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과 불안을 씻어내는 물방울, ‘김창열’展
어김없이 9월 초가 도래했고, 이번에도 전국의 미술 현장이 들썩였습니다. 특히 서울, 그중에서도 미술관과 갤러리가 운집한 삼청동은 더더욱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죠. 프리즈와 키아프라는 양대 아트페어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둘러싼 문화와 풍경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시기, 페어장 밖 거의 모든 갤러리와 미술관은 최고의 프로그램을 선보이게 됐으니까요. 그런 와중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김창열>에서 소란 속 진공 같은 순간을 맛본 건 행운으로 느껴졌습니다. 화가의 고요한 삶이, 그가 평생 그린 물방울이 작품에 고요히 맺힌 풍경 때문일까요. 여전히 관람객들로 북적거렸지만, 그들의 몸짓은, 숨소리는 여느 유명 작가의 전시를 찾은 이들과 분명 달라 보이는 듯합니다.


예술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추천해달라는 제안을 받을 때마다 저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2022)를 가장 먼저 꺼냅니다. 영상 감독인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이 작품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습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내게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김창열 작가는 ‘무슈 구뜨’, 즉 ‘물방울 씨’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전쟁과 분단, 이념과 생존이라는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평생 살아남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죠. 이번 회고전은 김창열의 물방울이 형태적으로 마냥 아름답기만 한 모티브가 아니라 삶의 상처와 질곡 속에서도 그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임을 알려줍니다.

회고전임을 내세운 이번 전시가 김창열의 작업 세계를 망라한다는 사실도, 저 같은 미술 애호가를 매료시킨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전쟁의 상처를 화면에 각인시키며 죽음을 위로하는 듯 제의를 표한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시기, 1960년대 뉴욕에서 시도한 신체와 물질 사이 기하 추상의 시기, 인체의 점액질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상을 그려내던 1960년대 말 파리 정착 직후의 시기, 젖은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우연히 발견한 후 물방울 그리기에 매진한 시기, 그리고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 배웠던 천자문 같은 문자를 작품에 도입해 세상의 이치와 질서를 알고자 한 생애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김창열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만나다 보면 예술 너머의 삶을 실감하게 됩니다.
김창열의 작업은 ‘화면에 찍은 점들이 만약 투명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작가로서의 호기심, 그리고 투명한 물방울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작업하면서 고통과 불안을 씻어내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열망이 함께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동시에 아픈 역사 앞에서 누구보다 겸허했던 예술가가 써내려간 ‘애도의 일기’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전시실에서 저는 아들의 카메라 앞에서조차 극도로 말을 아끼며 어딘가를 멍하게 응시하던 인간 김창열의 모습을 다시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창열의 삶과 작품 앞에서 말은 필요 없습니다. 삶과 예술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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