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았는데 왜 공허할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2021년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온 웹소설이 크게 이슈가 됐다. 사회에서 권장하는 성공 패스를 착실히 밟았지만 어째서인지 도태 위기에 처해버린 중산층 중년 남성의 심리를 신랄하게 묘사한 블랙코미디였다. 소설이 나온 때는 팬데믹으로 실물 경기는 얼어붙은 반면 통화 유동성이 급증하면서 주식, 코인, 부동산이 폭등하던 시기다. 노동과 현금 가치가 상대적으로 급락하자 멀쩡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벼락거지’가 된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재테크 광풍이었다. 소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이런 상황을 발 빠르게 포착한 세태 풍자물이자, 재테크 동기부여 서적이었고, 여간해서 픽션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꼰대 중년남을 내세워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해부한 생태 보고서였다. 획기적인 소재, 현장감 넘치는 묘사에 힘입어 웹소설은 1,000만 조회 수를 기록했고, 웹툰과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JTBC)는 소설의 하이퍼리얼리즘 성격을 반영해 짜증 나도록 옹졸하고 아둔하고 고집불통인 김낙수(류승룡)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김낙수는 평생 체제에 순응하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상위권 대학에 들어갔고, IMF 사태 직후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 회사에 25년 근속하며 부장이 되었고, 이제 이사 승진을 앞두고 있다. 구축이지만 서울에 아파트도 장만했고, 명문대에 다니는 아들(차강윤)도 있으며, 아내(명세빈)는 전업주부다. 김낙수는 이런 게 ‘위대한’ 인생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건 아내뿐이다. 사실 재테크라곤 전혀 모르는 김낙수에게 막무가내 우겨서 ‘서울 자가’를 마련한 것도, 이사 승진에만 목매는 김낙수를 대신해 노후 대비 ‘플랜 B’를 준비하는 것도, 떠버리 김낙수를 다독이며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도 아내다. 극 초반 김낙수는 자신이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거나, 눈치챘더라도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이 붕괴될 조짐은 곳곳에서 보인다.

김낙수는 형님 아우 하던 백 상무(유승목)가 언젠가부터 영업 2팀 도 부장(이신기)을 더 신뢰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급기야 자기보다 젊은 도 부장이 60억원 넘는 신축 아파트를 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회사 스트레스를 풀려고 동창들을 만나보니 자기가 은근히 무시했던 친구가 월세 3,000만원을 받는 건물주가 되어 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송 과장(신동원), 외제 차를 모는 정 대리(정순원) 등 팀원들의 경제관념도 자신과 다른 것 같다. 그나마 이사로 승진만 하면 연봉도 오르고 권위도 생길 거라 믿었던 김낙수에게 이내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다.
넉살 좋은 김낙수는 영업 사원 시절 날아다녔다. 동기 중에서도 빠르게 승진했다. 하지만 관리자로서는 실력이 변변찮다. 백 상무는 김낙수가 자기 아이디어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채점 기다리는 아이처럼 군다고 못마땅해한다. 부하 직원들은 세상 물정 모르면서 매사 가르치려 들고, 회식 좋아하고, 말 많고, 공은 자기 것, 과는 부하들 것으로 돌리는 김낙수가 얄밉다. 결국 백 상무는 김낙수를 좌천시킨다. 제 발로 회사를 나가라는 뜻이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이란 사실 만만한 성취가 아니다. 2025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4억원을 돌파했다. 김 부장의 집은 비록 강남은 아니지만 85㎡는 되어 보인다. 대한민국 상위 10분위 가구 자산이 16억2,895만원이므로, 김 부장 가족의 자산은 상위 10분위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2025년 대기업 부장급의 평균 연봉은 9,500만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성과금은 별도다. 대기업 27곳은 부장급 이하 일반 직원의 연봉 평균이 1억을 돌파했다. 김 부장의 연봉이 1억이라 치면, 통계청 기준 대한민국 전체 직장인 상위 7%의 고소득자다. 그런데도 김 부장의 인생은 딱해 보인다. 그에게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배워둔 기술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아파트 전세금 그거 하나 달랑 가지고 몇십 년 살 생각하면 끔찍해. 100세 인생 같은 거는 나한테 재앙이야!” 김 부장의 동기가 퇴사 압박에 시달리다가 내뱉은 이 말은 대한민국 직장인의 불안을 요약한다. 김 부장의 25년 경력은 퇴사 후에는 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집 한 채 가진 걸로는 세를 줄 수도 없고, 기존 생활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매도해서 현금을 마련할 수도 없다. 아들이 결혼할 때 서울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사줄 수도 없을 테다.


김 부장은 아들이 자기처럼 대기업에 입사하길 바라지만 아들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아들은 스타트업을 한다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힙스터들에게 “그래서 뭘 만든다는 거냐” 물었다가 조롱을 당한다. ‘어머니는 전업주부,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고, 서울에 자가가 있지만 강남 서초는 아니고, 국적은 한국.’ 외국 물 잔뜩 먹은 힙스터가 늘어놓은 분석은 김 부장 아들의 프로필과 정확히 일치한다. 자산 대물림 없이는 부를 쌓기 어려운 ‘상속 계급사회’에서 저 힙스터들과 김 부장 아들의 격차는 뚜렷하다. 고루한 가풍으로 인한 문화 자산의 빈곤함도 티가 난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직장 생활만 해서는 이 격차를 뛰어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처럼 사는 게 정답이라고 우겨대는 아버지가 답답하다.
원작 소설은 김낙수를 비롯해 송 과장, 정 대리 등 여러 인물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새로운 경제관념에 눈을 뜨거나, 회사 생활과 투자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이건 단지 투자를 권장하고 가르치는 콘텐츠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투자는 자존감, 일, 노동 소득, 인간관계 등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삶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수단이다.

김낙수는 평생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살았다. 자신을 연구하지 않고 그저 남들이 좋다는 성공 공식을 따라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는 사사건건 자신과 남을 비교한다. 도 부장의 명품 가방, 정 대리의 외제 차를 질투하고, 해고당한 동기를 보며 ‘나는 쟤보다 낫다’ 안심하고, 자기 성취와 권위를 떠벌리며 타인에게 인정을 요구한다. 학벌, 직업 등 간판에 집착하면서 저보다 못하다 싶은 사람은 무시한다. 제 잘난 맛에 취해서 남들이 뭘 하고 사는지,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심 갖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물이 변화할 수 있을까?
중산층 엘리트들이 입시 공부하고 회사 다니고 퇴직하고 난초 가꾸다가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기 퇴직 후 100세까지 먹고살 새로운 소득을 창출하려 발버둥 치는 게 디폴트가 된 시대다. 자기 계발에 끝은 없다. 김낙수가 소중히 여기던 사회적 지위를 잃고 인생을 리셋하는 과정은 이 시대를 살아내는 데 필요한 가치와 전략이 무엇인지 힌트를 제공할 것이다. 반면교사지만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이 우리와 몹시 가깝기 때문이다. 김낙수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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