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그 관습은 제발 멈춰주세요
경쟁적으로 치는 영화제의 기립박수부터 독자를 유아적 소비자로 보는 추천사, 착한 총공의 피로까지, 이제 사라지길 바라는 관습을 말하다. 해진 자리마다 새날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책들의 아우성
독자를 수동화하고 간섭하는 띠지의 범람에서 내 고유한 판단을 찾아가야 한다.
오늘도 서점의 책들은 조용히 누워 있다. 독자의 눈길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누군가의 손이 스치기 전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듯 긴 기면증을 견뎌야 한다. 한 걸음 책들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제야 우리는 그런 풍경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누가 ‘책들의 무덤’이라고 했나. 이 아이들처럼 시끄러운 존재는 없다. 모두가 형형색색 띠지에 온갖 문구를 박고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소리친다. 시인이 느낀 ‘소리 없는 아우성’은 어떤 말보다 더 위대한 침묵이었고, 말없이 나부끼는 깃발은 고고한 이상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오늘 서점에서 만나는 아우성은 레드오션에 빠져 죽지 않으려는 책들의 필사적인 투쟁이다.
전 서점 베스트셀러, 올해의 책 선정, ○○문학상 수상, 언론의 극찬··· 이 문구들은 보통 월계관 표식을 붙이고 있다. 승리자의 영예를 아직 얻지 못한 책들은 그 자리를 종종 추천자의 이름으로 채운다. 나는 추천자 이름이 7개까지 나열된 띠지를 본 적도 있다. 책을 받아보고 얼굴이 뜨뜻해졌을 추천자들이 떠오른다. 버려진 선거 포스터를 보는 듯한 느낌의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자발적으로 제공한 것이 아니다. 책의 추천사는 원래 선배 또는 전문가의 정성 어린 상찬이었고, 그들의 글에서 뽑아낸 반짝이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소정의 추천료를 받고 이름을 빌려주는 요식행위가 되었으며, 대부분 사적 연고를 마다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띠지는 하드커버를 보호하는 재킷에서 출발했고, 재킷은 많은 정보를 담지 못하는 하드커버를 대신해 긴요한 정보를 담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기모노의 ‘오비’를 본떠 넓은 허리띠처럼 포장재를 하나 더 붙이면서 일시적인 정보 전달이나 홍보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일본과 한국 외에 다른 나라 책에서 띠지를 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띠지는 출생의 비밀에서 벗어나 그 기능을 더 부풀리는 중이다. 홍보 마케팅 용도는 물론이고 이제는 디자인 역할까지 맡는다. 책을 “그 자체로 완성된 도구”라고 말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해야 한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책의 물성을 넘어서기 위해 띠지라는 물성을 디자인 요소로 이용한 ‘어깨띠지’ ‘반띠지’도 등장했다. 이 띠지는 표지와 마찬가지로 버리기도 주저되어 독자는 책 읽는 내내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띠지, 추천사, 서평, 보도 자료는 책을 알리는 최초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그 소명을 다했거나 차츰 기능이 반감되는 중이다. 정보의 포화는 정보 부족과 다르지 않다. 너무 많은 것을 쏟아내는 강사에게서는 뭘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선생과 강사는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순수한 열의를 버리지 못한다. 독자보다 책이 더 많은 시대의 출판사들도 애타는 마음으로 오늘도 띠지를 두르고, 추천사를 의뢰하고, 카드 뉴스를 제작하고, 장문의 보도 자료를 쓴다.
핑곗거리는 많다. 신문의 서평 지면은 대폭 줄었거나 아예 사라졌고, 광고를 한다 해도 비용을 건지는 경우가 드물다. 고작해야 대형 서점 판매대를 돈으로 확보하는 방법뿐인데, 서점에 오는 독자가 아예 없으니 책들은 시골 터미널의 누렁이처럼 하품을 하며 간혹 오가는 여행객을 쳐다볼 뿐이다.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러나 책은 더 안 팔리고 그만큼 신간을 자꾸 내서 판매량을 채워야 하는 출판사는 무수히 쏟아지는 신간 틈에서 어떻게든 ‘발견성’을 높이기 위해 고심한다. 하지만 그 수단이라야 고작해야 띠지, 추천사, 보도 자료, SNS 홍보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짜증이 나는 걸까.
포화와 정체라는 과잉생산 시대의 경제 이론처럼 우리는 정보와 감정의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저 마케팅 방식에 조금은 질렸다. 감동을 삭이기도 전에 앞질러 박수를 치는 연주회장의 ‘안다 박수’ 무리들처럼 추천사, 주례사식 서평, 띠지는 우리를 김새게 만든다. 홍보인지 광고인지 서평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책 소개 문구를 우리는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다. 책들은 출판과 독서 문화의 긴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여전히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쓰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보았던 것처럼 책의 본질 외에 추가되는 모든 것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에서 스스로 나만의 의미를 발굴하고 싶고, 나의 저울로 책의 무게를 직접 달아보고 싶은 것이다.
홍보 또는 마케팅을 이유로 책과 작가를 대중 앞에서 흔들어 파는 방식은 책에 어울리지 않는다. ‘독자’라 불리는 이들은 여느 상품의 소비자와 좀 다른 데가 있다. 그들은 신중하고 잘 흔들리지 않으며, 독립적이다. 사람들은 최악의 선물로 책을 꼽곤 하는데, 내게 필요치 않은 책만큼 처치 곤란한 물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책 마케팅에는 심지어 ‘어리석은 대중’의 신화 또는 모든 것을 다 떠먹여주어야 한다는 ‘유아적 소비자’의 시각까지 엿보인다. 독자를 수동화하고 간섭하는 방식은 역작용으로 이어지기 쉽다. 우리는 수상 내역과 추천자를 보고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판단으로 나만의 필요성 때문에 사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띠지나 추천사에 개의치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띠지가 넘치고 온갖 책에 같은 추천자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불안하고 자신 없는 독자가 아직 많다는 증거일까? 우리는 더 읽어야 한다. 그런 경험이 없어 불안한 수요자와 이들을 낚으려는 공급자의 합작이 빚어내는 결과는 질 낮은 콘텐츠의 범람이다. 우리는 지금 건전하고 수준 높은 비평 문화의 부재, 수요자가 스스로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공간의 축소, 의사소통과 정보 전달의 일방화 및 단순화, 유튜브나 숏폼식의 콘텐츠 범람을 그 청구서로 받아 들고 있는 셈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기립박수의 슬픔
영화제에서 박수는 더 이상 찬사의 표시가 아니라 기묘한 경쟁이다. 장례식장의 캐스터네츠처럼.
베니스나 칸 영화제에서 작품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기쁨에 찬 관객이 박수를 친다. 오래, 아주 오래. 이 시간 동안 영화는 존엄성을 잃는다. 우리가 끊임없는 기립박수 경쟁의 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즐거움에 손뼉을 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케팅에 써먹는 측정법이 되어버렸고, 비평가와 기자, 배급자의 기립박수 시간은 로튼 토마토 평가처럼 언급된다. “칸에서 12분간 기립박수”라는 말이 곧 수상의 영광을 누릴 거란 뜻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으레 그렇듯이 그런 예측은 왜곡에 취약하다.
박수는 더 이상 박수가 아니다. 그것은 스파르타쿠스를 좌절시키며 로마의 승리를 외치는 크라수스다. 전리품을 과장해서 드러내는 구경거리다. 한때는 상찬을 표현하는 잠깐의 몸짓이었는데, 이제 어깨 회전근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장이 되었다. 기립박수는 관람을 마무리 짓는 일이 아니라 메인 이벤트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면 예식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 친다. 신경쇠약을 동반하는 드럼 서클에 참가하는 것처럼 좌석에 앉지 않는다. 박수를 멈추지 않는다. 이상한 약을 복용한 채 뮤지컬 영화의 대부인 버스비 버클리의 안무를 추는 것만 같다. 202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우리는 <힌드의 목소리> 프리미어 상영이 끝난 뒤 23분이라는 기록적 박수를 쳤다. 박수를 치고 멈출 타이밍은 누가 정하나? 누가 박수를 끝낼 것인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의학적으로도 위험할 텐데 말이다. 그렇게 손뼉 치는 종교적 의식이 12분간 이어질 때쯤이면 더 이상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이제 제발 그만해달라고 사정하는 몸짓이 된다.
그렇게 박수를 치는 와중에 배우들은 옴짝달싹 못한다.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목례를 해야 하나? 뭘 하든지 앉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떤 에티켓을 따라야 하는지는 불투명하고, 아주 약간은 종교적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모두 견뎌야 하는 일이다. 올해 <프랑켄슈타인>(2025) 상영 후 기립박수는 멀쑥한 호주 스타를 울먹이게 했다. 제이콥 엘로디(Jacob Elordi)의 광대뼈가 눈물에 젖어 빛난다. 기쁨의 눈물? 혹은 연습한 표정이 다 떨어진 걸까?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겸손을 표하고 경건하게 감사를 전하면서, 다른 배우들과 감독들도 공모자라는 듯이 그들에게 눈빛을 보낸다. 누가 그를 욕하겠는가? 베니스 영화관 레드 카펫이라는 배경 아래 보톡스를 맞은 이방인 무리가 화려한 차림으로 박수갈채를 보내는 모습은 거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 나올 법하다.
당연하게도 그건 제이콥 탓도, 영화 탓도 아니다. 지금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기립박수도 콘텐츠가 되었다. “<블론드>가 베니스에서 14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브루탈리스트>가 13분간 기립박수를 받으며 첫 상영을 마무리했다.” “절인 생선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은근한 메타포를 향해 12분 30초 동안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실제 반응과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남들 따라 보내는 찬사이자 문화적 가치를 가늠하는 이상하고도 새로운 척도가 되어버렸다.
평론가와 관객의 취향이 갈수록 동떨어지고 있으니 박수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도 궁금해진다. 장시간 기립박수는 현재 일어나는 문화 현상이지만 흥행과는 당연히 상관없다. <페이퍼 보이: 사형수의 편지>는 칸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했을 때 15분간 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성공을 약속받은 듯했다. 하지만 예산의 절반만 겨우 만회했다. 가끔 확실하게 박수 받을 만한 경우도 있다. 2025 베니스영화제에서 드웨인 존슨에게 15분간 박수갈채가 쏟아졌는데, 팝콘 영화배우로 인식되던 그가 신랄하고도 멋진 작품 <더 스매싱 머신>에 출연하며 수척해진(그래도 여전히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했기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반응이었다.
최근에는 사회운동마저 마케팅 전략에 깊이 잠겨 있기에 기립박수는 더 혼탁해졌다. 영화를 잘 만들어서 치하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대의명분 덕분에도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탈식민적 의식, 냉랭한 젠더 갈등의 고통.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들 따라야만 하는 도덕이 되어버렸다. 대의명분과 관련해선 강박적으로 환호해야 할 것만 같다. 불평등에 관한 영화에 15분간 박수를 치면 좀 부족한가? 먼저 손을 내리면 불경한 걸까?
기립박수는 군비경쟁처럼 더 극심하게 치닫는다. 처음으로 박수를 멈추는 사람이 되길 두려워하는 박수꾼들의 경직된 양상이 펼쳐진다. 집단적 의무가 되어 서로서로 눈치 보는 굴레에 갇힌 박수는 1분이라도 길다. 박수를 처음 멈춘 죄로 수용소에 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감정과 동떨어진 몸짓, 집단적 의무감에서 비롯하는 행동은 믿지도 않는 종교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과 같다. 그저 무지성 상태에 이를 뿐이다. 바이런 하우데이어(Byron Houdayer) 칼럼니스트
기계가 아닌 영혼을 위한 식탁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방문은 한 편의 공연 관람과 같다. 관객과의 소통 없이 외운 대사를 읊는 연기는 필요 없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보낸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분위기와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레스토랑이다. 후자가 없다면 그건 맛있는 배달 음식일 것이다. 서비스 좋다고 정평이 난 레스토랑은 방문하기 전부터 살짝 흥분되기까지 한다. 더 맛있는 음식에 좀 더 비싼 값을 내는 것과 달리 아직까지는 더 좋은 서비스에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정서가 확립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상된 서비스가 맛있는 음식 못지않은 큰 부가가치가 되는 건 요리 선진국에서 이미 증명된 가치다.
일반 대중식당과 달리 ‘파인다이닝’이라고 분류되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다. 흰색 테이블보, 로맨틱한 촛불, 멀리 오픈 키친을 통해 보이는, 무용하는 것 같은 셰프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핑크빛 실루엣을 제공한다. 이런 파인다이닝의 공통점 중 하나가 메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다. 일반 식당에서 음식 제목만 적어놓은 것과 달리 재료의 산지나 생산자, 조리 방식, 곁들이는 소스 등에 관한 설명이 제목 밑에 작은 글씨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코스 메뉴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코스 하나가 나올 때마다 직원들의 상세한 구두 설명이 동반된다. 손님 입장에서는 음식 자체뿐 아니라 셰프의 요리 방향이나 철학을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문제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합한 응대와 상황에 맞는 설명을 하기보다는 그저 연습한 대로 외워서 읊는다는 점이다. 아무 영혼 없이, 로봇처럼 “얼마나 귀하고 좋은 재료를 구했고, 오랜 과정을 거쳐 조리했으며, 그 결과로 이렇게 예쁜 음식이 제공되고 있다”고 주절주절 설명을 나열할 뿐이다. 자주 방문해 메뉴를 잘 알고 있는 단골손님에게도, 심지어는 과거 그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선배에게도 똑같은 설명을 되풀이할 뿐이다. 직원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웅얼거려서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다가 “셰프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신···” 하는 대목에서는 살짝 짜증도 난다. 손님 앞에서 셰프님을 존대하는 어법도 맞지 않고, 셰프라면 당연히 매 순간 그런 마음으로 조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뱀에게 필요 없는 발, ‘사족(蛇足)’이다.
외식산업 관계자, 또는 음식에 관심이 많아 특별히 물어보는 손님에게는 당연히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또 이들 대부분은 경청한다. 하지만 많은 이가 그저 예의상 설명을 들어주는 척한다. 심지어 직원이 메뉴를 열심히 설명하는 내내 눈길도 안 주고 듣는 척도 안 하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손님도 꽤 많다. 이런 손님이라면 짧게 설명하고 자리를 떠나는 편이 서로에게 쾌적하다. 그런 면에서는 일식집의 스시 카운터가 좋은 표본일 것이다. 어디서 잡은 어떤 생선인지만 간단히 설명하고, 혹시 더 관심 있는 손님이라면 상세한 설명을 부연하면 된다. 손님도 바쁘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음식이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그래서 음식 설명은 메뉴판에 기록해놓고 꼭 필요하거나 다시 묻는 손님에게만 덧붙이면 된다. 그보다는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좋은 시간을 보내는지 수시로 살피면서 그때그때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이, 그리고 그 서비스의 격을 높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해 보인다. 소중한 것은 환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연극 무대와 같다. 직원은 배우, 고객은 관객, 주방은 무대, 음식과 디자인은 소품, 대화는 서비스다. 영업 시작 전에 홀과 주방 상태를 프랑스어로 ‘미장 플라스(Mise en Place)’라고 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위치하는 완벽한 준비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레스토랑에서 영업을 위해 문을 열기 직전, 셰프는 “문이 열렸다(La maison est ouvert)!”고 외친다. 연극에서 막이 올라가기 직전 무대감독의 외침과 같다. 그러므로 레스토랑 방문은 한 편의 좋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 되어야 한다. 배우가 극 중 전개와 무대 분위기, 관객과 소통 없이 외운 대로 대사를 읊는다면 좋은 연기라 할 수 없다. 당연히 공연의 만족도도 떨어진다. 고객은 각각 다른 경험을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객이 비일상적 체험을 할 수 있게, 고객 한 명 한 명의 취향과 상황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레스토랑 입장에서의 매뉴얼이 아니라 고객 입장에서 필요하고, 원하고,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고려할 때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수교’란 수식을 단 전시
공적 예술 지원의 명분을 노린 지원금 사냥꾼들이 ‘수교 전시’를 연달아 열고 있다. 이미 2027년 수교 국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유료 전시의 치트 키다. 매끈한 곡선, 홀릴 듯 세련된 미녀, 식물과 문양의 조화로 완성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은 둘째 치더라도 인생의 고비마다 그가 발휘한 기지와 열정은 충분한 얘깃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무하의 전시를 보고 온 대학 동창들은 스타 도슨트의 심금 울리는 이야기까지 듣는 바람에 전시장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했다. 그림이든 사연이든 아무리 아름다움이 넘실댄다지만 지난해 서울에서만 무하의 전시가 몇 차례 열렸는지 모른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강남구 삼성역에서 선보인 전시가 지난 9월부터 12월까지 마곡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11월부터 오는 3월까지 여의도 더현대 서울 알트원에서도 또 다른 전시 <알폰스 무하: 빛과 꿈(Alphonse Mucha: The Artist as Visionary)>이 개막한 것이다. 다만 이 전시에는 ‘한국-체코 수교 35주년 기념’이란 수식이 더 붙었다. 이는 단지 한 작가의 그림을 쭉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체코가 사랑한 예술인을 조망하고 현지에서도 한자리에 보기 어려운 대표작을 입체적으로 톺아볼 수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더 나아가 보는 이에게 우리나라와 특정 국가의 관계를 확인하며 역사의 한 장면을 목도하는 의미까지 선사한다.
지금 서울 강남의 가로등 배너를 뒤덮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대표작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년경)도 ‘수교’와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을 필두로 1860년대 파리에서 만나 평생 예술적 교류를 이어간 두 거장 폴 세잔과 르누아르의 작품을 모아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절찬리에 진행되는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 역시 ‘2026 한불 수교 140주년’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이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조화로운 표현을 완성한 르누아르와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추구한 세잔을 한꺼번에 보여주기 위해 긴 시간 심혈을 기울인 전시는 ‘수교 기념’이란 명분을 앞세워 문턱 높은 두 미술관을 설득했고, 주한프랑스대사관의 협력까지 얻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맺은 교제’를 기념하는 전시는 한 해에만 수십 건이 열린다. 딱 100년, 200년만 기리는 게 아니라 10년 주기 혹은 5년 주기로 마음껏 이 ‘수교’란 타이틀을 사용할 수 있으니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의 경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시가 마련되는 데다 최근엔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나라를 소개하는 전시까지 봇물이 터지고 있다. 분명하게 카운트할 수 있는 국내 전시 외에 외국 곳곳에서 개최되는 전시까지 세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한 해 몇백 건에 이르는 전시가 열릴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폰스 무하나 프랑스 미술관 특별전은 그나마 탄탄한 자본에 이미 검증된 작품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구성이지만, 적지 않은 수교 전시가 규모도 작고 형식에만 그친다는 사실은 문제다. 실제로 국공립 기관을 드나들다 공간 한쪽에 조촐하게 마련된 수교 기념전을 발견할 때가 있으며, 국내를 벗어나 외국 도시에서 어떤 정보도 없이 구현된 전시를 마주치는 예도 있다. 유럽이나 미주의 큰 미술 행사를 취재하다 뜻밖의 장소에서 현수막에 적힌 ‘Korea’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가 관계자도 없이 허술한 구성으로 꾸린 전시를 본 경험이 더러 있다. 그럴 때면 공연히 부끄러운 데다 화까지 나는 건 이들 전시 대부분이 지원금 등 정부 혜택을 받은 경우란 사실이다. 분명한 신념이 있어 자신들의 자본으로 전시를 열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나. 그러나 지원 공모에 적합한 레퍼토리로 뽑혀 이름만 앞세우고 혈세를 낭비하는 수교전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공적 예술 지원이 중시하는 명분을 콕콕 집어 기금을 따내고야 마는 지원금 사냥꾼들은 새해가 막 시작된 지금, 이미 2027년 수교 국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 나라의 적당한 관련자들과 공모해 알맞은 기획을 잡고 우리나라 작가 몇 명과 해당 국가 작가 몇 명이 교류하는 전시를 구성하기 십상이다. 그들로선 뻔히 받을 수 있는 돈을 굳이 안 받을 이유가 있나 싶을 것이고 적절한 레퍼토리라면 가까운 작가들과 외국 여행도 하고 색다른 이력도 추가할 수 있으니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아닌가. 한 기획자는 말한다. “‘수교’를 내세운 전시는 국제 교류에서 가장 보기 좋은 형태로 명분까지 담보되므로 지원금을 획득하기 매우 수월하다. 게다가 외국에서 전시하면 현장 평가도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친한 작가들과 편하게 전시하고 보고서만 잘 작성하면 되니 그야말로 꿀이다.”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를 시작으로 올해 서울에선 한국과 프랑스 양국 간 우정과 협력을 다지는 많은 전시가 진행될 것이다. 수도권 외에 진주, 나주 등 지방자치단체까지 프랑스와의 교류 증진 사업에 예산을 쏟는다.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기념전도 예외 없이 개최될 것이다. 외교부를 비롯해 각국 대한민국 대사관 등 홈페이지엔 이미 관련 소식이 빼곡히 게재돼 있다. 한데 이 정보만으론 어떤 것이 내실 있는 것이며 무엇이 급급하게 형식만 갖춘 건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규모가 작다고 섣불리 의미 없는 것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수교’로 치장한 전시가 본질적 가치를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배보다 배꼽이 커지거나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행정은 이제 부디 개선되면 좋겠다. 정일주 <퍼블릭아트> 편집장
침묵의 예식
클래식에 진심으로 반응하기보다 엄격한 품위의 수행자가 돼버렸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우리들은 ‘음악’과 함께 ‘침묵의 예식’을 치른다. 연주를 깨는 기침은 인내로 누르고, 거친 숨소리는 의식적으로 박자에 맞춘다. 악장이 끝나도 손뼉은 허벅지를 떠나지 못한다. ‘박수는 모든 악장이 끝난 후 맨 마지막에 치는 것’이란 원칙은 언젠가부터 교양의 상징이자 공연장의 매너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침묵의 예식은 클래식의 오래된 전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궁정에서 귀족들이 오페라를 보면서 먹고 떠들기도 했고,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한 악장이 끝나자마자 환호성이 나오면 연주자가 다시 그 악장을 앙코르하기도 했다. 관객은 감동하면 소리쳤고, 마음이 동하면 박수를 쳤다. 그게 인간의 본성과 더 맞닿아 있었다.
지금처럼 악장 사이에 박수 치지 않는 규칙은 바그너, 브람스 이후 “예술은 숭고하며, 침묵 속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엄숙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다. 음악이 살롱을 떠나 신전의 제단 위로 올라가면서, 감탄은 억제되고 침묵은 미덕이 된 것이다. 감동은 즉각적 반응이 아니라 숙성된 태도가 되었고, 관객은 청취자가 아니라 품위의 수행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클래식 역사상 ‘낭만주의’의 싹이 움틀 때였다.
기침 자제, 조용히 숨쉬기 등과 같은 매너는 20세기 중반부터 음반사가 공연 실황을 녹음해 음반으로 내려고 공연 중 ‘완벽한 무소음’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면서 생겼다. 관객에게 다소곳이 앉아 수련회 같은 집중을 요구하는 것도 빅토리아 시대 이후의 유산이다.
침묵의 예식이 가장 극대화된 무대가 바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다. 모차르트와 카라얀의 고향이 보여주는 음악적 권위와 명성은 공연 전 대축제 극장의 분위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로 이 극장에서 빈 필하모닉과 최정상 마에스트로가 만나 고귀한 공연을 펼치는데, 관객의 드레스, 시선, 자세, 박수 타이밍 등은 하나의 미학적 규율처럼 맞춰져 있다. 악장 사이 박수는 ‘실례(Excuse)’가 아니라 ‘사고(Accident)’이며, 격한 감탄보다 자제가 더 높은 가치로 취급된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시작되기까지의 여운과 정적마저 ‘품격’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다. 이곳에서 박수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매너의 매뉴얼 중 하나인 셈이다.
같은 레퍼토리의 클래식 페스티벌이라 할지라도 런던의 BBC 프롬스에 가면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 홀의 스탠딩 존에서 관객은 맥주를 마시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심지어 어떤 곡은 격한 환호와 함성을 동반한 떼창을 대동한다. 누구나 예술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BBC 프롬스의 기본 취지에 부합하듯 공연장의 분위기는 거의 록 페스티벌을 방불케 한다. 음악은 단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며, 감동이 틀에 짜인 예식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수렴하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세계가 충돌하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 안에서 공존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둘 다 클래식을 대하는 옳은 태도일 수 있고, 동시에 둘 다 지나치다고 여길 수 있다. 공연하는 장소마다 관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눈치로 저울질한다. 도대체 박수를 언제 쳐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박수를 치는지.
요즘 지휘자들 가운데는 이런 경계를 일부러 흔드는 이들이 있다.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은 “어떤 순간이든 감동했으면 박수 쳐도 된다”고 말한다. 야닉 네제 세갱(Yannick Nezet Seguin) 역시 악장 사이의 반응을 자연스러운 ‘음악적 호흡’으로 받아들인다. 테오도르 쿠렌치스(Teodor Currentzis)는 객석을 거의 종교 집회처럼 만들어버리며, 음악의 경계를 공연장 밖까지 확장한다. 그들에게 박수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진심의 체온이다.
간혹 공연장에서 눈치와 시선이 오가며 시간차로 박수가 터질 때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음악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잘 듣는 관객’을 연기하러 온 것인가? 돌이켜보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침묵은 품격과 허영의 경계 어딘가에 있고, BBC 프롬스의 함성은 표현의 자유와 과잉 행동 사이에 있다. 어느 쪽이든 순수한 박수라고 하긴 어려우며, 일종의 연출된 태도이자 퍼포먼스이며, 사회적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은 음악이라는 자연적 감화의 토양에서 꽃피는 영혼의 예술이라는 것. 박수는 경연이 아니고, 숨소리는 도덕이 아니며, 기립은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박수 칠 때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진심으로 감동했는가? 아니면 감동한 사람처럼 굴고 있는가?’ ‘내 박수는 반응인가, 수행인가?’ 이진섭 <아르떼> 객원 기자
착한 총공의 피로
K-팝 팬들의 선한 영향력, 기부 릴레이가 따뜻하다. 하지만 선행이 스펙과 재무제표가 돼버리며 경쟁적 이타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 자 ‘선한 영향력 일간 차트’ 1위는 아이돌 그룹 A의 ○○ 팬덤이 차지했다. 데뷔 7주년을 맞아 7,000만원을 기부했는데, 이로써 아이돌 그룹 B의 △△ 팬덤이 데뷔 2,500일맞이 기부금 2,500만원을 가뿐히 제쳤다는 속보다. 2위로 △△ 팬덤은 “연말 시상식 전까지 반드시 누적 1억 타이틀을 탈환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는 후문이다.
이것은 가상의 기사다. 조금 과장했지만 낯설진 않다. K-팝 문화에서 ‘선한 영향력’은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덕분에 선함에 대한 경쟁도 벌어진다. 기부금 영수증은 이제 선행의 로튼 토마토 지수처럼 언급된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팬들은 아이돌 그룹의 음악과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길 원했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오랫동안 친절하지 않았다. 차트 상위권에 들어가면 인정받을까 싶어 ‘총공(총공격)’을 해도 음악적 성과가 아니라 총공이라는 팬 문화를 걸고 넘어졌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선한 영향력, 기부 릴레이다.
팬덤이 착한 일을 하자 미디어는 팬덤의 선한 영향력을 치켜세웠다. 칭찬은 팬덤도 춤추게 한다. 처음엔 모두가 즐거웠다. 하지만 춤도 과격해지면 민폐가 된다. 그렇게 선한 영향력은 영향력 차트로 진화했다. 기부액은 음반 판매량과 같은 뜻으로, 기부처의 다양성은 컨셉 포토처럼 변했다. 산업의 일부가 되었고, 경쟁의 다이너마이트가 되었다. 우리 가수의 이름으로 이렇게나 착한 일을 했다는 ‘인증’이야말로 팬덤의 중요한 ‘실적’ 중 하나다.
오해는 말자. 선한 영향력 자체가 나쁠 리 없다. 왜 나쁘겠는가! 팬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좋은 일에 보태는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한 행위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스타의 생일에 명품 백을 선물하는 대신 그 이름으로 숲을 만들고, 저개발 국가의 아이들을 돕고, 물 부족 국가에 우물을 파고, 멸종 위기 동물을 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돌 팬덤의 집단행동은 실제로 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불의의 재난을 구호하는 포클레인이 된다. 박수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이 고귀한 선함이 경쟁의 도구가 될 때 생긴다. 순수한 마음은 어느새 ‘우리는 누구보다 도덕적이며, 그 증거는 바로 이 영수증’이라는 식의 경쟁적 이타주의(Competitive Altruism)라는 기괴함으로 변질된다. 경쟁적 이타주의는 길버트 로버츠(Gilbert Roberts)가 1998년에 제안한 용어로, 이타적 행동이 공작의 꼬리처럼 자원과 능력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신호가 된다는 뜻이다. 선한 영향력은 결국 특정 팬덤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장려된다. 우리는 이렇게 큰돈을 기부할 여력(자본)과 의식(선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며 미디어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는다. 그리고 이 평판은 마침내 장기 보상(사회적 영향력과 내부 결속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팬덤도 피로하게 만든다. “생일 모금, 데뷔 기념일 모금, 연말 불우 이웃 돕기 모금, 1년에 몇 번씩 팬덤 세금 내는 신세” 혹은 “학생 팬들에겐 1만원, 2만원도 부담인데, ‘커피 한 잔 값 아껴서 기부하자’는 말 들으면 현타 온다”는 반응은 기부가 나쁘지 않지만, 기부 자체가 부담스러워지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 기묘한 선행 올림픽의 중계자이자 심판은 두말할 것 없이 미디어다. “○○ 팬클럽, 산불 피해에 6억원 기부··· 연예인 팬덤 중 최고액” “○○ 팬덤, 또 기부?··· 그들의 선행은 어디까지” “선한 영향력도 톱클래스··· ○○ 팬덤, 올해도 계속되는 ‘기부 천사’ 행보(종합)” “0월 0일 ○○ 아티스트 생일, ○○ 복지 재단에 5,000만원 기부”··· 팬덤이 보도 자료라는 총알을 쏘면 미디어는 속보로 받아쓴다. 본질은 휘발되고 경쟁만 남을 만큼 빠르다. 통 큰 기부, 역대급 스케일, 선행 배틀 같은 자극적인 헤드라인도 빠지지 않는다. 뻔뻔하고 노골적이다. 기부 릴레이라는 표현은 다음 주자가 빨리 배턴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듯 다른 팬덤의 동참을 은근히 압박한다. 미디어에 팬덤의 선한 영향력은 클릭 수를 보장하는 ‘착한 ATM’일 뿐인가? 이 살벌한 배틀그라운드에서 좋은 일은 숙제가 되고, 기부는 총공이 된다. 그 와중에 팬들은 속수무책이다. 모니터 너머로 억 소리 나는 기부금이 오가고, 팬들은 디스토피아 영화의 자동인형처럼 모금을 멈추지 못한다.
미디어가 사회운동마저 마케팅 전략이 된 세계를 움직인다. 속보 경쟁과 정보 범람의 시대에 선한 영향력은 더 혼탁해졌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 100만원을 기부하면 부족한가? 먼저 모금을 멈추면 불경한 팬덤일까?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과 팬 활동의 기쁨이 다른 도덕적 굴레를 동반하고 있다.
잠깐만. 혹시나 해서 반복하지만, 선한 영향력은 좋은 것이다. 숲을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스펙이 되고 미디어의 클릭 수를 위한 가십이 되는 순간, 선함은 뭔가 다른 변종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선함은 경쟁이 아니다. 선함은 그냥 선함이어야 한다. 맙소사, 이 단순한 정의가 왜 이렇게 복잡해졌을까.
팬들은 감정 노동도 부족해 자본 노동까지 해야 한다. 이 사태를 그만두려면 선한 영향력을 부추기는 헤드라인부터 정리하자. 그렇지 않으면 K-팝 팬들은 빙하기를 피해 대륙을 횡단한 매머드 떼처럼 천천히 다른 판으로 이동할 것이다. “돌판에선 몇백만원을 써도 모자랐는데, 야구장에선 50만원으로 VIP 대접을 받네”라는 어느 팬의 기쁨과 슬픔은 농담이 아니라 징후가 될 수 있다. 차우진 음악 평론가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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