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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 류승완답지 않은데도 결국 류승완다운 영화

2026.02.11

‘휴민트’, 류승완답지 않은데도 결국 류승완다운 영화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그의 2013년 작 <베를린>에서 시작된 영화다. <베를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다음 행선지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명했다. <휴민트>의 무대인 도시다. <휴민트>는 극 중에서 <베를린>의 주인공인 표종성(하정우)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휴민트>가 <베를린>의 스핀오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제목만큼 다르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영화 ‘휴민트’ 스틸 컷.

전 세계 스파이들이 모이는 도시를 내세웠던 <베를린>이 러시아 무기상, 반제국주의 아랍연맹, 이스라엘 모사드, CIA까지 섞이는 첩보전이었다면, <휴민트>는 ‘HUMINT(Human Intelligence)’라는 의미 그대로 ‘관계’에 집중한다. 어떻게 정보원을 만들 것인가,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두 영화는 ‘멜로’의 관점에서도 다른 온도를 보여준다. <베를린>이 감정을 아끼면서 긴장감을 높였다면, <휴민트>는 있는 그대로 감정을 보여주는 쪽이다. 이건 류승완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할 때 매우 낯선 온도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휴민트>의 연인, 박건(박정민)과 채선화(신세경)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 ‘아리랑’에서 재회한다. 두 사람은 애써 모른 척하지만, 영화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무대에 오른 채선화는 노래를 부른다. 길옥윤이 작사·작곡하고 패티 김이 불렀던 ‘이별’이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채선화의 얼굴, 그녀를 바라보는 박건의 얼굴, 노래 가사가 교차되는 연출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채선화의 노래는 이후 박건의 스마트폰에 담긴 녹음 파일을 통해 또 한 번 재생되는데, 이때도 영화는 서로의 사진을 보고 있는 남녀 얼굴을 교차한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이렇게 감정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멜랑콜리’한 장면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했다. 고전적인 것과 촌스러운 것은 한 끗 차이다. 류승완 감독은 한 끗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시점에 두 사람의 절절한 로맨스를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중반부 이후 전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휴민트>의 핵심적인 사건은 러시아 마피아에게 납치된 채선화를 구하는 것이다. 과거의 연인이었고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박건이 나선다. 채선화를 휴민트로 포섭해 정보를 얻어온 국정원 요원 조 과장(조인성)도 달려간다. 과거 정보원을 죽게 놔둘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는 조 과장에게도 채선화는 꼭 살려야 하는 인물이다. 이때부터 <휴민트>는 <아저씨>(2010)나 <테이큰>(2008)처럼 진행된다. 최대한 빨리 가서 악인들을 가능한 한 많이 처단하고 그녀를 안전하게 구해야 하는 미션이다. <휴민트>는 이때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다 보여준다. 혈혈단신으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액션의 멋, 적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합을 맞춰 싸우는 낭만. <휴민트>가 촌스럽다는 평가를 각오하고서라도 두 연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이유는, 사실 이때 액션을 위한 것이다. 채선화를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최소한의 감정과 서사다. 류승완 감독은 이를 위해 또 하나의 고전적인 연출을 더해놓았다. 배우 신세경의 얼굴을 담아낸 클로즈업 장면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본 적이 없는 길이와 빈도로 볼 때, 이 클로즈업 장면에는 박건과 조 과장의 입장에 관객을 동기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테이큰>에서는 딸을 구해야 하고, <아저씨>에서는 옆집 아이를 구하는데, <휴민트>에서는 신세경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베를린>을 포함한 류승완 감독의 다른 작품, 그리고 동시대 영화들과 나란히 놓고 볼 때, <휴민트>는 그리 세련되지 않고 풍부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은 아니다. 데뷔작부터 자신이 사랑한 액션 영화의 정취를 꾸준히 재현해온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과거 액션 영화가 지녔던 ‘매력’을 되살리려 한다. 전작의 액션도 멋은 있었지만, 생존을 위한 사실성이 두드러졌던 것과 달리 <휴민트>에서는 액션 영화광의 취향이 먼저 드러난다. 박건과 조 과장이 합을 맞추는 장면은 <첩혈쌍웅>(1989)을 떠올리게 하고, 총격전에 불리한 롱 코트를 고수한 조 과장의 모습에서는 ‘멋’을 향한 감독의 욕망이 읽히기 때문이다. <휴민트>는 그처럼 익숙한 멋과 낭만에 같이 젖어들 때 흥미로운 영화일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영화들이 지닌 매력과 힘은 그만큼 강하고 끈질기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강병진

강병진

대중문화 저널리스트

영화 저널리스트입니다. <씨네21>에서 영화 전문 기자,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뉴스 에디터, OTT 플랫폼 왓챠에서는 콘텐츠 마케팅을 담당했습니다. ‘이상한 장면’이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입니다. 어쩌다 보니 20년 가까이 영화를 비롯해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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