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enseuse
모델 이혜승은 남다르거나 특별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공감하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사진과 함께 삶의 다음 챕터를 준비 중이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휘황찬란한 티 카페는 이미 폐점한 곳이었다. 빈 건물 옆에서 이혜승이 터덜터덜 걸어오며 별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문 닫은 지 꽤 됐대요.” 어차피 잘된 일이었다. 우리는 각자 이 장소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호전적으로 햇빛을 반사하던 금장 외관이 뿌예질 때까지, 우리는 이 카페의 존폐 여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펑크나 그런지 룩을 좋아하는데, 너무 눈에 띌까 봐 마음껏 못 입겠어요. 키 때문에 아주 평범하게 입어야 겨우 묻히거든요.” 헐렁한 삼선 트레이닝 저지에 찢어진 청바지를 가리키며 자신이 입을 수 있는 그런지 룩은 고작 이 정도라고 우울한 투로 말했다. 걸을 때마다 게으르게 늘어진 바짓단 아래로 빨간 신발 앞코가 수줍게 드러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기보다 남들의 주목이나 관심이 부담스러운 쪽이다. 그녀는 누구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놔두길 바란다. “사실 <아이 엠 어 모델> 시즌 3에서 우승했을 때도 타이틀이 버겁게만 느껴졌어요. 동기들과 출발점이 다른 것도 싫었고,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에게 잊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강한 거부감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 완벽주의적 성향, 방송을 통해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괴리감 그리고 폭풍 전야 같은 10대의 사춘기.
그녀에게는 아웃사이더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아름다운 것들이 제 어력을 상실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패션계 한가운데서 쇼핑이나 새로운 컬렉션에 대해 심드렁한 모습은 괴짜 같다. “유행에 대한 감각이 둔한 것 같아요. 저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좋게 느껴지는 게 좋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모델 초기 시절, 자신이 패션계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걸 딱히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들로 가득한 촬영장에서 그녀는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무엇보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싶었다. 다행히 두 번의 해외 활동은 그녀에게 답을 줬다. “모델로서 이혜승에 대한 테스트 같은 거였죠. 해외에서 모델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내게 맞는 다른 분야를 찾아볼 작정이었어요.” 색다른 환경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건 효과가 있었다. 모델 활동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좋아졌고, 인정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해외로 나갔을 때, 우리는 그녀가 굵직한 곳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목격했다.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자연스레 좋은 결과도 따라온다는 걸 알았죠. 제 삶의 가치관에 확신을 갖는 계기였어요. 처음으로 진정한 평안이란 걸 경험했고요.”
이런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듯 매달리게 된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더 높은 곳에 닿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혜승은 지난해 8월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고 아쉬움은 없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모델로서 궁금한 것들이 해소되니 그다음 단계로 갈 차례였을 뿐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0’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은 거 같고요.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잖아요. 설사 안 된다고 한들 뭐 어때요?”
그녀가 사진과 영상에 관심을 갖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10년 동안 패션모델로 일하다가 미생물 학자나 수학 선생님이 되는 쪽이 훨씬 더 신선한 전개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흥미를 느끼는 건 연출이다. 해외 진출을 위한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면서 사진적 구성을 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곧바로 5D 카메라를 장만했다. 캐시미어 스웨터 같은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던 그녀가 짐짓 객관적인 어투로 엄숙하게 말했다. “취미인데도 그렇게 큰 사진기를 산 건, 그러니까 저도 꽤 사진을 찍고 싶었던 거죠.” 최근 그녀는 리코 카메라로 스냅 사진을 찍고 있다. 아직 습작이라고 하기엔 가벼운 작업들이다. 얼마 전 오픈한 셀린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촬영한 화보는 예상보다 일찍 온 기회였다. “지금은 구상 기획 단계에 불과해요. 습작이라도 본격적으로 해야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 작업실도 최근에 마련했는걸요.”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꽤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니 세모눈을 치켜뜬 여러분, 마음의 여유를 갖고 봐주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로 들어갈까도 생각해봤지만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똑같은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건 제 방식이 아니고요. 개인적으로 한국 특유의 정해진 틀이나 절차는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 모두가 똑같아지지 않을까요?” 다행히 그녀 주위엔 무시무시한 사수 대신 언제든 도움말을 주는 사진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만나면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정말 동료 같은 느낌이죠. 그렇지만 전 아직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친구라는 게 맞아요.” 그녀는 이 만남이 끝나면 을지로에 있는 조기석의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위한 셀프 포트레이트를 촬영할 예정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한참 모자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객관적이다. “저의 취향이 절대 새롭지 않다는 걸 저 역시 잘 알고 있어요. 자신만의 색깔에 대한 제 고민의 결론은 그 결과물을 모아놨을 때 떠오른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강요받거나 간섭받지 않은 저만의 색이 드러나는 작업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친절한 설명 또한 잊지 않는다. “제가 찍고 싶은 사진은 많이 덜어내는 쪽이죠.” 패션계는 화려하고 특별한 것으로 가득하다. 심미적 카오스의 세계에서 고요한 작은 섬 같은 그녀는 삶에 맞닿은 일상성을 관찰한다.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포착하고 싶어 하고,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어 한다. “저의 취향은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대중 지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렇지만 그게 사진이든 영상이든 정말 좋다면 누가 봐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화려한 삶이나 홀로 고매한 예술가를 추구하는 게 아니니까요.”
꽤 수줍음 많고 은둔 취향인 그녀는 자신이 사진가처럼 비칠까 봐 걱정했다. 어쭙잖은 실력을 인지도로 상쇄하려는 이미지는 최악이다. 그리고 자신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그녀는 자신이 불안한 미래의 안갯속을 헤매는 수많은 20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내가 하는 것만 중요하고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위험해요. 물론 나 자신에게 소중하고 특별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특별하니까요. 전 이렇게 살고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에요.” 이혜승은 ‘이제 막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델’이라고 자신을 정의하며 멋쩍게 웃었다. 알 수 없는 길로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사진으로 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어요. 잘하면 사진집 한 권 정도 낼 수 있을까요? 그냥 좋아서 하는 거죠.”
그녀에게 이전 사진 작업도 싣고 싶다고 말하자, 눈을 크게 뜨고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보일 거라는 의식 없이 찍은 사진뿐이라며 보여주길 망설였다. 이 중에 뭘 싣죠? 만약 싣는다면 몇 컷이나요? 용량이 적은데 괜찮을까요? 완벽주의자는 완벽해서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완벽주의자다.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LEE HYE S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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