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꿈꾸는 하이힐 세상
플랫 슈즈와 스니커즈 유행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하이힐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 딱 6개월이면 세상이 또 바뀔지 모르니까.
<보그> 패션 디렉터는 플랫 슈즈 유행을 누구보다 반겼으면서도 또다시 하이힐 세상을 꿈꾼다.
얼마 전 나는 컬렉션 출장용 트렁크에 넣고 갈 신발을 고르던 중, 펌프스와 플랫폼힐들로 가득했던 신발장 중간 선반 대부분이 로퍼와 키튼힐 등 플랫 슈즈와 스니커즈들로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긴 이번 시즌 내내 나는 온종일 뛰어다녀야 하는 야외 촬영용 스니커즈를 출근 때도 신고 다녔다. 그 편안함과 활동성에 푹 빠져 하나둘씩 사 모은 것이 어느새 신발장을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여자들의 두 발을 자유롭게 해준 플랫 슈즈 유행은 여자들의 발과 발목, 허리를 혹사시킨 악당 같은 하이힐을 물리친 구세주와도 같았다. 그건 저지 소재와 트위드를 사용함으로써 딱딱한 코르셋과 격식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킨 코코 샤넬의 혁신에 비할 만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유행하는 거의 모든 스니커즈를 사들였다. 아디다스 슈퍼스타, 샤넬의 페이턴트 로퍼, 이자벨 마랑의 호피 스니커즈까지. 그 납작한 슈즈들이 유럽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피곤함을 얼마나 걷어내줬는지! 넘어질까봐 항상 길바닥만 보며 걸었던 내게 얼마나 시선의 자유를 선사했는지! 스니커즈와 플랫 슈즈로 갈아 신은 다리 긴 서양인 패피들의 모습은 또 얼마나 시크했는지! 그 유행에 비교적 일찍 동참했다는 것만으로 어깨가 으쓱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플랫 슈즈의 유행 또한 하나의 유행일 뿐. 어느새 내 마음은 뾰족하고 긴 여성스러운 힐을 향하고 있다. 그건 내가 유난히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유행에 민감한 내 ‘촉’이 또다시 행동을 개시한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유행과는 상관없이, 나는 하이힐 펌프스에 미디 스커트와 셔츠 룩 스타일링을 유난히 좋아한다. 상상해보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복도를 또각또각 소리 내며 걷는 패셔너블한 여인. 그녀가 풍기는 섹시하고 당당한 매력을 누가 거부할 수 있으랴! 게다가 하이힐은 어떤 옷이든 신는 순간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꿔놓는다.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들을 제외하고 그 누가 플랫 슈즈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겠나. 일단 키가 작거나 보통이라면, 미디 스커트나 통 넓은 팬츠는 무조건 플랫과 함께할 수 없다. 키가 크다면 팬츠 룩에 슈퍼스타만 신어도 멋스럽지만, 아담한 키의 여자들은 그렇게 입는 순간 초라해 보인다. 유행하는 7부 팬츠도 마찬가지. 키가 크면 뭐 그런대로 봐주겠지만, 보통 키라면 절대 플랫을 신어선 안 된다.
하이힐은 다르다. 어떤 차림이든, 키가 크든 작든,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바뀌면서 자신감을 선사한다. 미니와 미디 스커트, 스키니와 배기팬츠, 데이 룩이나 파티 룩 할 것 없이 스타일을 섹시하고 여성스럽게 포장해준다. 특히 앞코가 뾰족한 삼각형을 이룰수록, 바닥과 힐 사이 삼각형이 날카로운 직각 형태를 이룰수록, 그리고 힐의 굵기가 가늘면 가늘수록 하이힐의 섹시한 매력은 배가된다. 오늘 촬영장에 진열된 하이힐만 해도 그랬다. 피에르 아르디의 그래픽적인 힐은 보는 것만으로 황홀했고, 크리스찬 루부탱의 힐은 다리 선을 더 미끈하게 해줄 게 분명했고, 마놀로 블라닉의 뾰족한 힐은 역시나 섹시했다. 또 사각 금속 장식의 로저 비비에 힐은 우아했고, 지미 추의 힐은 아주 화려했다.
이토록 멋진 신세계를 놔두고 나는 왜 플랫 슈즈에만 집착했을까? 그간 외면했던 하이힐에 대한 후회감이 밀려오던 찰나, 문득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떠올랐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비애를 제대로 그려내 동지애마저 느끼게 했던 여주인공은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안쓰럽게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 영상을 애써 기억에서 지워냈다. 일단 내 ‘촉’을 믿어 보기로 했다. 신발장의 플랫 슈즈들을 몇 켤레만 제외하곤 높은 선반으로 옮겨 놓고, 구석에 처박힌 하이힐을 눈높이에서 가까운 선반들로 옮겨 놓기로 했다. 지금 촬영장에 있는 하이힐 중 샘플세일에서 건질 수 있는 것도 점찍어 뒀다.
아, 도대체 내가 갈대처럼 변덕스러운 건가, 유행이 여우같이 변덕스러운 건가? 이러다 내 ‘촉’이 틀렸다면? 그럼 다시 ‘신난다’ 하며 플랫 슈즈를 선반 아래로 옮기고 그걸 즐기면 될 뿐.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이지아
- 포토그래퍼
- KIM BO SUNG
- 모델
- 황세온
- 사진
- 헤어 / 김승원 메이크업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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