지층과 심해의 풍경을 탐구하는 테레시타 페르난데스의 개인전 <지층의 바다>가 열린다. 30여 년간 풍경의 복합성과 역설을 탐구해온 작가의 시적 세계를 감상한 뒤에는 리셉션에서 서울집시의 수제 맥주와 한식 핑거푸드를 즐기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리만머핀을 나서면 갈림길이 나온다. 이태원로를 따라 파운드리 서울·에스더쉬퍼·디스위켄드룸 쪽으로 계속 걸을지, 한남 오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타데우스 로팍·갤러리바톤·갤러리 핌·라니 서울을 집중적으로 볼지 결정해야 한다. 파운드리 서울에서는 미란다 포레스터와 한정은의 회화를 함께 선보인다. 포레스터는 서구 미술사에서 배제된 흑인 퀴어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한정은은 소멸과 여운을 탐구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에스더쉬퍼에서는 빛과 광학적 물질을 통해 환경의 지각과 신체적 감각을 탐구하는 안 베로니카 얀센스의 개인전 <September in Seoul> 오프닝 리셉션이 열린다. 디스위켄드룸에서는 “디지털로 설계되지만 손으로 다시 빚어지고, 풍화와 웨더링(Weathering) 과정을 거쳐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김한샘의 오브제 작업을 모은 전시 <NOWON>이 진행 중이다.
한남 오거리 쪽으로 향하면 타데우스 로팍에서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를, 갤러리바톤에서는 지각적 회화 세계를 심층적으로 탐구한 최지목의 개인전 <백 개의 태양>을 만나볼 수 있다. 갤러리 핌은 이승희, 장예빈, 전다화, 최유정 네 작가의 기획전 <Velvet Hammers>를, 라니 서울은 장종완, 추미림, 소피 바랭, 앙투안 카르본이 참여하는 그룹전 <자아들의 앙상블: 네 명의 작가와 그 너머>를 드링크 리셉션과 함께 선보인다. 유앤빌리지길에 자리한 두 갤러리의 전시는 공통적으로 ‘네 명의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장을 여는’ 그룹전이지만, 접근방식은 다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언덕길을 산책하듯 걸으며 두 전시의 결이 어떻게 다른지 직접 비교해보길 권한다. 한남 나잇을 마친 뒤에는 늦은 시간 허기를 달래기 좋은 곳으로 한남북엇국, 소양강회마차, 방울과꼬막을 추천한다.



청담 나잇: 9월 3일(수)
청담 나잇은 청담동 가구 거리에서 도산공원 쪽으로 런웨이처럼 일자로 난 길을 따라 갤러리 워크를 즐기기 좋다. 출발은 지갤러리를 추천한다. 2023년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를 수상한 우한나의 개인전 <품새 Poomsae>가 전시 중으로, 패브릭 조각과 설치를 통해 순환의 고리를 은유하듯 확장해가는 작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지난 해 갤러리 앞 보도에 분식을 제공하는 푸드 트럭으로 큰 호응을 얻은 ‘포차’ 컨셉트는 올해도 유지된다. 주류로는 ‘칼스버그’ 맥주가 제공되며 DJ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글래드스톤에서는 우고 론디노네의 파스텔 톤 수채 풍경화를, 페로탕에서는 이즈미 카토의 토템 신앙과 애니미즘을 연상시키는 독창적 세계관을 만날 수 있다. 화이트 큐브는 타데우스 로팍과의 공동 기획으로 안토니 곰리의 대규모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으며, 송은은 단체전과 함께 드링크 리셉션을 마련하고, 아뜰리에 에르메스 역시 오픈 아워를 연장하며 밤의 관람 경험을 풍성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청담에 새로 문을 여는 프로젝트 공간이 눈에 띈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1층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언더 레이어’의 오프닝은 전시와 퍼포먼스, 파티가 한데 어우러진다. 박경률의 개인전 <Undefined Rhythm 정의되지 않은 리듬>은 근본적인 회화 언어를 탐문하고, 콜렉티브 뜨의 전시형 퍼포먼스 ‘경계’는 접속의 순간을 드러낸다. 퍼포먼스 공개 후에는 ‘토끼소주’ 칵테일과 케이터링이 제공되고, 디제잉 파티로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언주로에서는 아셀아트컴퍼니가 9월 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지상 5층의 갤러리 One, Two, Three에서 각각 개관전을 연다. 세계적인 컬렉터 세르주 티로쉬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집한 동시대 작가 16인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는 <Africa Rising: Highlights from the Africa First Collection>, 제너러티브 AI 기술을 기반으로 자연과 영혼을 탐구하는 이스라엘 작가 로이 아딘의 국내 첫 개인전 <Roy Adin: Generated Nature, Human Soul>, 196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 신에서 활동한 미디어 아티스트 겸 시인 알도 탐벨리니의 <Aldo Tambellini: We are the Primitives of a New Era>가 그것이다. 청담 나잇 당일 오후 4시에는 세르주 티로쉬와 로이 아딘의 아트 토크가, 오후 6시에는 알도 탐벨리니 전시장에서 무용가 시우의 현대무용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
청담 나잇의 또 다른 매력은 전시 공간 주변에 완성도 높은 칵테일 바가 포진했다는 것이다. 갤러리를 옮겨 가다 잠시 들러 리프레시하기에 더없이 좋다. 송은, 글래드스톤 인근에는 ‘보이드’, 아셀아트컴퍼니 근처에는 ‘만타’, 언더 레이어 근처에는 ‘핸드 인 핸드’가 있으니 참고할 것.


삼청 나잇: 9월 4일(목)
전통적인 갤러리 워크의 종착지라 할 만한 삼청 나잇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구심점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상설·기획 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미술관 마당에서 오전 11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야외 프로그램과 마켓은 올해도 다채롭다. 농산물존·생태존·디자인존·아트북존 등 6개 구역에 약 55팀의 판매자가 참여해 장터를 채운다. 저녁 7시부터는 예츠비, 씨피카, 지소쿠리클럽이 무대를 꾸미며 열기를 더한다.
삼청 일대 갤러리 프로그램 중에서는 바라캇 컨템포러리의 지미 로버트 개인전이 눈에 띈다. 로버트는 가시성, 정체성, 재현의 정치학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로, 퀴어와 인종화된 신체가 이미지 생산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해왔는지를 퍼포먼스, 영상 등을 통해 추적한다. 국내 첫 개인전인 만큼 대표작과 신작 영상, 퍼포먼스를 함께 선보이며, 삼청 나잇에는 오후 6시와 8시 두 차례에 걸쳐 퍼포먼스를 계획하고 있다. 백아트에서는 50여 년간 일상의 행위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실험을 이어온 성능경의 개인전 <쌩~ 휙!>을 열고 있다. 전시 제목은 신작 퍼포먼스에서 작가가 직접 깎아 만든 싸리나무 회초리를 휘두를 때 나는 소리에서 따온 것으로, 단순한 행위를 사회적 맥락과 연결해 시대성과 접속하는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약 80여 점을 선보인다. 삼청동 이웃과의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갤러리 측은 맞은편 한식당 ‘마나님 레시피’의 매실차와 전통 간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VASAK의 김부각 등으로 드링크 리셉션을 준비했다. 갤러리 측에 따르면 성능경 작가는 삼청 나잇 당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갤러리에 상주할 예정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퍼포먼스는 갤러리현대가 밤 10시에 선보이는 국가무형유산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전승자인 만신 김혜경의 <대동굿 비수거리(작두굿)>다. 1990년 여름 갤러리현대 앞뜰에서 백남준이 요셉 보이스를 기리며 벌인 굿은 단순한 의례를 넘어 전통과 현대, 예술과 영성의 경계를 횡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TV 16대와 해체된 피아노를 배경으로 펼쳐진 그 굿은 백남준이 붙인 제목 ‘늑대 걸음으로(A Pas de Loup)’처럼 강렬한 상징성과 메시지를 남겼다. 김혜경의 퍼포먼스는 그 맥락을 이어받아 전통 의례가 미술 현장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재해석되는지 보여주는 자리다.
국제갤러리에서는 루이즈 부르주아와 갈라 포라스-김의 개인전이 함께 열리며, 갈라 포라스-김의 아티스트 토크가 오후 6시에 예정돼 있다. <아트리뷰> 편집장 마크 래폴트와의 대담에서 사물이 제작·인식·보존되는 방식을 규정하는 분류 체계와 소장품 문화를 중심으로 포라스-김의 예술적 관심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어 오후 8시부터는 모과의 디제잉 퍼포먼스가 무대를 잇는다.
삼청 나잇의 마무리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초이앤초이갤러리다. 유진영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이 공간은 아름다운 옥상을 품고 있어 늦은 밤까지 관람객을 맞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갤러리 창 너머로 퍼지는 도시의 공기와 옥상 위의 잔불 같은 풍경 속에서 컵라면과 맥주로 소소하게 밤을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다.
**행사 시작 시간이나 입장 조건은 변동될 수 있다. 방문 전 각 갤러리의 인스타그램 공지를 확인하면 더 여유롭고 완성도 높은 네이버후드 나잇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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