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넘실거리는 점은 네가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우리가 된다

2025.12.19

넘실거리는 점은 네가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우리가 된다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는 호주 원주민 혹은 선주민 출신 예술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 즉 호주의 역사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제의식을 작업의 출발점 혹은 동력으로 삼고 있죠. 특히 서구 중심적인 시각, 단일화된 주류의 역사가 그간 도외시해온 부분과 사유를 본인만의 미술 언어로 복원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내년 2월 15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시선과 재현 방식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신화, 그리고 그 권력적인 구조의 이면을 다루는 신작을 대거 볼 수 있습니다.

보이드 작품의 전매특허는 바로 작업 표면을 뒤덮고 있는 점입니다. 일일이 만들어낸 무수한 점을 두고 작가는 ‘세상을 보는 렌즈’라 표현하죠. 이렇듯 자신만의 특징적인 회화 언어를 가지고, 그는 호주 역사 속에 숨겨지거나 가려진 진실을 발굴합니다. 일례로 이번에 그는 호주 아동들을 위해 1958년에 제작한 학습 만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철저히 유럽 중심적인 서사를 따르는 이 만화는 그와 같은 선주민 혹은 원주민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건 물론이고 잘못 재현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바로 그 부분을 자신의 캔버스에 옮기거나, 아니면 아예 검게 삭제하는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그 땅에 오래 살아온 이들이 이런 식민주의적 유산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탐구하고요.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전시장에서 포착된 다니엘 보이드 작가.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모습.

이번 전시의 제목 ‘피네간의 경야’는 제임스 조이스의 동명 소설에서 차용했습니다. 이 소설은 다양한 형태의 언어로 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 난해하기로 유명하죠. 보이드는 시적인 복합성에 주목하기 위해 소설을 가져옵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위에서 언급한 학습 만화 속 이미지에 등장하는 과거의 인물, 피네간과 같은 이름이 소설을 이끕니다. 만화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호주 대륙에 내해가 있다는 신화를 찾아 나섰습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그는 원주민의 돌봄을 받아 생명을 건지는데, 8개월 후 피네간이라는 인물이 문제의 이 남자를 깨워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 피네간과 만화 속 피네간이 동명이라는 점에 착안한 작가는 자기 자신을 매개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꿈이라 해도 좋을 다양한 시점과 시선의 층을 미술품에 생성합니다.

보이드의 작업은 얼핏 호주 역사에 집중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이 오히려 자신의 역사와 경험으로 개입할 수 있는 풍부한 여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전시장 유리 벽에 특유의 점을 설치했는데요, 햇빛을 받은 점은 바닥에 또 다른 무수한 점을 만들어냅니다. 시간대와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이 점은 벽에 걸린 작품 속 점과 어우러지면서 미세하게 떨리는데, 전시장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한 느낌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원은 중심에서 가장자리까지 언제나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위계가 없는 형태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지요. 작업 표면과 바닥의 점이 넘실거리는 풍경은 바다가 되었다가, 우주 속 원자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내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고, 나와 유무형의 관계를 맺은 타인들이 비치기도 합니다.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모습.

빛으로 증폭되는 움직임, 즉 떨림의 감각은 우리의 발걸음에도, 시선에도, 사유에도 묻어납니다. 작가가 기꺼이 자신의 역사를 탐구해 얻은 이 작업을 통해 진정 의도하고자 한 건 아마도 생면부지의 관람객이 이 표면의 움직임을 활성화하는 풍경일 겁니다. 떨림과 동요를 통해 지금의 시공간, 이 땅과 관계 맺고 있는 점처럼, 우리 역시 조금씩 움직이면서, 시선을 바꿔가면서, 고정관념에 도전하면서, 이 경험을 스스로 꾸려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보이드는 모두가 직선적이고 투명해야 한다는 법칙을 자신의 방식으로, 한 개인과 인간의 복합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고요하게 거스릅니다. 자기 존재에서 출발한 보이드의 작품이 그들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순간, 예술의 힘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모습.
‘Untitled (BCJCVET)’, 2025, Oil, acrylic and archival glue on paper mounted to canvas, 80×80cm
‘Untitled (STGLWOAGLM), Untitled (FWIGSKWIK)’, 2025, Oil, archival glue and screen print on canvas, 29×21cm (each)
‘Untitled (SPAYTOB)’, 2025, Oil, ink and archival glue on paper mounted to board, 30×25cm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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