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덕후가 만든 TV

2016.03.17

by VOGUE

    덕후가 만든 TV

    인터넷 채팅 방송의 포맷을 그대로 TV로 옮겨왔다.
    가상 시뮬레이션 게임의 풍경이 브라운관에서 펼쳐진다.
    최근 방영 중인 오락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나홀로 연애중〉은 분명 어디에도 없던 별종들이다.
    지금 TV 곳곳엔 덕후가 출몰하고 있다.

    블랙 재킷은 에스카다(Escada), 이어링은 젬마 알루스(Gemma Alus), 얼굴에 쓴 기어는 삼성 기어 VR, 실버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박진경 PD는 1982년생이다. 연출 경력은 <사남일녀>와 <무한도전>이 전부다. 지난 설날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그의 첫 메인 연출작.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김구라, 백종원, 홍진영 같은 사람들이 직접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더 많은 접속자 수를 기록하기 위해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다. 실제 네티즌들이 들어온 방송 채팅창에는 ‘갓종원’ 같은 인터넷 용어는 물론 욕설까지 등장하고, 출연자를 묘사하는 캐릭터는 인기 게임 <마인 크래프트>와 닮았다. 모든 상황을 조종하는 것으로 설정된 이 프로그램의 보스 캐릭터가 <20세기 소년>의 ‘친구’ 캐릭터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상황은 분명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을 하고, 자신이 이른바 ‘덕후’이거나 주변에 ‘덕후’가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대가 연출자가 된 것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그룹 AOA의 초아가 접속자들의 반응을 잘 보지 않자 네티즌들은 피드백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화면에는 그 댓글들이 그래픽으로 처리돼 떠다닌다. 1975년생 김태호 PD는 <무한도전>에서 자신의 의견을 자막으로 전달하며 출연자들을 놀렸는데, 일곱 살 어린 박진경 PD는 아예 출연자들을 인터넷에 던져놓는다. 첫 방송이 끝난 후 악플이 출연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그러나 김구라는 방송 중 자신의 빚이 17억이라고 말했다. 초아는 악플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신경 썼다. 상식을 벗어난 악플은 어떤 식으로든 막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출연자들은 악플 이전에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접속자 수를 발표하는 중간 점검, 출연자들끼리 서로의 방송을 바꿔 진행할 수 있는 찬스, 접속자 수가 가장 적은 사람부터 방송을 강제 종료하는 시스템 등은 경쟁을 더욱 부추긴다. 대체 이게 TV 풍경이 맞나?

    <나홀로 연애중>과 그 프로그램의 프로토타입이었던 <상상연애대전>을 연출했던 임현욱PD도 덕후, 인터넷, 경쟁을 프로그램에 끌어들인다. 출연자들이 1인칭 시점에서 VCR 속의 여자 연예인과 사귀는 과정을 체험하고, 거기서 등장하는 문제의 답을 맞힌다는 설정은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준말) 게임에서 옮겨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문제의 답을 맞히는 사람은 스튜디오의 출연자들이지만 시청자 역시 문제 풀이에 참여할 수 있다. 방영분은 1, 2부로 나뉘고, 1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출연자는 탈락돼 구경꾼 신세가 된다. <나홀로 연애중>은 연애가 힘든 사람들을 위한 혼자 연애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게임이나 만화 등 서브컬처의 특징에 익숙하고, 인터넷으로 세상에 접속하며, 어디서든 경쟁에 익숙한 세대의 오락 프로그램이랄까. 김태호 PD는 대중문화의 시대였던 1990년대에 20대를 시작했고, 화제를 모은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처럼 자기 세대의 취향을 프로그램에 반영했다. <무한도전>이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고, 버라이어티에서 리얼 버라이어티로, 다시 리얼리티 쇼로 넘어간 것은 그 시대의 영향이다. 반면 박진경 PD나 임현욱 PD는 김태호 PD에게 새로웠던 것들이 일반적인 것이 돼버린 시대의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다. 모두가 혼자지만, 모두가 인터넷에 접속돼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경쟁을 매개로 나름의 커뮤니티를 만든다. 리얼리티 쇼건, 게임 <스타크래프트>건, 하다못해 악성 사이트 ‘일베’건 경쟁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분위기를 달구고, 거기서 스타가 나온다.

    인터넷 방송의 스타들, 또는 웹툰의 인기 작가들도 한때는 평범한 시청자이거나 독자였다. 만드는 사람과 소비자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그들의 세계에서 선호하는 스타일과 용어가 생겨난다. 과거 이것은 디시인사이드에서, 싸이월드에서, 트위터에서 존재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 PD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그것이 TV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나홀로 연애중>에서 남자 출연자가 VCR의 여자 연예인을 사귀려면 ‘썸’을 타는 1부를 거쳐야 한다. ‘썸’을 타는 동안에는 인사를 하고, 호감을 사고, 좀더 가까워지고, 손을 잡고, 사귀는 단계들이 잘게 나뉘어 이어진다. 2부 후반에는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말한 여자 친구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10년 전이라면 이 단계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고, “라면 먹고 갈래요?” 이후의 전개에 대해 출연자들이 “쉬었다 가자”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새로웠던 <무한도전>이 10년째 방영되는 사이, 다시 새로운 세대의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무한도전>으로 시작된 리얼 버라이어티가 TV, 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기존 연예인을 리얼리티로 결합시켰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이 중심이 된 리얼리티 쇼는 일반인들을 경쟁이 가득한 TV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TV 속 스타들을 인터넷에 던져버렸고, <나홀로 연애중>은 김민종 같은 40대 연예인을 연애를 골치 아픈 문제로 생각하는 세대의 연애 속으로 던져놓는다.

    그래서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정규 편성되고, <나홀로 연애중>이 <상상연애대전>처럼 조용히 묻히지만은 않는 상황은 인터넷 방송이나 게임과 같은 특정 요소의 유행이 아니라 한 세대의 문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김태호 PD 같은 ‘X세대’가 만들어낸 흐름이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대중문화 세대였던 ‘X세대’는 그들이 보던 영화, 음악, TV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반면 SNS 세대가 즐기는 인터넷 방송, 게임, 연애 스타일은 TV 뉴스로조차 많이 다뤄지지 않은 것들이다. 1980~90년대 태생의 라이프스타일이 갑자기 전 세대 앞에 툭 튀어 나왔다. 당연히 낯설고 극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1982년생이 1975년생처럼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만은 확실하고, 인정해야 할 일이다.

      에디터
      글 / 강명석( 편집장), 피처 에디터 / 정재혁(JUNG, JAE HYUK)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모델
      신혜진
      스탭
      스타일리스트 / 임지윤 메이크업 / 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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