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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연애소설] 김기태의 ‘유적 산책’

2026.02.10

[보그 연애소설] 김기태의 ‘유적 산책’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유적 산책

Pexels

최초의 웹페이지는 1991년 8월 6일에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연구원이었던 팀 버너스 리에 의해 업로드됐다.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그 페이지는 웹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했다. 오늘날에는 공개된 웹페이지만 1,000억 개 이상 존재한다고 추정되며, 이 순간에도 초당 2만 개씩 생성되고 있다. 대단히 크고 대단히 빠르게 팽창하는 것들은 도처에 유적지를 남기는 법이다.

망원경달팽이가 상대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유적지는 몇몇 제빵사들이 정보 공유를 위해 1998년에 개설한 웹사이트였다. 빵이 부풀어 오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GIF, 알록달록한 환영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전광판··· 그 사이트에는 당대의 웹디자인 미감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방명록으로 들어간 망원경달팽이는 불과 열흘 전에 누군가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 미래자두라는 이름의 방문자는 지난 11년 동안 아무도 한 줄도 남기지 않은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오늘 제빵기능사 실기시험 떨어졌어요.”

미래자두가 상대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유적지는 2000년대 초반에 철도 동호인들이 드나들었던 인터넷 포럼이었다. 사이트 소개, 뉴스, 노선 일람, 시승기, 앨범, 자료실, 자유 게시판··· 좌측 프레임에 일렬로 정돈된 메뉴 버튼에 커서를 대면 여전히 반짝 불이 들어왔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낌새는 전혀 없었다. 미래자두는 누군가 14년 전에 공유한 ‘시속 300km 시대 열리다, 고속철도(KTX) 오늘 개통’이라는 뉴스를 읽다가 망원경달팽이가 나흘 전에 쓴 댓글을 발견했다.

“지금 동해행 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빠르네요.”

계절이 두 번 도는 동안 두 사람은 여러 버려진 웹사이트에서 서로의 별명을 다시 발견했다. 때로는 몇 달 차이, 때로는 하루이틀 차이였다. 사실 상대의 흔적은 관광객의 낙서처럼 그 유적지들의 매력을 얼마간 해쳤다. 비어 있지 않았으므로 공터가 아니고, 부서지지 않았으므로 폐허도 아닌, 다만 사람의 발길만이 끊어진 채 방치된 그 기이하고 적막한 공간감··· 그러나 그 매력에 공감해줄 주변인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 말고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이 또 존재한다는 게 두 사람 각자에게 작은 위안을 주기도 했다.

언젠가 둘은 상대가 남긴 한두 줄의 단서를 바탕으로 행보를 뒤쫓은 적도 있다. 그러나 웹은 너무 넓었으므로 대개의 시도는 실패였다. 직접 만든 데스크톱 아이콘, 픽셀 아트, 영화 자막, 기출문제, 여행 지도, 게임 공략법까지 사람들이 뭔가를 공유하기 위해 만들었던 사이트들, 몇몇 유명인들이 경력을 시작한 토론방이나 한두 개의 유행어만 남기고 잊힌 유머 커뮤니티를 거니는 동안 계절이 지나고 해가 넘어갔으며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바뀌고 새로운 시대보다 더 새로운 시대가 왔다. 망원경달팽이와 미래자두도, 그 별명을 사용하는 두 사람의 사회적 인격과 생물학적 신체도 여러 일을 겪으며 깎이고 접히고 구부러졌다. 어떤 밤에는 상대가 수년 전에 남긴 흔적에 “요즘도 빵 굽나요?”라거나 “동해는 지금 추워요” 같은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또 수억 개의 웹페이지가 생성되고 그보다 많은 웹페이지가 잊히는 어느 밤, 망원경달팽이와 미래자두는 몇 단계의 검색과 아직 끊어지지 않은 하이퍼링크의 오솔길을 지나 이런 ‘대문’ 앞에 도착했다.

장희경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사람은 장희경을 전혀 몰랐다. 그곳은 플랫폼이라는 개념이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가 머물던 작은 ‘홈’이었다. 아마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사이에, 장희경은 강아지 삐삐를 포함한 다섯 가족을 소개하고 새 친구를 사귈 목적으로 그 집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쯤 최소한 40대 중반일 거라고, 자신이 오래전 얼기설기 벽지를 업로드하고 메뉴 버튼을 배치한 응접실을, 자바스크립트 매뉴얼을 뒤지며 간신히 삽입한 실시간 채팅방을 잊은 모양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그들은 장희경이 겪어야 했던 삶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30여 년을 지나 오늘의 방문자는 두 명. 주인 없는 집에 하나의 채팅방이 개설됐다.

망원경달팽이 님이 입장했습니다.
미래자두 님이 입장했습니다.

깊은 밤, 두 사람은 하얀 채팅 창을 보고 있었다. 말을 고르는 동안 입력란에서 커서가 깜빡거렸다. VK

김기태 는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무겁고 높은>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5월,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발표했다. 2024년 젊은작가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우리 연애할래요?”

김나랑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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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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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가영

류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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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능적인 패션 감각을 타고난 화가, 소설가, 영화감독, 셰프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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