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시간이 멈춘 도시, 바실리카타

2025.12.16

시간이 멈춘 도시, 바실리카타

응회암 위를 거닐며 세상에서 가장 느린 회전목마를 타고, 고대 주거지였던 동굴에 머물며 먼 과거로 떠난 시간 여행. 바실리카타는 느림의 미학으로 가득한 때 묻지 않은 신비한 도시다.

모델 페넬로페 테르네스(왼쪽)와 케이틀린 소에텐달(오른쪽)이 무르지아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서 있다. 페넬로페의 드레스는 엘리자베타 프렌치(Elisabetta Franchi), 후드는 알라이아(Alaïa), 부츠는 스포트막스(Sportmax). 케이틀린의 드레스는 프란체스코 무라노(Francesco Murano), 후드는 알라이아, 부츠는 스포트막스.

이탈리아 남부에 자리한 바실리카타(Basilicata)는 비현실적인 풍경과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한 마을, 낭만적인 해안선과 이색적인 먹거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바실리카타주의 상징적인 도시 마테라(Matera)는 응회암 암반에 안착한 독특한 지형으로 유명하며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2019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마테라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분위기, 그림 같은 골목길,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아름다움이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좁은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여행자들은 역사와 전통이 깃든 이 독특한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 무르지아 마테라 공원(Parco Regionale della Murgia Materana), 생생한 암벽화를 간직한 원죄의 지하 감옥(Cripta del Peccato Originale), 마테라 대성당(Cattedrale di Maria Santissima della Bruna e Sant’Eustachio)과 마테라 현대 조각 미술관 무스마(MUSMA)는 웬만하면 꼭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나뭇잎 무늬로 짜인 비스코스 드레스는 에르마노 설비노(Ermanno Scervino), 송아지 가죽 부츠는 듀란 랜팅크(Duran Lantink), 양모 프린지 목걸이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 마테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사시(Sassi) 지구로 잘 알려져 있다.
프린지 장식 톱과 스커트, 프린지 장식 장갑, 송아지 가죽 부츠는 스포트막스(Sportmax), 귀고리는 지방시(Givenchy by Sarah Burton). 페넬로페가 도리스 양식으로 지은 헤라 신전의 일부를 볼 수 있는 타볼레 팔라티네(Tavole Palatine)를 조망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1만 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대 동굴 주거지 사시 디 마테라(Sassi di Matera)는 특히 이국적인 매력이 가득한 장소다. 사시(Sassi)는 이탈리아어로 바위, 돌이라는 뜻으로, 오래전 과거부터 동굴을 파고 암반을 깎아 만든 주거 공간이 가파른 언덕과 협곡을 따라 층층이 형성된 모습이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머물길 원한다면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은 이탈리아어로 ‘흩어진 호텔’이라는 뜻을 지닌 알베르고 디푸소(Albergo Diffuso)다. 마을에 분산된 유휴 건물을 숙박 시설로 활용한 곳으로 18개 동굴 객실과 고대 암석 교회에 마련된 공용 공간으로 이루어져 호텔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곧 도시를 탐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특별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마침 호텔 주변에 자리한 무르지아 국립공원과 교회가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전경을 보여준다. 전통에 뿌리를 둔 채 섬세하게 꾸며진 알베르고 디푸소에서는 최고급 리넨 시트와 응회암 벽, 은은한 조명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다.

케이프 후드와 메리노 울 니트 미니 드레스는 듀란 랜팅크(Duran Lantink), 짜임 디테일이 돋보이는 스커트와 벨 보텀 팬츠는 게스 액티브웨어(Guess Activewear).

음식은 마테라 전통 빵이 특히 유명하다. 오늘날까지도 고대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빵을 굽는데, 과거 공동 오븐을 사용할 때 각 가정의 빵을 식별하기 위해 빵 덩어리에 서로 다른 표식을 해두었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저녁 식사는 사시 지구에 자리한 바칸티(Baccanti)에서 즐겨보자. 전통의 재해석을 추구하는 셰프 도메니코 디 루카(Domenico Di Luca)가 말린 무화과 페스토를 곁들인 대구 요리, 파프리카 필레 요리와 감 젤리 등의 창의적인 요리를 부족함 없이 선보인다.

마테라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소박한 마을 알리아노(Aliano)도 둘러볼 만하다. 1935년 작가이자 의사, 화가였던 카를로 레비(Carlo Levi)의 유배지였던 곳으로, 그는 새하얀 산 위에 안착한 이 마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곳에 묻히길 원했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여행지로는 피스타치오로 유명한 스틸리아노(Stigliano), 시인 로코 스코텔라로(Rocco Scotellaro)의 고향 트리카리코(Tricarico), 유령도시 크라코(Craco), 바실리카타 토종 품종인 마야티카 블랙 올리브로 유명한 아라곤(Aragon) 왕조의 도시 페란디나(Ferrandina) 등이 있다. 독특한 토양 침식 지형으로 잘 알려진 피스티치(Pisticci) 인근의 칼란키(Calanchi)는 오랜 대기의 영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지금의 모습에 이른 로맨틱한 매력이 짙게 흐르는 장소다.

케이틀린의 트렌치 코트는 솔로트레(Solotre), 레이어드한 흰색 망토 드레스는 록(Rokh), 레더 슈즈는 잉크(Eenk). 페넬로페의 케이프형 아우터는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레이어드한 흰색 망토 드레스는 록, 슈즈는 잉크.

근래에 보기 힘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시골 마을을 가로지르다 보면 포텐차(Potenza)에 이르게 된다. ‘수직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이곳은 해발 800m의 고지대에 자리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주도(州都)다. 이탈리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폴리노 국립공원(Parco Nazionale del Pollino)에서는 강, 폭포, 보호구역, 수도원, 컨템퍼러리 예술품까지 모두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관광객이 운집하는 곳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느린 놀이기구일 RB 라이드다. 15분 동안 겨우 한 바퀴 회전하도록 설계된 이 설치물은 벨기에 아티스트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의 작품으로, 느림의 미학과 시간을 삶의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놀이기구는 해발 1,125m에 세워진 벨베데레 팀파 델라 구아르디아(Belvedere Timpa della Guardia) 전망대 꼭대기에 자리하기 때문에 폴리노산맥의 장엄한 풍광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미식가라면 폴리노 국립공원에 있는 루나 로사(Luna Rossa) 레스토랑에서 바실리카타 고대 전통 요리법을 되살린 셰프 페데리코 발리첸티(Federico Valicenti)의 솜씨를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재킷, 스커트, 후드는 알라이아(Alaïa), 앵클 부츠는 알레비(Aleví). 장소는 메타폰토 고고학 공원(Parco Archeologico dell’Area Urbana di Metaponto)이다.

외딴 시골 마을을 지나 이제는 해안의 장관을 만날 차례. 출발지는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보이는 관목성 식물군 마키(Maquis)가 티레니아해의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마라테아(Maratea)다. 작은 만과 만입이 즐비한 해안을 간직한 이 마을의 진정한 상징은 북쪽에 자리한 마라테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으로 교회 44곳이 있는 이 해안 마을의 아름다움은 이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술 애호가라면 라고네그로(Lagonegro)를 여정에 포함시킬 것. 전설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케이틀린의 레이스 드레스는 루이사 스파뇰리(Luisa Spagnoli), 크리스털 세팅 골드 귀고리, 초커, 브레이슬릿은 스와로브스키(Swarovski)의 ‘제마(Gema)’ 컬렉션. 페넬로페의 코튼 레이스 드레스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귀고리와 초커는 스와로브스키의 ‘제마’ 컬렉션. 마테라 출신 레스토랑 경영인 도나토 카사마시마(Donato Casamassima)가 입은 지브라 패턴 코트는 발망(Balmain).

마라테아는 고급 레스토랑의 메카이기도 하다. 모차렐라 트레치아, 카치오카발로 디 마사(달콤하고 향긋한 풍미를 지닌 크리미한 치즈), 코스톨루토 토마토(주름이 많고 울퉁불퉁한 외형의 토마토), 가지의 일종인 질로(Gilò), 캐럽(초콜릿 맛이 나는 지중해산 열매), 케이퍼, 소금에 절인 멸치를 뜻하는 알리치오쿨리(Aliciocculi) 등 다양한 특산물을 보유한 식재료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산타베네레 호텔(Hotel Santavenere)은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에 둘러싸인 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완벽한 에덴동산과 다름없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시간을 초월한 매력, 천혜의 자연경관을 겸비한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지중해의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한다. 1950년대에 어느 귀족의 저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 편안한 매력이 흐르는 고급 호텔로 각광받게 되었다.

케이틀린의 나파 가죽 소재 드레스는 지방시(Givenchy by Sarah Burton), 밑단으로 보이는 스팽글 장식 니트 스커트는 질 샌더(Jil Sander), 화이트 부츠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페넬로페의 볼륨감 있는 트렌치 코트와 러플 스커트는 빅터앤롤프 오뜨 꾸뛰르(Viktor&Rolf Haute Couture), 파이톤 부츠는 메종 마르지엘라. 배경이 된 헤라 신전은 수 세기 동안 로마 바실리카의 일부로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꼭 방문해야 할 마을은 베르날다(Bernalda)다. 기원전 6세기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헤라 신전이 있었으며, 지금은 일부 기둥만 볼 수 있다. 영화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19세기 저택을 개조해 만든 부티크 호텔 팔라초 마르게리타(Palazzo Margherita)에서 머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프랑스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크 그랑주(Jacques Grange)가 우아한 취향을 발휘해 친밀하면서도 세련된 부티크 호텔로 변모했다. 각 스위트룸은 프레스코 벽화와 마욜리카 타일(도자에 화려한 채색과 패턴을 입힌 타일로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후 유럽 전체에서 유행했다), 디자인 가구를 적극 활용해 방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시트러스나무와 아로마 허브, 아담한 수영장이 어우러진 지중해식 정원과 별빛 아래 만끽하는 치네치타 바(Cinecittà Bar)의 칵테일, 코폴라 감독이 직접 고른 영화 등 조용한 안식처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꽤 무궁무진하다.

트윈 룩을 선보인 페넬로페와 케이틀린. 터틀넥 스웨터는 라뇨(Ragno), 치마는 안토니오 마라스(Antonio Marras), 구두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목걸이는 라스피니(Raspini). 원죄의 지하 감옥의 프레스코 벽화가 배경이다.

현지 음식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레스토랑 경영자 출신으로 소믈리에와 미식 블로거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리안젤라 루소(Mariangela Russo)를 찾아갈 것. 2018년부터 베르날다에서 특별한 미식 경험을 제공하며 현지 음식의 진면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대표적인 ‘다이닝 위드 로컬스(Dining with Locals)’ 프로그램은 쿠킹 클래스도, 원 테이블 레스토랑도 아니다. “손님들과 함께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지역 생산자를 만나 ‘맛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해요. 나탈레 가문의 레몬 그라니타와 낙농업자가 만든 신선한 유제품 등 지역 별미를 함께 맛보며 느긋한 산책을 즐기죠. 현지인이 즐겨 모이는 구시가 쪽도 잊지 않고 탐방하고요.” 마리안젤라의 귀띔이다. “이후에는 주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준비한 뒤 다 함께 둘러앉아요. 전형적인 루카니아(남부 이탈리아에 거주했던 라틴 민족) 가족처럼요.” VL

    피처 에디터
    류가영
    Laura Taccari
    사진
    Andrew Jacobs
    스타일리스트
    Luca Galasso
    모델
    Penelope Ternes, Caitlin Soetendal
    헤어
    Dre Sanders
    메이크업
    Michaela Bosch
    프로덕션
    Chill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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