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기다려온 미래의 관람자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이 낯선 이름을 한국에서 가까이 불러보게 될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신비로운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예술에서 삶으로, 현실에서 영혼의 세계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1862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였습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평가받는 칸딘스키나 말레비치보다 먼저 추상 형식을 실험했는데요, 특히 평생 작품을 판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죽은 후 20년 동안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작업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과 태도로 바라봐주길 바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므로 부산현대미술관에서 10월 26일까지 열리는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의 제목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작가가 기다려온 미래의 관람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술을 만난다는 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고 헤아리는 행위라 여겨왔습니다.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행위는 예술이 선사하는 가장 짜릿한 경험일 겁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오래된 작품은 이런 경험의 진폭과 깊이를 극대화합니다.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사물의 본질과 마주하는 일이었고, 추상은 자연의 형상 너머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질서와 감각 너머의 세계를 탐구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동안 미술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설득하기 위해 숱한 자리에서 나름 애써온 저로서는 든든한 멘토를 만난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과연 회화가, 그림이 캔버스 위에 올려진 물감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건 그 사유와 감각 덕분이라는 진실을, 저는 다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업이 어떻게 궁극의 상태를 향해 차근차근 진화했는지 보여줍니다. 자연과 과학, 신지학과 인지학에 영감을 받아 마침내 우주 질서를 탐구한 화가의 시도와 시선을 한 발 한 발 따라가봅니다. 그 중간에서 만나는 ’10점의 대형 그림’에서는 충분히 시간을 가져도 좋습니다. 높이 3m에 달하는 캔버스 10점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인간 생애의 네 단계를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화면은 기하학적 도형과 은은한 색이 만들어낸 율동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인생을 상징화한 도상의 풍경 앞을 여러 번 서성였습니다. 덕분에 이토록 추상적인 작품이 내 인생에 고스란히 포개어지고, 당시 기억까지 소환하는 실로 신기한 경험도 했지요.


당대와 스스로 거리를 둔 작가가 어쩌면 무척 외로웠을 거라는 저의 섣부른 예측은 힐마 아프 클린트가 평생 묵묵히 그려온 작업 앞에서 잦아들었습니다. 자신의 작업을 “더 거대한 질서로부터 받아 적는 작업”이라고 믿은 화가는 고독했을지언정 그 시공간에만 머물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의 작품은 현대 관람객을 만나 더한 힘을 발휘하지만,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작가가 그렇게 받아 적었다는 감각과 인식의 층위는 지금의 우리조차 아직 경험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그것이니 말이죠. 지난 수십 년 동안 미술사에 묻혀 있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때늦은 귀환은 그러므로 늦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작업이, 그 존재가 진정 신비롭다면 어쩌면 미래가 수없이 거듭된 후에도 여전히 불가사의할 그 세계를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업이 영원히 유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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