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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먼저 보는 영화 ‘폭풍의 언덕’

2026.02.05

패션으로 먼저 보는 영화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작은 아씨들> <스펜서>까지, 지금 가장 뜨거운 영화 의상 디자이너 재클린 듀런이 신작 <폭풍의 언덕>에 수놓은 의상을 통해 말한다. 영화 <바비>에 이어 또다시 마고 로비의 페르소나를 매만진 듀런의 디자인 스토리는 지금까지 공개된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내밀한 소개다.

주인공 캐시(마고 로비)가 입은 새빨간 라텍스 드레스를 비롯해 재클린 듀런이 영화 '폭풍의 언덕'을 위해 디자인한 모든 의상이 개봉에 앞서 이슈가 됐다.

오스카 2회 수상에 빛나는 의상 디자이너 재클린 듀런(Jacqueline Durran)이 신작 <폭풍의 언덕>을 위해 디자인한 옷만큼 영화 의상이 이슈가 된 적이 또 있었을까? 아마 그레타 거윅 감독의 <바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또한 듀런의 작품이다. 그뿐 아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삶을 다룬 <스펜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선보인 샤넬 룩, <작은 아씨들> 자매들의 무도회 드레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에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도전한 로맨틱한 실루엣까지, 전부 듀런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어톤먼트>의 에메랄드 그린 드레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의상 아닐까?) <폭풍의 언덕>을 연출한 에머랄드 펜넬(Emerald Fennell) 감독, 그리고 <바비>로 듀런과 이미 한 차례 협업한 마고 로비(그녀는 <폭풍의 언덕>에서 주인공 캐시 역을 맡았으며 제작자로도 참여했다)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이 영국인을 영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듀런의 이번 작업이 개봉 전부터 이토록 이슈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흐릿한 촬영장 파파라치 컷이 공개되는 순간부터 의상의 시대 고증과 미장센을 둘러싼 온갖 지적과 억측이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펜넬 감독과 마고 로비, 듀런은 의연했다. 영화 <폭풍의 언덕>이 일종의 ‘피버 드림(Fever Dream, 열병을 앓는 중에 꾸는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꿈)’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1950년대 스튜디오 영화 특유의 인공적인 톤과 미장센에 역사적 사실과 화려한 현대적 감각을 적절히 버무려 재해석한 결과다. 일찍이 공개된 예고편이 증명하듯 극 중 캐시는 수수한 하이 웨이스트 드레스를 입고 황야를 헤매는 단정한 갈색 머리 여인이 아니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독일의 전통적인 밀크메이드 코르셋 드레스와 황홀하게 빛나는 글리터 드레스, 엘튼 존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삶을 만끽하는 생동감 넘치는 금발 미녀다. 음울한 히스클리프를 연기하는 제이콥 엘로디, 천사 같은 이사벨라 린튼 역의 앨리슨 올리버, 강단 있는 넬리 딘을 연기한 홍 차우, 그리고 호기심 넘치는 에드거 린튼 역의 샤자드 라티프까지, 출연진 모두 고전을 잘 아는 대중이 지닌 선입견을 전복하는 캐릭터로 활약한다.

발렌타인데이 직전 개봉을 앞두고(한국에서는 2월 11일 개봉한다) 듀런이 영화 의상의 무드보드 일부를 <보그>에 독점 공개했다. 캐시가 신혼 첫날밤에 입은 반투명 드레스부터 커다란 러시아 털모자, 이슈의 중심에 선 라텍스 드레스(실제로는 라텍스가 아니다)까지,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의상, 그리고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폭풍의 언덕>에서 마고 로비가 연기한 캐시의 의상은 총 몇 벌이었나?

레이어드하거나 재활용한 경우까지 캐시를 위해 제작한 의상은 45벌에서 50벌 사이다.

전반적인 의상 무드보드를 소개한다면?

에머랄드 감독과 처음 미팅할 당시 그녀는 이미 1년 넘게 작품을 연구하며 방대한 자료를 구축한 상태였다. 튜더 왕가 복식부터 1950년대 무드, 컨템퍼러리 비주얼까지 모든 게 다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빈티지 티에리 뮈글러와 알렉산더 맥퀸 스타일, 개인적으로 영감을 받은 이미지를 더해 무드보드를 완성했다. 엘리자베스·조지·빅토리아 시대를 아우르는 고전 회화와 복식사는 물론 동시대 패션과 20세기 영화 속 시대극 의상(<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비롯해 <시씨>에서 오스트리아 황후 시씨를 연기한 로미 슈나이더, <디안>에서 디안 드 푸아티에 역을 맡은 라나 터너 등을 참고했다)까지 아우른다. 내가 맡은 가장 중요한 미션은 이 모든 자료와 에머랄드가 전하려는 이야기에 맞춰 의상 스토리텔링을 시각적으로 정제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 우리가 처음 마주하게 되는 캐시의 모습이다. 해당 의상은 '앙젤리크, 천사들의 후작 부인(Angélique, Marquise des Anges)'에서 앙젤리크 드 상세 드 몽텔루프 역할을 맡은 미셸 메르시에의 의상과 독일 '보그' 2010년 9월호 표지 등에서 힌트를 얻어 디자인했다.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캐시가 착용한 독일 전통의 밀크메이드 스타일 드레스가 가장 먼저 이슈가 됐다.

성인이 된 캐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본격적인 서사의 시작점에서 우린 ‘스타일리시하게 재해석한 <폭풍의 언덕>을 보여줘야 한다’는 방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시대적 디테일과 현대적인 아름다움, 올드 할리우드 감성까지 모든 이질적 요소를 조화롭게 버무리는 일이 중요했기에 완성하기까지 꽤 고심했다. 우리가 영화 전반에 보여주려 했던 모든 시각적 테마를 응축한 의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분명하게 재해석된 의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탄생해 매우 만족스럽다.

마고 로비의 헤어와 의상을 수놓은 화려한 빈티지 샤넬 주얼리도 시선을 끈다. 샤넬과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캐시의 위상에 걸맞은 우아하고 대담한 주얼리였다. 역사적 아카이브에 뿌리를 두면서도 화려하고 현대적인 터치가 가미된 샤넬 주얼리보다 완벽한 선택은 없었다. 샤넬의 영화 협력 부문 글로벌 디렉터 엘사 에이즈만(Elsa Heizmann)이 샤넬 아카이브를 샅샅이 뒤져 가장 아름다운 빈티지 피스를 선별했는데 그녀가 보내준 소포를 연 순간,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캐시의 눈부신 신혼 첫날밤 의상 사진. 티에리 뮈글러의 1996 봄/여름 시즌 룩과 책 'Calendar Girls, Sex Goddesses, and Pin-Up Queens of the ’40s, ’50s, and ’60s'의 핀업 걸 사진 등이 듀런의 무드보드에 담겨 있었다.

그 후 캐시는 잊지 못할 만큼 파격적인 ‘신혼 첫날밤’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신 이 의상의 제작 과정도 궁금하다.

에머랄드 감독이 내게 보여준 이미지 중 1950년대 사진 한 장이 시작이었다. 풍성한 흑발의 한 여성이 투명한 셀로판지에 싸인 채 가슴께에는 새빨간 리본을 매달고 있었다. 자신이 곧 선물이라는 듯이. 우리 팀은 곧바로 그 파격적인 컨셉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캐시가 스스로 선물이 되고, 신혼 첫날밤 역시 선물과 같다는 은유를 표현하기에 완벽한 레퍼런스였다.

캐시의 새빨간 고광택 드레스가 흰색으로 꾸민 배경과 매력적인 조화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슈가 된 새빨간 라텍스 드레스는 어떻게 탄생했나?

사실 그건 라텍스가 아니라 인조적인 초고광택의 질감을 강조한 합성 소재다. 레드는 영화 전반에 걸쳐 캐시를 상징하는 핵심 컬러이고, 마고는 영화에서 같은 소재 의상을 여러 벌 착용했다. 반짝이는 텍스처는 캐시의 성격과 의상을 모두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그 장면에서는 드레스와 고무 재질처럼 유광 처리한 세트 바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동시에 서재와 블라우스의 하얀색과 매혹적인 시각 대비를 이뤄낸다.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 샤자드 라티프가 연기한 에드거 린튼과 캐시.

푸른빛이 감도는 검정 고광택 드레스도 아주 의미심장하게 쓰였다.

시대적으로 정확한 고증은 아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고전적인 형태와 현대적 소재를 결합하는 작업은 정말 흥미로웠다. 그 블랙 드레스는 달빛 아래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특별히 디자인한 것이다. 촬영 감독 리누스 산드그렌(Linus Sandgren)이 조명을 적절히 비추는 순간 드레스가 빛을 반사하며 캐시가 달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언급하지 않은 의상 중에서 관객이 주목하길 바라는 또 다른 의상이 있나?

영화에서 의상이 어떻게 보일지 나 역시 무척 기대된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니터로 봤을 때 남다르게 다가온 의상이 하나 있다. 캐시가 아버지를 만나러 폭풍의 언덕으로 갈 때 입은 레드 벨벳 망토와 실버 드레스다. 설원 위를 스쳐 지나가는 선명한 붉은 망토의 일렁거림이 정말 아름다웠다. 역사적으로도 그 시대에 빨간 망토가 존재했지만, 우리가 만든 버전에는 1950년대 멜로드라마의 감수성을 좀 더 가미했다. 리누스 감독이 설계한 멋진 조명 아래서 드레스가 발하는 매력이 얼마나 색다른지 바라보는 건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을 수놓은 얼음 조각처럼 반짝거리는 은색 드레스와 눈 덮인 풍경의 조화가 정말 압권일 것이다.

캐시가 착용한 화려한 십자가 주얼리도 인상적이었다.

이번 영화는 아주 화려하고 스타일리시하지만 고딕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딕 십자가는 필수 소품이었다. 의상 곳곳에서 그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캐시가 아버지를 찾아갈 때 입은 빨간 망토와 은색 드레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 중인 18세기 망토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의 그림 ‘인터라켄에서 온 스위스 소녀(A Swiss Girl from Interlaken)’에서 착안한 캐시의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

갑옷을 연상시키는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에는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나?

의외로 그 의상은 역사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고증했다. 19세기 중반 스위스 농민의 복식인데, 당시 회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차림이다. <폭풍의 언덕>의 전반적인 배경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복식사에 가장 충실한 의상이라는 뜻이다.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의 그림 속 화이트 셔츠와 벨벳, 체인의 조합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거기서 피어나는 에너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체인 장식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스스로를 구속한다는 뜻일까?

사슬로 묶는다는 의미? 거기까지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피크닉 장면에서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등장한 캐시. 그 옆에 있는 인물은 홍 차우가 연기한 넬리 딘이다.
풍성한 러시아 털모자가 눈에 띄는 캐시의 크리스마스 의상.

캐시가 선보인 기상천외한 모자 스타일링에 대해서도 소개해주기 바란다.

피크닉 장면에서 캐시가 쓴 거대한 밀짚모자에는 일명 ‘별똥별’ 장식이 있는데 팀에서 무척 만족스러워했던 결과물이다. ‘내가 캐시라면 어떤 모자를 쓰고 피크닉에 가고 싶을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훨씬 더 거대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구현했다. 크리스마스 장면에서 등장하는 털모자는 은색 자수를 놓은 화이트 드레스와 매치했는데 추운 날씨에 적합한 아이템이면서도 글래머러스하고, 차갑고 부서질 듯한 얼음 같은 느낌이 감돌도록 유도했다.

제이콥 엘로디가 연기한 히스클리프의 의상에서 주목할 점은 무엇인가?

히스클리프의 의상은 조지 시대에 가깝고, 캐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적 정확도도 높게 디자인했다. 이번 영화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겨냥하는 시대적 기준은 전부 다르다. 우리가 특정 시대 혹은 특정 순간을 재현하기보다 인물에 맞는 이미지와 스타일에 맞춰 의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는 전형적인 조지 시대의 영웅상과 부합하는 인물이고, 그 점이 제이콥과도 잘 들어맞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의상은 19세기 초, 1800년대 스타일을 살린 대체로 어둡고 음울한 톤이며 낭만주의 시대의 아이콘인 바이런 스타일의 화이트 셔츠와 블랙 롱 코트로 고전적인 영웅 이미지를 구축했다.

캐시와 앨리슨 올리버가 연기한 이사벨라 린튼.

이사벨라 린튼 역할의 앨리슨 올리버는 캔디 핑크와 리본으로 장식한 인형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사벨라 의상은 1860년대를 기반으로 한다. 개인적으로 1860년대 특유의 스커트 실루엣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그 시대 복식을 주의 깊게 살피며 당대 사람들이 리본과 레이스 장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드레스가 얼마나 어느 정도 복잡하고 장식이 얼마나 많았는지 연구했다. 게다가 이사벨라는 하루 종일 리본과 장식을 만드는 인물이라 그런 설정을 최대한 부각했는데 그 때문에 조금 과한 의상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시대 복식 요소를 조금씩 과장해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면서도 순진한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

마지막으로 넬리 딘(홍 차우)과 에드거 린튼(샤자드 라티프) 스타일의 핵심에 관해서도 간략히 소개한다면?

넬리 의상에는 질감 있는 소재와 섬세한 자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에드거 린튼 의상은 꽤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진 막강한 부를 과시하기 위해 의상에도 화려함을 쏟아부었다. 신사복에 절대 사용하지 않을 만한 원단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최대한 과하게 디자인해 과장된 환경에 맞추려 했다(그가 거주하는 집의 인테리어 의도도 그랬으니까). 반짝거리고, 화려하고, 잔뜩 부풀린 의상이라 모든 면에서 시대적으로 전혀 들어맞지 않지만 그래도 형태와 실루엣은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모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고증하고 있다.

류가영

류가영

피처 에디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능적인 패션 감각을 타고난 화가, 소설가, 영화감독, 셰프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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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류가영
    Radhika Seth
    사진
    Jaap Buitendijk, Warner Bros.
    출처
    An Exclusive First Look at the Wild and Wonderful Costumes of ‘Wuthering Heights’ | V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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