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앞둔 한남동에 문을 연 치커리 호텔
치커리 호텔에선 머지않아 사라질 동네, 쓰임을 다한 건축물과 소재에 다시 생명이 깃든다. 그것은 곧 또 다른 영감으로 번진다.

재개발을 앞둔 서울의 어느 동네로 몇 달 전 이사했다. 하늘에 빗금처럼 자리하는 전봇줄과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늘어선 골목길, 발그레한 볼로 오후의 볕을 즐기는 노인들에게서 동네의 시간이 느껴진다. 이 풍경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약간의 헛헛함이 몰려온다. 이사를 마무리할 즈음, 치커리 호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주택 재개발 정비 사업 시행 인가가 임박한 한남5구역에 문을 연 호텔은 시작과 함께 끝이 정해져 있었다. 효율과 비용의 숫자로 비즈니스 대화가 점철된 시대에 누가 이 비가역적인 선택을 한 걸까. 그 질문의 끝에는 유주형 대표가 있었다. 그는 2016년 오래된 금속 부품 공장을 개조해 성수동에 카페 어니언을 열며 한국 카페, 디자인 신에 새로운 흐름을 만든 인물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매일 치커리 호텔로 출근한다. (호텔은 공식적으로 오픈하기 전부터 예술·패션계 이벤트가 열리며 관련 분야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몇 달 전엔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가 이곳을 찾기도 했다.) 2~3년 시간을 들여 완성한 이 호텔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그에게 인터뷰 제안 문자를 보냈다. 긴 고민 끝에 돌아온 답은 간결한 수락이었다. 그렇게 호텔에 도착해 하루 동안 차근히 호텔을 살피며 그곳 사람들과 조우했다. 물론 유주형 대표와의 긴 대화도 함께.

사라질 운명인 공간에 호텔을 열었어요.
몇 년 전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3대째 운영한 잠수장이란 여관이었는데, 서울에 대를 이은 여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어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도시라 식당도 대를 잇기가 어려우니까요.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호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였는데요. 재개발구역이라는 것도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도시재개발이라는 게 글로벌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주 독특한 현상이잖아요. 사라질 동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 ‘우리처럼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어떤 요소를 바꿔서 지역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어요. 재개발구역에 비용을 들여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게 언뜻 무모해 보여 이전에 없던 일이기도 하고요. 반면에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재개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재미난 일을 벌일 수 있겠다’ 싶었죠. 이전부터 사라져가는 지방 소도시에 관심이 깊었거든요. 새로 건물을 짓는 것보다 기존 공간을 활용해 뭔가를 해보고 싶었어요.
재개발로 인해 언젠가 사라질 건물이지만 시간과 비용을 들여 디테일을 살렸죠.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큰 틀은 ‘옮길 수 있는 것에 비용과 에너지를 쏟자’였어요. 가구나 예술품 같은 것들이죠. 치커리 호텔의 겉을 둘러싼 대부분은 기존 것들을 활용하되 깔끔하게 매만졌을 뿐이죠. 벽체는 물론 문도 잠수장의 것을 그대로 살렸어요.
객실마다 겹겹이 붙어 있던 벽지를 샌딩해 작품처럼 마감한 것이 눈에 띄던데요. 앞서 한 대답과는 다른 정성 어린 태도군요.
이 정도로는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하기 부끄럽죠. 다만 벽지는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어요. 여관이 40여 년 운영되다 보니 8~10겹씩 덧바른 상태였거든요. 이것들을 모두 철거하는 대신 부드럽게 갈아내 이곳에 쌓인 시간을 보여주는 게 가장 완벽한 작품이 아닐까 싶었어요. 방마다 벽지로 만든 시간의 아트워크가 존재하죠. 맨 위층 스위트룸 바닥에는 건물의 오래된 배관이 장식처럼 들여다보이고요. 객실에 놓인 옥색 변기는 이전에 잠수장에서 쓰던 것과 동일한 모델의 새 제품을 어렵게 구한 거예요. 우리 팀원들에겐 얼마나 특별한지 몰라요.(웃음)


치커리 호텔을 계획하며 떠올린 컨셉이 있을까요?
비즈니스 모델로 먼저 답하자면 런던의 소호 하우스나 도쿄의 트렁크 호텔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호텔이자 아지트 성격을 띠는 곳이었어요. 우리나라는 그 역할을 카페가 맡아왔으니, 이제 호텔이 되면 좋은 시점이라 여겼어요. 미감은 이게 우리 팀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손으로 만들어 다양하면서도 하이엔드 성격을 지닌 것. 또 우리 팀원 대부분이 한국인이라서 동시대 한국적 특징이 많이 느껴지면 구별되지 않을까 싶었죠.
몇몇 객실은 해외에서 각광받는 한국 작가들이 직접 꾸몄어요.
3층 맨 끝 객실은 이혜미 도예가가, 스위트룸 침실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김민재 디자이너가 맡았어요. 이혜미 작가는 한국 전통 구들에서 영감을 얻어 유약과 은을 얹어 구운 디딤돌, 좌탁을 만들었죠. 좌탁에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등 머무는 사람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길 바랐죠. 김민재 작가는 나무와 유리섬유를 활용한 옷장과 조명, 의자 등을 통해 특유의 어그러진 형태를 침실 곳곳에 녹여냈어요. 손자국이 느껴지면서도 분방한 형태가 어니언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바와 닮았어요.

로비를 비롯해 여러 객실에서 마주하는 작품도 인상적이에요. 공간을 채운 작품의 큐레이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저를 비롯해 팀원, 손님의 마음을 울리는 작가이길 원했어요. 두 번째는 동시대 작가이자 한국적 베이스를 가진 사람의 작품을 찾았죠. 근데 모두 동일한 기준은 아니에요. 공간이나 우리 팀원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기준으로 움직이는 건 하나도 없거든요.(웃음)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서도호 작가의 ‘천으로 지은 집’ 시리즈가 등장하죠. 서도호 작가를 제일 먼저 떠올린 이유가 있을까요?
서도호 작가님은 한국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서양의 색감으로 표현하는 분이었어요. 어느 작품에나 한국적 경계를 품고 있달까요? 그 점이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입구에 놓인 작품을 지날 때 감정이 환기되는 경험을 했는데, 저는 이 호텔을 찾는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곳에 들어온 순간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경험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니언이 한국적인 것에 끌리는 이유가 궁금해져요.
부모를 떠나고 싶으면서도 그리운 게 자식의 마음이자 숙명이죠. 개개인에게 조국이란 그런 것 아닐까요? 동시대 미술의 이슈인 ‘디아스포라’도 그렇죠. 다른 국가로 이주, 망명 혹은 그 땅에서 태어났을지라도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본능이 있나 봐요. 저 역시 지방 소도시 소멸처럼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왜 해결하고 싶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해요. 글쎄요. 답은 아직 모르겠어요. 이왕이면 한국에서 쓸모 있으면 좋겠고요. 한편으로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처럼 세계적으로 멋진 결과물을 내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웃음)

가깝고도 먼 상상일지 모르지만 치커리 호텔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 해외에서 제안이 온다면 도전해보고 싶나요?
그럼요. 그러기 위해 만든 거예요. 이곳을 시작으로 지방에 호텔을 세워 하나의 결합된 모델이 나온다면 못할 것도 없죠.
가능하리라 짐작해요. 그 힘은 어니언이 지닌 디자인 파워에 있기도 하고요. 가구 역시 어니언 스튜디오가 디자인했죠.
치커리 호텔의 가구는 어니언 스튜디오와 팀을 이끄는 디자인 듀오 패브리커 김동규, 김성조 작가의 작업이죠. 우리는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에 대한 애정이 깊어요. 폐기된 가구나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공간을 꾸몄어요. 특히 가구는 특별한 컨셉을 세우기보다 공간에 맞춰 유연하게 제작했고요. 우리 스튜디오 팀원들은 매 순간 치열하게 대화를 나눠요. 형태부터 작은 부속품처럼 사사로운 것 하나하나 공유하고 거듭 실험, 수정하면서 가구를 만들죠. 정해진 답처럼 하나의 형태를 만들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하는 편이거든요.

호텔 곳곳의 버려진 물건, 자재에서 찾은 아름다움이 가득해요. 어니언이 생각하는 ‘오래가는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Sappho)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어떤 이는 기병대를, 어떤 이는 보병대를, 어떤 이는 함대를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겠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누구에게 놓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아름다움의 영속성, 시간성도요. 감히 제가 답할 수 있을까요?(웃음) 계속 변하는 거겠죠. 다만 미술·디자인사를 돌이켜볼 때 정반합의 연속이잖아요. 제게 어떤 게 ‘정으로 오래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 듯해요. 도리어 ‘네가 지금 제일 사랑하는 건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무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 바람에 먼지가 일으키는 회오리 패턴, 베개 끝의 서걱거림 같은 거예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참 좋죠. 그래서 호텔 1층 테라스에 앉아 바람에 반짝이는 나뭇잎,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해요. 호텔을 찾는 분들도 이곳에서 그런 사소한 행복을 찾으면 좋겠어요.


호텔을 채우는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는 음식과 술이에요.
맞아요. 흔히 트렌드를 만든다고 일컫는 문화, 예술, 패션 모임의 끝에는 늘 음식이 있어요. 이 공간을 준비하면서 제일 중점을 둔 부분도 음식이고요. 이미 자리를 잡은 셰프, 소믈리에 등도 좋지만 이곳이 차세대 주인공이 될 사람들의 무대가 되길 바랐어요. 조금 거칠고 투박해도 다르려고 노력하는 플레이어를 찾아 함께했어요. 1층 다이닝은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지향해요. 프렌치 베이스의 김윤호 셰프가 양식과 한식을 아울러 선보이는데, 특히 화덕에서 구운 피자가 일품이에요. 데커레이션은 투박하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이랄까요? 수수한 본질이 담긴 음식이라 좋아요. 음식과 페어링하는 술은 어드밴스드 소믈리에 자격을 지닌 윤종주 소믈리에가 이끄는데, 와인을 접하기 전 영화인을 꿈꾼 친구라 클래식하면서도 기발한 조합을 선보이죠. 2층 티타산은 <더 디저트> 우승자 박지오 파티시에가 함께하는 디저트 바예요.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디저트 메뉴와 칵테일, 디저트 와인을 준비했죠. 하반기부터는 바 오마카세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고요.

호텔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요. 사람들에게 치커리 호텔이 어떻게 각인되길 바라나요?
어떻게 불러줄지는 이곳을 찾는 분들의 자유이자 취향이라 봐요. 그 대신 좋아하고 사랑해주길 바라죠. 또 서울에서 패션, 문화, 예술 분야의 창작자에게 아지트로 기능하길 꿈꿔요. 그냥 자주 발길이 닿는 게 아지트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사무실, 누군가에게는 집, 때로는 데이트 장소가 되길 바라죠.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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