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ffiti Freedom
LA에서 한복 입은 흑인 그래피티를 그려 단숨에 주목받은 그래피티 라이터 심찬양. 그는 거짓말하지 않는 그림으로 힙합 신에 남길 바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심찬양 말고, 소개할 때 덧붙이고 싶은 수식어가 있는가?
그래피티 아티스트보다 그래피티 라이터로 불리길 원한다.
둘의 차이점은 뭔가?
글 쓰는 작가를 라이터라고 하지 않나. 그래피티를 처음 시작할 때 글자를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때 그래피티 라이터로 불렸고, 작품이 회화의 형태를 갖춰갈수록 아티스트로 불리더라. 하지만 뭔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힙합이 멋있어서 그래피티를 시작했기에, 와일드한 느낌의 라이터란 호칭이 더 멋지다.
그래피티 문화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래피티는 조금 공격적인 그림이다. 갤러리의 전시된 그림은 “와서 이 그림 보지 않을래?”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건다면, 그래피티는 길을 걷다 갑자기 눈에 확 띈다. 내 삶에 훅 들어와버린다. “이게 나야, 멋지지 않아?”라며 한 방 때리듯이. 그래피티의 큰 매력이다. 무엇보다 그래피티는 힙합에 머물 때 제일 멋지다. 알다시피 힙합 4대 요소는 비보이, MC, DJ, 그래피티다. 서로 친분이 두텁고 작업도 함께 하곤 한다.
LA와 뉴욕에서 그린 한국적인 그래피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는가?
필리핀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 그래피티가 유명하다는 호주에 1년 반 정도 머물렀다. 귀국해 2년 정도 돈을 모아 미국에 갔다. LA에서 더 컨테이너 야드(The Container Yard)를 우연히 소개받아 작은 벽을 얻었다. 그곳에 처음으로 한복 입은 흑인을 그렸다. 하루 만에 급히 그려야 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지만 사람들이 그 컨셉을 무척 좋아했다. 그 후에 역시나 한복 입은 흑인에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글귀의 그림을 그렸고, 점점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 흑인 여성들이 그림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메시지를 많이 보냈다.
본인 그래피티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국적인 요소가 많다. 이 스타일을 시작한 지는 6개월밖에 안 됐다. 11년 동안 활동하면서 한글을 쓴다든지, 한복을 그리는 건 멋없다고 생각했다. 그래피티가 흑인 문화기 때문에 그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면 가짜 같았다. 흑인들, 미국적인 것만 그리려고 했다. 미국에 갔을 때 40년 전부터 쫓겨 다니며 그래피티를 그려왔던 현지 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거다. “40년 전 우리가 어릴 때 만든 문화가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지다니 놀랍다. 한국 사람이 자기 문화를 섞어서 보여주는 그림이 새로울 것 같다.” 그때부터 한국적인 뭔가를 할 용기가 났다. 나의 한국적인 요소가 누군가에겐 특별할 수 있구나. 그렇게 내 개성을 찾았다. 사람들이 늘 내게 자기만의 무기, 특별함을 찾으라고 얘기했다. 무척 스트레스였다. 처음엔 그림을 잘 그리는 데만 집중했다. 엄청 잘 그려버리면 “이 정도 그리는 애는 걔뿐이야”라며 그게 개성이 될 수도 있으니까. 또 그림 실력이 되면 표현의 제약도 적어지니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한복을 입은 흑인을 그릴 때도 다행히 자연스럽게 완성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잘 그린다는 건 아니다.
유명해진 뒤에 무엇이 가장 많이 변했는가?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나아졌다. 미국 가기 전에는 한 달에 20만원만 생겨도 행복할 거 같았다. 호주에선 친구 집에서 “두 달만” 이래놓고 2년을 머물렀다. 같이 그림 그리는 친구인데 지금이라도 진짜 잘해주려고 한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있다. 배부른 소리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작년 이맘때는 돈 못 벌어도 그림 그리면 행복했는데, 점점 일로 그리게 되니까 마음이 불편하다. 찾아주니 감사한데 생각이 많아진다. 평생 처음 있는 일이니까.
이번에 언더아머(Under Armour) 코리아의 강남 브랜드 하우스 매장에 그래피티를 선보였다. 언더아머의 언더독 정신으로 선정한 스테판 커리의 시그니처 농구화 ‘커리 3zerO’를 기념한 콜라보레이션이다. 상업적인 콜라보레이션은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언더아머는 개인적으로 옛날부터 좋아했던 브랜드다. 게다가 좋은 일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 농구 선수 스테판 커리를 그리는거라니 해보고 싶었다.
그래피티에 이순신과 천사 등의 요소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스테판 커리에 대해 두 가지를 얘기한다. 실력과 인성. 커리는 비슷한 성적을 내는 선수들 사이에서 평균 신장이 작은 편이다. 열세를 극복한 선수기에 이순신 장군을 그려보고 싶었다. 열세 척의 배로 수백의 적을 물리친 분의 정신과 기백을 표현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커리가 이 그림을 보고 감동 받았으면 좋겠다. 천사 요소는 커리의 인성 때문이다. 그는 아프리카에 모기장을 보내는 등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하늘이 누군가를 돕는다면 그런 사람을 돕지 않을까 해서 천사를 등장시켰다.
아까 눈물을 흘린 흑인 여성의 예처럼, 나를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그래피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됐다. 초기 그림을 그릴 때와 꿈이 조금 바뀌었을 것 같다.
상황은 바뀌었지만 꿈은 그대로다. 여전히 내가 행복하지 않은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다.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누군가 내 그림을 보고 즐거워한다면 감사하지만 말이다. 또 평생 그림을 그릴 때 거짓말하지 않길 바란다. 애인처럼 사랑하는데, 애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지 않나. 마지막으로 신학 공부를 할 때 꿈이 아프리카 선교사였다.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도 파고, 그들이 한복 입은 모습을 그려서 선물하고 싶다.
꼭 한 번 그래피티를 그려보고 싶은 공간이 있는가?
너무 많다. 행인이 많이 다니는 도로변의 큰 빌딩에 그림 그리는 상상을 계속했다. 한국이라면 이태원이나 강남 한복판의 큰 벽 어디나. 같은 그림을 그려도 관객 100명과 1,000명의 의미가 다르다. 내 행복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으면 더 좋겠지 싶다.
한국 그래피티의 실정은 어떠한가?
한국에서 그래피티로 살아남았다면 진짜 잘하는 작가다. 미국에서 그래피티는 굉장히 자유롭기 때문에 동네마다 크루가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는 프로로 활동하는 분들이 20명 정도다. 이분들은 세계에 나가도 손색이 없다. 사실 한국에서 합법적인 그래피티로 먹고사는 분은 일부다. 불법적인 그래피티를 하는 분들은 자기 돈 써가며 이 문화의 오리지널리티를 지키고 있다. 내가 못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에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불법이기에 지지한다고 하기 조심스럽지만, 나는 양지에서, 그분들은 음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LEE YOON 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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