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박완서

Living

한 사람, 박완서

2019-02-22T14:43:26+00:00 2019.02.20|

늘 사람다운 삶을 향하던 소설가 박완서가 콩트를 사랑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생전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했다는 일화는 선생이 삶 속에
숨어 있는 기막힌 인생의 낌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준다. 서거 8주기를 맞아 박완서 최초의 콩트집〈나의 아름다운 이웃〉개정판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그리고 젊은 작가 29인이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며 콩트집〈멜랑콜리 해피엔딩〉을 냈다. 박완서 작가의 콩트를 오마주하며 써 내려간 후배 작가들의 콩트는 다채로운 언어의 추모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여기, 박완서 선생이라는 고유명사의 의미를 6인의 작가가 각별한 기억과 환한 감정을 담아 풀어놓았다.

박완서 선생의 연작 <엄마의 말뚝>에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들이 나온다. 개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첫 번째 동네인 서대문구 현저동은 내가 다닌 안산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오르내리기도 숨 가쁜 산등성이에 있던 달동네였다. 선생이 폭설을 맞으며 건너다닌 무악재는 나도 폭설을 헤치며 건넜다. 선생의 어머니가 겨울이면 땔감을 사러 다녔다는 영천시장은 내가 다닌 대신고등학교 길 건너편에 있다. 우리 집에도 물지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선생의 가족이 살았던 동네 풍경들은 내가 1970~80년대에 살았던 동네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 가족이 살았던 그 “상상꼭대기”의 달동네들은 1980년대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도 선생 가족처럼 북한에서 내려와 서울 “문밖”에 정착했다. 선생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할머니도 황해도의 고향 이야기를 말년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땜장이 집 아이 같은 친구가 내게도 있었다. 서울의 달동네들은 대부분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0년대에 재개발됐고 우리 가족이 살던 홍제동의 달동네도 그즈음 아파트촌이 됐다.

<엄마의 말뚝>은 시댁인 개성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빈궁한 삶을 살면서도 끝까지 정갈함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선생의 산문인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도 같은 내용의 어머니 이야기가 실려 있어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학생이던 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성이 쓴 소설은 감상적이라고 철없이 놀리곤 했다. 그럴 때면 여학생 동기들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반론으로 들었다. 산문에 나오는 “오기가 센 여자”가 살아온 삶이 문체와 형식으로 녹아 있는 소설들을. 선생은 요즘의 젊은 세대가 읽으면 ‘걸크러시’ 소설의 원조라고 할지도 모를 만큼 시대를 앞서나간 목소리를 지녔었다. —백민석

 

어렸을 적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때는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일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는데, 그런 전언과도 같은 말에 상처를 받았다. 선배의 말은 아마도 여성으로서의 내 삶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학교에 있을 때만 보호받을 수 있고, 사회에 나가면 ‘여성’이라는 2등 시민의 삶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서.

당시에는 소설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겐 재능이 없었고 끈기도 부족했고 소설가라는 막연한 꿈을 꾸기에는 가정 형편도 녹록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스물다섯을 넘긴 지 10년이 된 지금도 내 삶은 자유롭고 앞으로 더욱 자유로워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 소설 때문이다. 어린 시절 숨죽여 읽었던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내게 꿈꿀 수 있는 권리 그 자체였다. 마흔 살에 등단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력… 아직도 어딘가에서는 ‘여류 작가’라는 말로 불릴 수도 있겠지만, 단 한 사람의 작가이자 또한 여성 작가로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갔던 박완서 작가의 삶과 글쓰기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떨던 소녀에게 태산과도 같은 힘이 되었다. 소설 쓰기란 비록 고단하고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면, 불우하나, 그로 인해 자유롭다면. 한 작가의 삶이 다른 한 작가에게 자유를 암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게도 소설 쓰기는 결국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박민정

부끄럽게도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그전에는 몇 편 읽으려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두고 말았다. 기세에 눌렸고, 겁이 났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쓰지? 무섭지 않았을까? 너무도 심약한 나로서는 읽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이런 걸 대체 어떤 심정, 어떤 눈빛으로 써낸 것일까. 선생의 소설들-분단에서 비롯된 역사의 비극, 가족이 보는 눈앞에서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오빠를 보는 동생의 시선, 여성들에게 임신중절수술을 해주는 여성 의사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 낭만 따위는 조금도 없이 끝의 끝까지 세속적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좇아 사는 소시민들의 마음들을 그야말로 한 오라기의 용서도 타협도 없이 써 내려간 작품들-과, 선생 자신이 연이어 가족을 잃는 참척의 경험을 하면서 내면을 날것으로 고백한 산문들을 읽으며 문학이 무서운 것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정면 응시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정도로 강한 사람만 글을 써야 하는 것인가, 불경스럽게 의문을 품어본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고, 목숨을 다해 무언가와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상처이며, 삶이 너무나 하찮고 시시해서 견딜 수가 없는 지금을 살아가는 후대의 나도, 써야만 한다는 마음과 쓸 수 없다는 마음이 싸우다가 역시 쓰지 않는 쪽이 훨씬 괴로워 결국 써야만 하는 이야기, 씌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선생은 가부장제가 삶을 지금보다도 더, 그야말로 숨쉬기 힘들 정도로 짓누르는 세상에서 사셨지만 그 안에서 이는 여성으로서의 복잡하고 때로 모순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응시하고 의심하면서 정직하게 증언해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문장들 사이로 전해져 오는 묘하게 천진하고 곰살궂은 목소리와 다정한 웃음소리, 주름 가득한 얼굴의 미소. 내게 박완서 선생은 무서운 작가이자, 너무도 묘한 사람이다. 그리고 읽을수록 더 알고 싶은 선배 여성이기도 하다. —윤이형

 

나는 박완서의 소설들을 비교적 뒤늦게 읽은 편인데, 아마 어렸을 때 그의 소설 속 인물들과 물리적 혹은 심리적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를 과신했던 나는 엄마가 전화로 동년배 친구들과 교환하는 수다를 들을 때마다 저 세상살이가 내 것이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할머니는 착하고 다정한 분이었는데, 10여 년을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내게 뭔가 부탁했던 적이 딱 세 번 있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노래가 담긴 음반, <다빈치 코드> 그리고 햄버거였다. 나이롱 가톨릭 신자였던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다빈치 코드> 1권을 읽는 둥 마는 둥 하시는 것 같더니 소설 속 사건들이 정말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정말인지 아닌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 내가 박완서의 소설들을 처음 제대로 읽기 시작했던 시기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하지만 서른 즈음에 <그 여자네 집>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작품들을 되짚어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자꾸만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에게는 나와 살기 전에도 70여 년의 삶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던 삶을 나는 그제야 가만 들여다보고 싶었다. 할머니에게도 다분히 소설적으로 분할 수 있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완서의 소설을 읽는 동안 60년대에 가난을 피해 맨주먹으로 이민을 갔던 친척 어른을 만난다며 미국 여행을 가게 된 할머니가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발톱에 색칠을 안 했다고 허둥지둥 양말을 벗던 모습이 시종 떠올랐다. 그렇게 벗어놓은 양말을 까맣게 잊고 고모의 손에 이끌려 그냥 가셨다는 것도. 여행에서 돌아와 미국에서는 사흘 신은 양말도 바닥이 까매지지 않았다며 신기하다고 하셨던 것도. 그건 아마도 박완서의 소설들 안에 나의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구체적인 삶의 표정들, 솔직하고 담백한 욕망의 진술들, 고난과 행복이 간간이 교차하는 일상의 풍경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기억되어야 하기에 찬란한 순간들이. —한유주

소설을 쓰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소설은 늘 잘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일 소설을 쓰면 매일 소설이 써지지 않는다. 좀처럼 익숙해지거나 능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남들은 그걸 어떻게 쓰나, 이 어려운 걸 다 어떻게 견디나 나는 자주 궁금했다. 그래서 다른 소설가들을 만나면 매번 같은 질문을 하곤 했는데, 당신은 어디에서 쓰느냐, 언제 쓰느냐, 요즘엔 무얼 읽고 무얼 보느냐, 돌아오는 대답이 대개가 엇비슷한 질문들이었다. 더구나 그게 나의 사정을 더 나아지게 하는 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도 그래, 나도 잘 안 써져. 소설 쓰기 진짜 어렵다” 같은 대답을 들으면 이게 내 문제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어딘가 위로를 받는 것도 같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세상에 쉽게 쓰이는 소설 같은 건 정말 없다. 그럼에도 결코 쉽게 쓰일 수 없었을 문장들이 쉽게 읽힌다는 것은 어떤 마음 씀의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례를 들어야 할 때, 가장 먼저 나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저 커다랗고 무거운 시대상을 읽을 때, 동시에 함께 읽게 되는 어떤 배려 깊은 다정함 같은 것 말이다. —임현

아마 늦은 가을밤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을 모시고 강변로를 달려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방이동 아파트에서 아차산 자락 아치울마을로 집을 지어 이사를 하신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대학 졸업 직후 선생님을 만나 돌아가실 때까지 20여 년 동안 이런저런 추억을 쌓았는데, 언제 떠올려도 은밀하게 설레는 것이 그 밤의 미사리행이다.

미사리행의 전모는 이렇다. 선생님은 송창식 씨 팬이라는 말이 한동안 우리들 사이에 돌았다. 그때 우리들은 홍대 앞을 근거지로 삼았던 30대의 소설가, 평론가, 에디터들로 삶과 문학에서 박완서 선생님과 김윤식 선생님을 기려온 문우들이었다.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한국문학의 대작가라기보다 푸근한 어머니 같았고 다정한 선생님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할 만큼 모든 면에서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모범을 보여주는 어른 중의 어른이었다.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더욱이 올려다보기조차 두려운 어른인 김윤식 선생님과 함께 밤의 라이브 카페에 가다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주동을 떴는지, 우리는 송창식 씨가 무대에서 노래한다는 날을 잡아 박완서 선생님과 김윤식 선생님을 모시고 미사리 라이브 카페로 질주했다.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들의 별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팬이었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선생님의 팬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미사리에서의 그날 밤만은 선생님을 송창식 씨에게 내드렸다. 선생님은 송창식 씨를 향한 팬심을 유감없이 드러내셨다. 어둠 속에서 환호하는 선생님의 표정에서 미소녀의 앳된 모습, 전쟁으로 청춘 시절을 몽땅 잃어버린 세대, <나목〉에서의 스무 살 이경을 보는 듯했다. 송창식 씨는 지정된 곡 외에 선생님의 앙코르곡 <맨 처음 고백>을 불렀다. 아니 <사랑이야>였던 것도 같다. 송창식 씨는 노래를 마친 뒤, 선생님과 우리가 앉은 둥근 테이블로 내려와 두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두 볼이 상기된 소녀 팬이 되어 스타 가수를 만나는 벅찬 순간의 떨림을 나는 선생님 옆에서 내 것인 양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새벽별처럼 가슴에 새겨져 두근거리게 한다. 그 밤은 꿈이었을까? —함정임

 

김종광 외 12명의 문장은 <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28인 지음, 작가정신, 2019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