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으로 지우는 수행

설사 목적이 없더라도 뭔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매일 아침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우리의 삶도 반복의 연속입니다. 누군가는 쳇바퀴라 표현하지만 저는 수행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우리는 때론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둘리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냅니다. 저는 반려동물과의 슬픈 이별 후에도 다음 날 출근했고, 다른 이들은 더 말 못할 사정을 감춘 채 겉으로는 평범하게 타인을 대합니다. 매일의 삶을 살아낸 공력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반복되는 하루는 수행이라 해도 무리 없을 듯합니다.
수행의 예술을 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지난해 작고한 최병소 작가의 세계는 ‘수행과 물성’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에 인쇄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볼펜이나 연필로 반복적으로 지워나갑니다. 이 수행적 행위를 통해 세상의 시끄러운 잡음을 까맣게 지워내죠. 그 과정에서 신문은 너덜너덜해지는 물성만 남습니다. 그는 1975년 ‘지우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지류 산업 발달로 종이가 두꺼워지자 해지는 질감을 위해 앞면뿐 아니라 뒷면에도 볼펜으로 지워나갑니다. 초창기에는 연필을 썼으나 점차 모나미 153 볼펜을 사용했습니다. 일주일에 100여 개 볼펜이 닳을 만큼 수행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광택이 나는 작품이 있는데, 이는 볼펜으로 지우기 작업을 한 뒤 연필로 덧칠한 결과입니다.



최병소 작가는 생전에 자신의 행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평단이 추측할 따름이죠. 1970~1980년대 신문을 지워나가는 행위를 독재에 대한 항거로 해석하고, 2000년대에는 정보의 과잉과 재생산을 멈추고 그 본질로 다가가려는 목적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심지어 <라이프>나 <뉴욕 타임스> 표제를 선명히 남긴 채 나머지를 볼펜으로 지운 작품에 대해 페로탕 갤러리 관계자는 “작가 나름의 미술적 재치가 아닐까요?”라고 가늠할 뿐입니다.
작가는 해석의 몫을 관람객에게 남겨두었습니다. 끊임없이 지워나가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는 반복되는 하루 외에 또 무엇을 위해 지속적으로 움직일 것인지 질문해봅니다. 전시는 페로탕 서울에서 3월 7일까지 이어집니다.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페로탕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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