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e

심각한 존재론을 말하지 않고도 삶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남자. 일상의 엔터테인먼트를 채워주는 배우 김래원을 조각조각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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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마다 전혀 다른 인물로 돌아오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상상하곤 한다. 그들 몸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변신 장치에 대하여. 변신 장치에는 여러 개 버튼이 장착되어 있을 것이다. 감정 증폭기, 눈물 제조기, 체력 조절기… 김래원에게도 변신 장치가 있다면 가장 자주 사용해 표면이 닳아 있는 버튼은 목소리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두껍다. 겹겹이 감정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다. 인물의 어떤 감정이 확연하게 드러날 때 그의 음성은 감정의 농도를 절묘하게 조절해준다. 10월 개봉을 앞둔 영화 <희생부활자>에서도 가장 절박하게 들리는 음성은 그의 것이다. 예고편 마지막 장면은 김래원의 슬프고도 짧은 외마디 “엄마!”로 끝난다.

니트 톱은 닐 바렛(Neil Barrett),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니트 톱은 닐 바렛(Neil Barrett),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곽경택 감독의 영화 <희생부활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진짜 범인을 심판하기 위해 살아 돌아오는 현상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김래원은 희생부활자가 되어 돌아온 엄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좇는 검사 역할을 맡았다. 또 검사냐고 묻겠지만, 직업은 본질이 아니다. 김래원이 <희생부활자>를 찍게 된 건, 처음부터 끝까지 곽경택 감독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를 받고 RV(희생부활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유튜브에서 찾아봤어요. UFO 같은 거니까요. 예전에 곽경택 감독님이 작품을 제안하신 적 있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했거든요. 이번에 ‘책(시나리오)’을 주시면서 ‘시간 되면 할래?’ 하셔서 ‘예, 보겠습니다’ 했죠.” <희생부활자>는 김래원이 연기적으로 연기하지 않으려고 한 작품이다. “원래 굉장히 내추럴한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번 작품은 그렇지 않았어요. 영화 자체에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 절제된 연기를 요구하셨죠. 감독님과 스토리의 힘만 믿고 갔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하던 김래원은 장난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표정으로 촬영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감독님이 연기를 되게 잘하세요. ‘래원아, 그거 아니다, 그거 아니고 이거다!’ 하면서 직접 보여주시는데 진짜 명확하게 보여주세요.” “계속 찾아가서 진지하게 이 부분이 왜 이렇게되냐고 논리적으로 물어보고 그랬어요. 한번은 ‘감독님, 어제 찍은 장면 한 번만 더 보여주세요. 이거 아니지 않아요? 이거 왜 이런 거예요?’ 했더니 ‘그만 좀 해라! 너 때문에 나도 헷갈리잖아’ 하며 화를 내셨어요. 흐흐. 징글징글했을 거야. 그렇게 화내시고 밤에 생각하시는 거예요. ‘얘가 이 말을 왜 했지?’ 그래서 그만했냐고요? 계속했죠.” 김래원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이번 영화가 좋았다고 덧붙였다. 제작 발표회 날, 곽경택 감독이 김래원을 두고 “굉장히 집중도가 높은 배우다. 연출자와 신뢰가 구축되고 나면 불이라고 해도 진짜 뛰어들 배우다”라고 남긴 말은 진심 그 이상이었던 셈이다. 물론 김래원은 불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며 다시 한번 흐흐 웃었다. 대한민국 대표 감독과 열정적인 배우의 스토리는 미래를 기약하며 끝을 맺었다. “감독님이 아쉽다고 한 작품 더 하자고 하셨어요. 너를 너무 늦게 알았다고, 20%밖에 못 써먹은 것 같다고요. 기회가 되면 또 할 생각 있어요.”

카디건은 라프 시몬스(Raf Simons at Mue), 셔츠는 알쉬미스트(R.Shemiste).

카디건은 라프 시몬스(Raf Simons at Mue), 셔츠는 알쉬미스트(R.Shemiste).

스스로 말한 ‘징글징글함’. 김래원의 과거 인터뷰를 읽다 보면, 연기를 대하는 이런 자세의 역사가 유구함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장에서 “한 번만 더 해도 돼요?”라고 요청하는 그에 대한 주변 배우들의 증언이 그것. “감독님이 충분히 나왔다고 하는데 왜 더 찍냐고 항상 물어요. 저는 아예 개념이 다른 것 같아요. 돈이 더 드는 장면이면 저도 안 해요. 그냥 제 표정 연기 장면에서 그래요. 사실 아주 디테일한 부분인데, 한 번 더 하면 거의 티는 안 나지만 저랑 감독님만 알 정도로 좋아지거든요. 제가 한 번 더 찍는다고 영화가 달라지진 않아요. 지금 50% 정도 더 좋다고 하시는데 80~90% 정도로 끌어올려보려고요. 더 다양한 연기를 한다든지, 아예 다르게 연기해보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 웃으면서 할 걸 울면서 할 수도 있고 조용히 얘기할 걸 소리 지르면서 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영화 개봉을 앞둔 배우로부터 ‘이 역할을 위해 이런 행동까지 했습니다’라는 촬영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교도소에서 농구를 하며 감정을 이어갔다’ 같은 배우의 노력 말이다. 반면 배우들은 이런 얘기 하는 걸 쑥스러워한다. 김래원은 이를 작은 도움이라고 불렀다. “그 시기에 최대한 그 사람이 되려고 해요. 그 사람이 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현장에서는 연기 안 하려고 해요. 내가 이 사람이니까 할 필요가 없잖아요. 무거운 영화 보면 다음 날까지도 여운이 남아 있잖아요. 저는 그 컨디션을 유지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시나리오를 되새기면서 젖어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원래 제 모습 안에 이 시나리오가 들어가 있는 거죠. 일단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했어요.(웃음)” 그를 거쳐간 수많은 인물은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가 지웠다. “깊고 무거운 작품을 하면 확실히 무거워져 있어요. 예전에 영화 <강남 1970> 하고 거의 1년 만에 후배랑 친구들을 만났는데, 제가 막 군인 같고 무섭다는 거예요. 깡패, 건달 역할을 해서 눈빛이 빡 이렇게 되고 말도 탁탁 하고… 일상에서도 좀 바뀌는 부분이 있어요.”

그레이 체크 수트는 델라다(Delada at 10 Corso Como), 셔츠는 우영미(Wooyoungmi).

그레이 체크 수트는 델라다(Delada at 10 Corso Como), 셔츠는 우영미(Wooyoungmi).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이 그렇듯, 김래원은 시트콤, 트렌디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두루 거쳐왔다. 드라마와 영화라는 가깝고도 먼 영역을 그처럼 쏠림 현상 없이 꾸준히 오고 가는 배우도 드물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그냥.” 김래원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어떤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20여 년 동안 그가 만들어온 필모그래피에서는 대중문화의 시대정신이 충실하게 읽힌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드라마와 영화를 볼 때 기대하는 ‘재미’와 ‘편안함’이 있다는 것. 김래원의 유들유들하고 믿음직한 이미지는 매일 먹는 밥처럼 질리는 법이 없었고, 연기에 대한 열정은 직업인으로서 순수한 존중을 불러일으켰으며, 꾸준한 작품 활동은 일상의 엔터테인먼트를 채워주는 배우라는 고유한 지점을 만들어냈다. 김래원은 좋아하는 영화로 <캐스트 어웨이>를 꼽곤 한다. 비행기 사고로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고립된 한 남자의 이야기. “저에게는 딱 이 정도 영화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영화는 절대 가볍지 않아요. 오히려 무거워요. 삶에 대한 감사함, 소중함을 보여주니까요. 중간에 살아남는 방법이 재미있게 풀려 있죠. 드라마 <닥터스>도 초반에 ‘어’ 할 정도의 웃음 코드가 살짝 있는데 그건 제가 다 만들어낸 것이에요.” 주어지는 선택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김래원은 요즘 편안한 영화가 많지 않은 게 아쉽다. “사실 가벼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아담 샌들러, 휴 그랜트로 대표되는 영화들처럼. 보기도 편하고 재미있는데 많이 만들어지지 않아요. 배우로서 연기하는 쾌감과 별개로 관객 입장에서는 무거운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요. 얼마 전에 영화 <내 사랑>을 봤는데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지만 감정적으로 힘들더라고요.” 최근에 그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취미를 추가했다. “<셜록 홈즈> 보고, <인생은 아름다워> 다시 보고, <노트북>도 한 번 더 봤어요. 진짜 좋더라고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생존자들>도 봤어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뭔가 칙칙한데 계속 보게 되네요.”

사실 배우를 제외한 김래원의 삶은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공간으로 정리하면 바다와 숲이고, 활동으로 정리하면 낚시, 골프다. 그에게 본인이 현시대에 잘 맞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맞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맞춰가고 있어요. 배우는 특히 맞춰가야죠. 만약 70년대에 태어나서 90년대 후반의 연기를 했으면 훨씬 먹혔을 거 같아요. 마인드 자체나 감성이 좀 올드해요. 요즘 멜로 영화는 흥행이 안 되잖아요. 그런 사랑이 없어진 거예요. 지금 중 · 고등학생은 편지가 뭔지도 모를걸요? 편지 봉투, 우체통 같은 낭만이 없는 거죠. 시적인 노랫말도 거의 없어졌잖아요.” 과거에 대한 향수 같은 감정은 아닌 듯 보였다. 그의 세계가 외부 자극으로부터 휘둘리지 않을 뿐이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화려함보다는 인사동, 삼청동의 호젓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스타일리스트로부터 “그 바지 좀 버려라. 그래서 여자가 없는 거다” 같은 잔소리를 듣고도 “옷으로 날 평가하는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세계는 단단해졌고 그 내부는 잔잔하다. “유년 시절엔 내성적이어서 말 한마디 안 했어요. 낯가림이 정말 심해서 예전에 인터뷰가 정말 힘든 배우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때 어떠셨어요?’ 하면 ‘기분 좋았어요’ 하고 끝. 지금은 좀 나아졌죠. 그래도 말이 많진 않아요. 오늘 평소 하는 말의 몇 달 치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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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편인지, 이성적인 편인지 물었을 때 그는 변화를 말했다. “원래는 감성적이었는데 이제는 이성이 많이 지배하는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얘기인데 전 돈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물론 열심히 했고 20대 초반까진 고생도 했어요. 중요한 부분이지만 좇아도 절대로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관심이 생겨요. 미래에 대한 책임감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남들보다 많이 늦었죠. 평범한 미래를 꿈 꿔요. 추하지 않게 늙었으면 좋겠어요. 일할 때는 때론 열정 때문에 오해도 받지만 다 과정이죠. 후배들한테도 동료들한테도 인격적으로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자연스럽지 않고 꾸며진 것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그를 위해 우리는 메이크업을 한 꺼풀 걷어낸 화보를 찍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배우가 사람의 감정에만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모습이 당연해서 낯설어 보였다. 김래원은 영화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게 필요해 보이진 않았다. 사람 사이를 살펴보는 좋은 눈만으로도 그가 계속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