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홍은남이 작품에서 패션을 활용하는 법

2026.01.08

홍은남이 작품에서 패션을 활용하는 법

한국에서 패션계와 협업하는 아트 디렉터였던 홍은남은 ‘예술’을 하고자 뉴욕으로 이주했다. 미국 <보그>를 비롯한 미디어와 갤러리의 관심을 받기까지 20여 년 동안 꾸준히 ‘사람과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작품 속 다채로운 패션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심리 게임의 도구다.

뉴욕 작업실에서 작가 홍은남이 즐겨 사용하는 카메라를 들고 있다. 그녀는 스케치한 후 본인이 직접 그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뒤 회화로 옮긴다. 그림 속 인물은 패션이 두드러질 뿐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행위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긴장감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보그> 촬영을 위해 당신을 드러내는 옷을 입길 바랐어요. 선택은 검은 가죽 재킷이군요.

쇼트(Schott)의 이 가죽 재킷을 내 몸의 연장인 것처럼 즐겨 입어요. ‘예술가’로 사는 건 어쩌면 세상과 전쟁을 하는 것 같아요. 옷은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무기인 동시에 나를 보호해주는 장치예요. 지금 이 답변을 쓰는 중에는 밀리터리 재킷을 걸치고 있죠.

패션 스타일을 먼저 물은 이유는 작품에서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등장인물의 태도는 고독하고 나른한데, 그곳에서 패션은 생동감 있고 다채로워요. 상반된 분위기가 묘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당신의 예술 세계에서 패션은 어떤 장치인가요?

패션은 계속 변화하는 정치, 사회적 영향 아래 개개인이 매일매일 몸으로 실천하는 최소 단위의 뭔가예요. 자기를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든, 싸우기 위해서든 혹은 표현하기 위해서든. 패션은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일이기에 흥미롭습니다. 제 그림에서 패션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심리 게임의 도구입니다.

‘Safeway’, 2025, Oil on Linen, 91.4×106.7cm

의상을 설정할 때 참고하는 컬렉션이나 매체가 있나요?

조나단 앤더슨, 피비 파일로, 알레산드로 미켈레, 에디 슬리먼 등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패션쇼와 컬렉션을 시즌마다 참고하죠. 특히 에디 슬리먼의 가죽 라인을 좋아해요. 몇 가지 아이템을 제 그림 속에 그리기도 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정한 캐릭터에 따라 의상을 정합니다. 작업과 관련된 흥미로운 아이디어는 거리 사람들의 일상적인 표현에서 발견되곤 해요.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가발처럼 보이는 짧은 곱슬머리와 패션만 두드러지죠. 표정을 감추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림 속 인물의 행위나 인물 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긴장감에 집중하고 싶어요. 저를 매개체로 그 느낌을 전달하지만 제 그림은 자화상도, 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거든요.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후, 본인이 직접 그 의상을 입고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죠. 그것을 ‘그림화’하고요. 촬영하는 이유는 혹시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한 “카메라 렌즈는 우리 눈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 때문인가요? 또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는 이유가 뭔가요?

시작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는 시도였어요. 판단, 혐오, 불만 같은 여러 감정 없이요. 이 감정이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와 뒤섞이면서 자신을 생각하는 데 영향을 주니까요. 해체하고 싶어요. 그랬을 때 카메라 렌즈 안에서 나에게서 나온 것과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게 재밌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고 헤어가 같더라도 패션이나 포즈를 통해 어떤 계층, 직업군인지 짐작됩니다. ‘Spelling’(2024)에서 플리츠 스커트를 입은 인물은 10대 소녀가 연상되고, 양복 입은 인물이 등장하는 ‘Husbands’(2024)는 말 그대로 중년 남성을 롤플레잉한 듯 보입니다. ‘Performers’(2024)의 인물은 연습용 무용복을 입고 있죠. 여러 계층, 젠더, 연령의 인물을 표현하는 이유는 뭔가요?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 가족, 단체나 국가와 연결돼 있고,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아요. 태어나면서 이미 많은 부분이 정해져 있죠.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 오랫동안 고국의 근현대사가 만들어낸 관계들을 생각했어요. 그 관계의 층은 내가 원하는 사소한 것부터 내가 살고 싶은 이상적인 삶의 모양에 작용하죠. 제 그림의 많은 상황이 나와 바깥세상의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판타지에 대한 것이에요. ‘나’라는 실체에 집중하거나 파고들기보다는 내가 ‘현실(Reality)’이라고 여기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가 흥미로워요.

이민자, 아시아계 예술가, 비주류, 아들을 키우는 엄마 등의 정체성이 작품에 어느 정도 담겨 있나요?

정체성 그 자체에 몰두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 대신 하고자 하는 질문과 관련된 ‘역할’이 필요하죠. 질문은 제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마릴린 먼로 혹은 블론드 가발을 쓴 여인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매달려온 대상이에요. 미국적인, 미국에 의한 뭔가를 표현하고 싶었죠. 왕가위가 <중경삼림>에서 활용했듯 미국 문화 안에서 떠도는 유령 같은 캐릭터로. ‘Aging American Woman Character’는 미국인 남편과 시댁,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부딪치면서 또 다른 형태로 구체화됐어요.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에서의 제나 로우랜즈의 모습으로. 그 유령 같은 존재가 나의 미국인 가족 구성원에도 있고 아이를 통해 만나는 학교 엄마들 사이에도 있었어요. 물론 제 안에도. ‘아름다움’과 ‘늙어감’이 관심사입니다. 새로운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는 시점에서 어떻게 살고 늙고 죽을 것인가를 자주 헤아려요.

‘Mr. Lonely’, 2024, Oil on Linen, 61×45.7cm

1979년 강원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패션 광고대행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했습니다. 당시 패션계와 여러 협업을 진행했는데요. 물질세계의 화려함과 그에 만만치 않은 허상도 목도했겠죠. 그때 경험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 시기의 경험으로 사진에 빠져들었어요. 그렇기에 소중한 과거죠. 사진가,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함께 원하는 ‘한 컷’을 만드는 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릍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당시에는 패션 브랜드와 광고 이미지를 만드는 데 추구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의심할 여지 없이 다분히 서구적 형태를 따랐어요. 한국 문화가 서구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금의 독특한 위치와 연관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돌아보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세팅했던 ‘아름다운’ 것들, 역사적 매락에서 어쩌면 인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인위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아름다움에 대해 늘 곱씹어봅니다.

한 인터뷰에서 “아주 일찍부터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어요. 그럼에도 아트 디렉터라는 상업적인 직업을 가진 이유가 있나요?

‘작가’ 혹은 ‘예술가’가 어떻게 되는지 미스터리였어요. 미대를 졸업해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죠. 그보다 앞서 혼자 독립해 나만의 공간에 살며, 돈을 벌고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어요.

2006년 회사에서 1년간 안식년을 받은 뒤 뉴욕으로 이주해 회화 작업을 시작했죠. 한국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이룬 사회적 위치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는 어떻게 나왔나요? 또 오래 회사 생활을 한 직후여서 창작이란 새로운 리듬에 곧바로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회사 생활의 리듬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의 세팅을 바꾸는 것이 필요했어요. 뉴욕에 와서 전시회도 많이 봤지만 작은 콘서트를 관람하며 인디 밴드에게서 에너지와 영감을 얻었어요. 아티스트를 가깝고도 멀게나마 보고 모방하면서 어떻게 ‘예술가’로 살 것인지 고민했죠. ‘노멀’하지 않은 상황에 부딪히고 자신을 내맡기고 실패하면서.

2006년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했지만 2022년부터 전시가 본격적으로 열려요. 뉴욕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15년의 시간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확실한 기약 없이 작업에 정진할 수 있던 힘은 무엇인가요?

익숙하게 알고 있는 평범한 삶의 모습, 회사 생활의 리듬 혹은 가치를 깨는 것이 과제였어요.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엄습해올 때면 작업에 더 몰두하고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죠. 전시를 열고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의 작업에 만족하고 ‘예술가’로서 삶의 리듬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2006년부터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2023년 한 인터뷰에서 “사람과 관계는 처음부터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주제”라고 말했죠. 그럼에도 초기와 달라진 예술 방향이 있다면요?

맞아요. 주된 관심사는 늘 크고도 작은 인간에 대한 문제들이죠. 앞서 말했듯 급변하는 지금 같은 시대에도 ‘어떻게 살고, 늙고, 죽을 것인가’란 주제를 탐구해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것들을 다른 캐릭터와 이미지로 풀어내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아티스트로서 이루고 싶은 지점이 있나요?

우선 2026년 5월 뉴욕의 갤러리 멘디스 우드 DM(Mendes Wood DM)에서 개인전을 열어요. 많은 사람이 최종 목표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데 지금도 계속 생각 중입니다. 지금으로선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국에서 재미난 전시회를 열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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