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파워 듀오, 아퀼라노와 리몬디
정체된 이탈리아 패션계에 신선한 피를 수혈해온 두 남자. 냉정과 열정 사이, 이상과 현실을 저울질하듯 조금 냉소적이고 시종 유머러스한 아퀼라노· 리몬디의 듀오 디자이너를 서울에서 만났다.
“찍기 어려울 거예요. 난 늘 <아담스 패밀리>처럼 나오거든요!” 토마소 아퀼라노는 크고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는 멋쟁이 이탈리아 남자처럼 아주 말쑥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기 좋게 맞는 남색 블레이저의 보드라운 니트 조직, 얇고 섬세한 종이처럼 바스러질 듯한 하늘색 셔츠의 촉감이 눈으로 전해졌다. 손가락에는 20캐럿 크기의 블링블링한 스톤 반지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뒤이어 나타난 로베르토 리몬디는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아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약간 새침한 표정에 조금 전까지 아틀리에에서 일하다 달려온 것 같은 모습이 어쩐지 익숙했다. 이 독특한 조합의 듀오 디자이너는 1999년 막스마라에서 처음 만났고, 2008년 아퀼라노 · 리몬디를 론칭했으며, 말로와 지안프랑코 페레에 이어 페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함께 책임지고 있다. 정체된 이탈리아 패션계에서 묵묵하게 존재감을 키워온 이 파워 듀오는 마치 만담 콤비처럼 리드미컬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VOGUE KOREA(이하 VK) 서울에는 언제 도착했나요?
TOMMASO AQUILANO(이하 TA) 월요일에 일본에 들렀고, 목요일인 어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올 때마다 활기찬 도시라는 게 느껴져요. 밀라노와는 완전히 반대죠.
VK 한국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과 성향이 비슷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TA 생활 방식이나 생각은 유사한지 모르겠지만 서울이 훨씬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열정적으로 유행을 따르는 것도 보이고요.
VK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죠?
ROBERTO RIMONDI(이하 RR) 이탈리아가 패션의 중심이라고들 하지만 요즘 밀라노는 다소 편협해지고 있어요. 실제 사람들이 즐기는 패션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가서 직접 보고 경험해야 하죠. 그래서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브랜드의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중이에요. 예전에는 디자이너와 제품을 분리해서 생각했지만, 요즘 고객들은 디자이너의 성향을 파악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죠. 한국에 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VK 도쿄에도 들렀다고 했는데 서울과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RR 일본은 밀라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여자들이 18~19세쯤 되면 금세 성숙하고 귀족적인 스타일로 바뀌죠. 한국은 좀더 쿨합니다. 일본에서 패션쇼를 했는데 알고 보니 모델 중에 두 명이 한국인이었어요. 확실히 일본 모델보다 쿨한 분위기를 연출하더군요. 요즘은 정말이지, 전세계 어딜 가나 쿨한 게 대세예요. 화려하게 꾸미고 차려입는 걸 즐기는 이탈리아보다는 이자벨 마랑풍의 프랑스 아가씨 스타일이요. 그렇지만 패션을 소화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요. 예를 들어 뉴욕과 서울에서 똑같은 드레스를 입더라도 서울은 세련되게, 뉴욕은 내추럴하게 연출하죠. 패션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른 거죠. 서울은 패션을 현재 상태로 즐기는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의 유행에 빠르게 반응합니다. 결정을 내릴 때도 그즉시 신속하게 내리는 것처럼 뭐든지 빨라요.
VK 그나저나 이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겠어요. 두 분 참 멋쟁이시군요!
TA 오늘 잘 보이려고 꾸미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거든요. 광 내느라 피부가 상할 뻔했어요!
VK 겉모습도 꽤 달라 보이는데, 각기 맡은 일도 다른가요?
RR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독일 스타일이고.
TA 전 그에 비하면 자유롭죠.
VK 디자인 작업은요?
TA 디자인에 관여하는 사람은 오직 우리 둘뿐이에요. 컬렉션 룩 스타일링까지 우리가 직접 하죠. 원단을 주문하거나 업무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로베르토가 하지만, 가끔 제가 따라 가기도 한답니다!
RR 홍보나 쇼 음악 준비 같은 건 토마소가 하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일은 대부분 함께해요.
TA 로베르토는 기술적인 업무를 처리하고요. 근데 가끔 저 친구가 잘 성사시켜 놓은 일을 막판에 엎어버린답니다.
RR 토마소는 착한 역할이고 난 못된 역할이죠.
TA 로베르토도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쉽진 않아요. 끝까지 꼼꼼하게 다 듣고 난 후 “절대 안 돼!”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VK 둘이서 모든 걸 해야 하니 파티나 행사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바쁘겠군요.
TA 이벤트나 파티에 참석할 만한 짬을 내는 게 물리적으로 어려워요. 다른 디자이너들과 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우린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으니 가지 않는 편이 나은 것 같아요. 사교 생활을 즐기려면 외모가 뒷받침돼야 하잖아요? 개성 있고 스타일 좋은 디자이너가 등장하면 첫눈에 “와우!”라는 감탄사가 나오지만 우리는 그냥 그런 수준이죠. 생각해봐요, “와우, 리카르도 티시!”지만 우리는 “아, 뭐 그냥” 그런 거죠.
VK 당신들도 스타예요.
TA (미소 지으며)아주 작은 별이죠.
VK 아퀼라노 · 리몬디 의상은 몇 시즌을 주기로 변화의 폭이 큰 편이에요. 매우 강했다가 여성적으로 변하고, 통통 튀다가 다시 섬세해지죠.
TA 디자인적으로 진화를 추구하다 보면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지금은 세상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창의적인 포인트 자체를 바꾸는 게 불가피해요. 그리고 요즘 여자들은 옷장에 필요한 모든 걸 다 갖고 있어요. 우리 역할은 확고한 스타일에 새로운 것을 불어넣는 겁니다. 좀더 로맨틱하거나 예술적이거나 혹은 내추럴하거나. 요구가 있을 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브랜드와 패션에 접근하는 컨셉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좀 낯설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체성인 즉각적인 여성성과 실용성은 변하지 않죠.
PR 우리 의상을 잘 보면 옷을 입는 방식이 단순하다는 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굉장히 장식이 많고 복잡해 보이는 스커트도 간단하게 지퍼 하나로 입을 수 있죠. 스커트뿐 아니라 드레스, 톱, 뭐든 지퍼 손잡이만 위로 쭉 올리면 끝입니다. 입기 어려운 옷은 없어요, 복잡해 보이지만 구조는 늘 단순하죠. 아이디어는 쉽습니다. 쉽지만 컨셉이 들어 있는 패션이에요.
VK 패션에 대해 잘 모르고 스스로 꾸미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멋지게 연출할 수 있겠군요?
RR 그럼요, 지퍼만 올릴 줄 알면 되죠!
TA 그게 우리의 강점입니다. 아퀼라노· 리몬디로 오면 손쉽게 이상적인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죠. 물론 등 뒤 지퍼를 올릴 때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요.
VK 2015 S/S 컬렉션은 앙리 마티스가 장식한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들었어요. 그렇지만 동양적인 분위기가 훨씬 더 강했죠.
TA 스테인드글라스를 장식한 꽃 그림이 매우 동양적이거든요. 꽃과 잠자리를 혼합해서 동양적인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우리 의상에는 텍스타일, 형태 등 늘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했죠. 좀더 우아하고 특별해 보이거든요. 그것 역시 우리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VK 반면 당신들이 디자인한 페이 컬렉션은 놀라울 정도로 젊고 활기차 보여요.
TA 페이는 25년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브랜드입니다. 우리는 그 오랜 전통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죠. 페이는 몇 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이었고, 우리는 이 지역색 강한 브랜드를 글로벌한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했습니다.
VK 독립한 이후 거의 쉬지 않고 여러 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아왔어요. 당신들을 쉼 없이 달리게 하는 원동력은 뭔가요?
TA 브랜드에서 우리를 영입했다는 건 우리가 그 브랜드 방향에 맞게 디자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로에 있을 때는 스웨터를 강화했고, 지안프랑코 페레에서는 건축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금 페이에서는 스포티함에 집중하고 있죠. 이렇듯 각기 다른 특징에 맞게 컬렉션을 채워 나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15년 동안 막스마라에서 일하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을 키웠다고 생각해요.
RR 우리는 분명 페이 컬렉션으로만 인정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죠. 작업을 할 때 다른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개입할 수도 있지만 온전히 그 브랜드에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건 마치 배우가 무대에 섰을 때 그 역할에만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죠.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오히려 헷갈리거나 우왕좌왕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해요.
VK 시그니처 브랜드인 아퀼라노 · 리몬디는 당신들의 색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뜻이기도 하군요. 아퀼라노 · 리몬디에서 꼭 사야 할 아이템을 추천한다면요?
TA 코트! 우리는 아우터에 강하죠. 막상 옷을 입어보면 재킷이나 외투를 잘 매치해서 입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질 좋은 제품을 좋은 가격에 제시하고 있어요. 디자인은 동시대적이지만 고급스럽죠. 우리는 코트를 디자인할 때 서로 다른 체형을 가진 다섯 명의 모델에게 옷을 입혀 봅니다. 그들 모두에게 잘 어울리도록 디자인해야 하니까요. 옷걸이에 걸려 있을 땐 잘 모르지만 누군가 입은 걸 보면 그게 우리가 디자인한 코트인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실제 우리 옷을 입는 사람들은 패션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패션쇼에서 보여지는 것만큼이나 얼마나 실용적으로 착용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죠.
VK 놀라워요! 당신들의 코트를 꼭 입어봐야겠어요.
TA 그럼요, 밀라노에 오면 우리 쇼룸에 꼭 놀러와요. 진심으로 초대하고 싶어요.
VK 본사 건물은 어디에 있어요?
TA 돌체앤가바나 본사가 있는 메트로폴 맞은편이에요. 근처에 프라다 오피스도 있어요, 창밖으로 다른 회사들 저격하기 좋답니다. 킬빌처럼요. 탕, 탕!
VK 하하! 다음 시즌 컨셉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RR 70년대풍과 90년대, 그리고 미니멀리즘을 더할 거예요. 지금 추세는 70년대와 90년대죠. 그걸 미니멀하게 표현하는 겁니다. 강한 색감을 배제하고 절제되고 세련된 색을 사용할 거예요. 그렇지만 모든 것은 변화의 추세를 따르고 있어 2초 전에 시작한 것도 다른 걸로 바뀌곤 하죠. 다시 밀라노로 돌아가면 처음 컨셉에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이 더해질 거예요.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 모델
- 최준영, 황기쁨
- 스탭
- 헤어 / 오종오, 메이크업 / 이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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