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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만이 옷을 입힐 수 있다, 패션계가 영화에 발을 들이는 이유

2025.12.30

패션만이 옷을 입힐 수 있다, 패션계가 영화에 발을 들이는 이유

“같은 것은 항체를 만들지 못한다.” 노로바이러스 이야기도, 독감 이야기도 아닙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서사의 위기>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자극적인 이미지와 숏폼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점점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더 빠르고 강한 자극만이 살아남고, 그 속에서 감정은 점점 흐릿해집니다. 패션은 그 ‘감정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뎀나는 구찌 데뷔 컬렉션 ‘라 파밀리아’를 런웨이 대신 단편영화 <더 타이거(The Tiger)>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영화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크레디트에 올랐죠. 데미 무어가 주연을 맡고, 스파이크 존즈와 할리나 레인이 공동 연출했습니다. 단순히 이미지를 늘어놓은 패션 필름을 넘어 캐릭터에 감정과 서사를 부여한 시도였습니다. 데미 무어는 단지 구찌 옷을 입은 스타가 아닌,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했죠. 관객은 그 인물의 선택과 갈등을 통해 구찌의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Courtesy of Gucci

정체성에서 캐릭터로, 캐릭터에서 감정으로

2025년 3월, 당시 구찌의 CEO 프란체스카 벨레티니는 “구찌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창의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언급했습니다. 패션계를 벗어나더라도, 자주 언급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정체성’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국적, 젠더, 계급, 세대, 취향까지. 정체성은 이젠 카테고리에 끼워 넣지 않고 해시태그처럼 생성됩니다. #성별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이 흐름에서 패션 브랜드는 단순히 옷을 입히는 것을 넘어, 그 정체성에 말을 붙이고, 감정을 부여하며, 움직이게 합니다. 뎀나는 그 과정을 캐릭터로 끌어올렸고, 영화로 구현했습니다. 룩북이나 SNS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던 감정의 여백, 관계의 흐름, 선택의 이유가 생겼죠.

Gucci 2026 S/S RTW
Courtesy of Gucci
Gucci 2026 S/S RTW
Courtesy of Gucci

왜 지금, 왜 영화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지금 패션계가 직면한 상황을 먼저 들여다봐야 합니다. 수많은 브랜드가 난립하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교체가 브랜드 아이템보다 더 큰 뉴스가 되며, 이미지 언어는 더 빠르게 소비됩니다. 소비자는 그 브랜드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구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스토리, 서사, 캐릭터가 필요합니다.

광고는 유명인의 이미지를 ‘빌려 쓰는’ 콘텐츠입니다. 반면 영화는 브랜드가 직접 세계관을 만들고, 인물을 창조하고, 그 인물이 브랜드를 대신 말하게 하는 매체입니다. 옷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옷을 입은 캐릭터가 브랜드의 진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대입니다.

Courtesy of Miu Miu

패션도 비껴갈 수 없는 양극화

지금 미디어 시장은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한쪽은 짧고 자극적인 숏폼, 다른 쪽은 느리지만 깊게 남는 웰메이드 콘텐츠입니다. SNS 콘텐츠는 확산이 빠르지만, 피로도도 빠르게 쌓이고 금세 잊힙니다. 반면 영화는 긴 시간 감정을 구축하고, 세계관을 차곡차곡 설계할 수 있습니다.

<보그 비즈니스>는 올해 5월, “패션 브랜드가 단순히 스토리텔링을 넘어서, 감각적 자산이자 문화적 유산으로 남을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생 로랑은 꾸준히 자체 영화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으며, 프라다와 미우미우는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과의 협업을 확대하며 브랜드 고유의 정서를 장기적으로 쌓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LVMH 그룹은 영화, TV, 오디오 콘텐츠를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 사업부 ‘22 몽테뉴 엔터테인먼트(22 Montaigne Entertainment)’를 출범하며, 영상 기반의 브랜드 서사 확장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Courtesy of LVMH

이 흐름은 단지 트렌드가 아닙니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하나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전략적 이동입니다. 단순히 로고를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소비자의 감정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브랜드는 이제 직접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며, 감정을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패션만이 옷을 입힐 수 있다

패션이 영화로 향하는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원래 옷으로 캐릭터를 판단해왔고, 옷은 말보다 먼저 사람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영화는 가장 종합적인 스토리텔링 형식이지만, 그 안에서 캐릭터를 입히는 일은 오직 패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정체성이 중요한 시대, 그 정체성에 옷을 입힐 수 있는 산업은 패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옷이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세계관 속에서 관계를 맺게 하려면, 영화는 최적의 포맷입니다. 브랜드가 자기 언어로 캐릭터를 만들고, 캐릭터를 통해 감정을 설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패션이 영화에 눈독 들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다음은?

물론 지금 모든 브랜드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리스크도 분명 존재합니다. 감독의 정치적 입장, 배우의 논란, 흥행 실패 등은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는 더 주도적으로, 더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라는 언어를 익히고 있습니다. 브랜드의 이야기를 남의 입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전환의 시기입니다. 럭셔리 하우스들은 정체성을 캐릭터로, 캐릭터를 감정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영화가 있습니다. 단발성 콘텐츠로는 더 이상 ‘항체’를 만들 수 없는 시대, 영화는 감정이 남고 경험이 축적되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도 한때의 유행에 지날까요? 패션이 영화 말고 다른 매체를 선택하게 될까요? 혹은 다시 런웨이로만 말하자는 순수의 시대로 돌아오게 될까요?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패션과 영화는 많은 공을 들여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포토
Courtesy of Gucci, Miu Miu, LV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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