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을 읽고 부모님의 결혼에 관해 깨달은 것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식 날까지도 서로 거의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가족들의 소개로 서너 번 만났을 뿐이었고, 그나마도 단둘이 만난 적은 없었죠. 양가 부모님들은, 두 분이 만나는 동안 주변을 맴돌며 미온적인 태도로 결혼 조건을 협의했습니다. 그냥 아는 사이에 결혼하는 건 미국에서는 아주 특이한 일이겠지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에 살았던 인도에서는 흔한 결혼 방식이었어요.
어머니는 발레 무용수였고, 아버지는 대학 졸업장 없는 인도계 이민 노동자였습니다. 별자리, 즉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이용하는 베다 점성술에 따르면, 두 분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고 해요. 물론 점성술은 그저 힌두교식 중매결혼을 확정 짓기 위해 절차상 본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이 이미 둘의 결혼을 결정했으니까요. 두 분에게는 결혼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두 분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죠. 만약 노력한다면, 어쩌면 언젠가는 서로를 사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랑을 노력으로 얻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결혼식 사진 속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에서는 두려움이 보입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매우 인간적이면서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죠.
저는 1세대 인도계 미국인이지만,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생각이 가족과 달랐고, 결혼을 성공의 척도로 보지도 않았어요. 부모 세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서구 사회가 말하는 발전적인 삶을 살기 위해 평생의 사랑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도리어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로맨스나 사랑이나 연애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어요. 연애란 미국인이 갈망하는, 경박하고 쓸모없는 소일거리며, 적어도 인도인은 이것이 경제적 관습이 아닌 다른 것인 양 미화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사랑은 언제나 선택이었고, 어려워 보였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게 해주는 꿈결 같은 로맨스는 TV, 영화, 음악, 책에나 존재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대신 저는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제가 처음 읽은 로맨스 소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과제였던 이 소설을, 저는 열심히 주석을 달아가며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에밀리 브론테의 단어 선택과 구문에 집중하라고 했지만, 저는 차차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내면 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이야기는 제가 살면서 겪은 그 어떤 격정과도 전혀 달랐습니다. 결국 저는 12페이지짜리 논문을 썼습니다. 제목은 ‘<폭풍의 언덕>을 읽는 것은 독자에게 감정적 잔혹함을 겪게 한다’였어요. 여기서 ‘잔혹함’이란 물론 히스클리프의 복수극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린 시절 캐서린 언쇼의 오빠에게 학대당한 것에 처음 복수심을 품었습니다. 이 복수심은 캐서린이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더욱 깊어졌죠.

이 소설은 저의 삶이나 로맨스에 대한 생각과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핵심에는 놀라울 만큼 저에게 익숙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편의와 물질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결혼이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될 거야.” 캐서린은 에드거 린튼과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난 이 동네에서 가장 훌륭한 여자가 되고 싶어. 그런 남편을 둔 걸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야.” 저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캐서린도 사랑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대신 사회적 신분 상승을 선택했어요. 안전하다는 착시를, 만들어진 믿음을 선택했죠. 히스클리프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인 피해였을 뿐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를 선택했더라도 대가는 따랐을 겁니다. 그를 사랑하는 데는 그만한 값을 치러야 했어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많은 경우 힘들게 싸워 사랑을 지켜야 합니다.
저에게, 브론테가 소설 속 두 집(제멋대로인 ‘워더링 하이츠’와 예법에 얽매인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는 품위와 억제를, ‘워더링 하이츠’는 사나움과 어둠을 상징하죠. 우리가 책에서 읽고 영화에서 보는 통제 불가능한 사랑, 캐서린이 버린 그 사랑은, 저희 부모님을 이어준 억눌린 사랑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억눌린 사랑 안에는 낭만이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대신 사회적 지위, 경제적 안정, 안락함에 관한 약속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물론 중매결혼이나 정략결혼 말고도 억눌린 형태의 사랑은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심 대신 알고리즘과 체크리스트가 욕망의 대상을 좌우하는 요즘 시대의 연애 문화는 사랑을 억누릅니다. 이성애 중심주의, 제도적 폭력, 계급, 종교가 사랑을 억누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것들, 또 우리 자신의 극심한 비겁함 역시 억눌린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캐서린의 선택이 바로 그런 예였고요.
캐서린은 두려움 때문에 히스클리프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고 에드거 린튼과의 안전한 삶을 선택합니다. 저희 부모님도 그런 두려움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두 분이 안전하고 안락하게 살기를 바랐던 양가 부모님들에 의해서요.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닌 결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직후 이혼하셨습니다. 그건 나름대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어요. 저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에도 친한 친구처럼 몇 시간이고 통화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인도 이민자 사회에서 이혼은 그때나 지금이나 금기시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혼은 저희 부모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용기 있게 이별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갔고, 두 분만의 특별한 무언가, 바로 저를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 바로 용기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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