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김희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빨강

2023.02.26

김희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빨강

한 편의 드라마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를 현재로 이끌어냈고, 김희선은 다시 그 길 한가운데에 섰다. 20년이 넘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가 이 세계를 살아낸 독자적인 방식은 요즘 시대에 더욱 환호받고 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김희선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그녀는 무엇을 하든 나날이 더욱 투명해질 것이다. 이것이 김희선을 더욱 고유한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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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이 <보그>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건 지난 2005년이었다. 파리 14구의 주택가에 위치한 스‘ 튜디오 돌체’에서 펼쳐진 김희선의 촬영기를 다룬 기사였다. 파올로 로베르시의 개인 작업실, 사진가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희선에게는 소피 마르소 같은 통속적 인 면도 있고, 이자벨 아자니 같은 근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있는가 하면, 안토니오니 감독 영화의 여주인공들처럼 미스터리한 팜므 파탈적인 요소도 있다.” 나는 그의 말을 12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실감한다. 지극히 평화로움과 치밀한 긴장감이 공존하는, 우아해 보이기도, 트렌디해 보이기도 한 얼굴. 기꺼이 구본창 작가의 피사체가 된 김희선의 얼굴은 정체를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고,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투명한 그녀의 얼굴은 그래서 <보그> 편집장의 말처럼 ‘명징한 아름다움’이다. 이견이 있을 수 없고, 이의를 제시할 사기조차 꺾어버리는 아름다움. 세상은 그런 그녀를 두고 ‘(여전히) 예쁘다’고 하지만, 그 말은 뭔가 좀 부족하다. ‘누군가를 오래 알거나 그 사람 안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아름답다 할 수 없다’는 오래된 격언을, 김희선은 21세기에도 진실로 만들고 있다. 그녀가 숱한 ‘예쁜 여자’들과 다른 점은 그녀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붉은 맨드라미를 든 김희선을 지켜보며 했다.

코트와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앙고라 스커트는 프라다(Prada), 부츠는 펜디(Fendi), 망사 베일과 다이아몬드 반지는 샤넬(Chanel).

코트와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앙고라 스커트는 프라다(Prada), 부츠는 펜디(Fendi), 망사 베일과 다이아몬드 반지는 샤넬(Chanel).

불과 몇 분 전, 나는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배우의 시간이란 세상의 시계와는 상관없이 제 나름의 확고한 규칙으로 돌아가는 터라 시차로 인한 피로감이 느껴질 법도 하다. 지난겨울에 촬영한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는 올여름에 방영되었고, 우리는 첫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 언저리에 만났으며, 그럼에도 다소 더운 오후에 다시 겨울 코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엄동설한에 입김을 없애기 위해서 얼음을 입에 물고 있고, 맵시를 살리기 위해 차가운 실크 블라우스 한 장만 걸치고, 얼음판 같은 대리석 바닥을 15cm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녀야 했던 지난겨울에 비하면 다소 길어진 오늘 촬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김희선은 예의 발랄한 ‘라’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흔한 멜로도, 흔한 아이돌도, 비밀 병기도 없는” 드라마의 편성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겪었고, ‘90년대 언니들 어쩌고저쩌고, 이젠 김희선만 남았네’라는 식의 신문 기사가 주는 부담의 시간도 넘겼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줄타기를 막 끝내고 땅에 두 발을 내린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프릴 장식 벨벳 원피스는 럭키슈에뜨(Lucky Chouette), 터틀넥 니트와 레드 힐은 막스마라(Max Mara).

프릴 장식 벨벳 원피스는 럭키슈에뜨(Lucky Chouette), 터틀넥 니트와 레드 힐은 막스마라(Max Mara).

“일단 제 주변 사람들이 내가 짜증을 안 부려서 좋아해요.(웃음) 강호동 아저씨가 그랬죠. ‘희선 씨, 제 방송은 모니터 안 해도, 희선 씨 꺼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 마신 날에도 모니터 합니데이. 모니터 안 하면 또 얼마나 짜증을 낼까, 하면서.’ 제 주위 분들이 이렇게 절 지극히 신경 쓰고 있구나, 이들에게 잘해야겠다 생각했죠.(웃음) 사실 이번엔 참 희한한 기분이었어요. 사전 제작도, 드라마를 100% 시청자의 입장에서 본 것도 처음이에요. 지금도 어디선가 촬영 중인 것 같은 느낌이더군요. 장점이자 단점인데, 저는 극에서 매우 빨리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한순간에 확 들어갔다가 딱 빠져나오는 스타일이죠. 그러니까 종방연을 할 때 이미 우아진을 떠나보낸 거예요. 그리고 3~4개월 있다가 드라마를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재석, 저 나쁜 놈, 안타까울 정도로 순수한 놈, 그래도 밥은 먹고 다니냐?(웃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품위 있는 그녀>는 굳이 어느 특정 강남 재벌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매우 개연성 있다. 박복자가 천박함과 인간성 사이 어디쯤의 욕망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돌진하는 동안, 그녀와 얽힌 모든 인물들의 스텝은 완전히 꼬여버린다. 처음엔 꽤 느긋하다가, 잰걸음으로 걷다가, 허둥거리다가, 헛발질을 하다가, 비틀거리다가, 꼬꾸라짐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중에 유일하게 우아진만 한결같은 보폭으로 걷는다. 우아진의 역할만 유일하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그렇기에 아수라장이 된 그들만의 리그에서 우아진은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우아진의 캐릭터를 있을 법한 인물로 만든 것은 김희선이 가장 잘한 일이다. 박복자식 상류사회로의 진입기가 드라마틱해질수록, 우아진의 상류사회로부터의 탈출기는 더욱 납득이 되었기 때문에, 김희선이 아닌 다른 여배우가 분한 우아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모직 테일러드 코트와 하이넥 시폰 블라우스, 스톤 장식 장갑은 지방시(Givenchy).

모직 테일러드 코트와 하이넥 시폰 블라우스, 스톤 장식 장갑은 지방시(Givenchy).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보면 진짜로 날것만 같잖아요. <품위 있는 그녀>를 보는 시청자분들도 제가 꼭 우아진처럼 보인다, 꼭 맞는 옷을 입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저도 제가 마치 우아진이 된 듯 재미있게 연기했지만 사실 참 턱없이 부족한 저에게는 감사한 칭찬이었죠.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를 통해 제가 많이 배우는 이런 경험도 흔치 않을 거예요. 극 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때마다 다른 톤을 가져가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재미 있었고, 공사다망한 우아진처럼 저도 현장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도 좋더군요. 물론 그 바쁜 와중에 종종 멍 때리며 앉아 있을 때도 많았어요. 내가 우아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면서. 그저께 남편과 싸운 것도 생각나고. 나도 그렇게 막말하지 말고 우아진처럼 해볼걸, 혼자 대본 읽다가 나의 지난 일을 돌이켜보곤 했죠. 외우라는 대사는 안 외우고.(웃음)” <품위 있는 그녀>가 획득한 핍진성은 100% 백미경 작가의 재능이자 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종종 <아내의 자격>이나 <풍문으로 들었소> 같은, 대한민국 상류사회를 풍자한 불세출의 드라마와 정성주 작가를 떠올리곤 했는데 마침 얼마 전 백미경 작가가 정성주 작가를 가장 존경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봤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스릴러나 멜로 등 장르의 힘에 포섭되지 않은 채 현실을 맛깔스럽고 신랄하게 보여주는 두 명의 통찰력 넘치는 작가를 가진 셈이다. 김희선은 백미경 작가의 탄탄한 자료 조사로 구성된 대본에 ‘강남 엄마들 이렇습니다’ 같은 몇 가지 확증을 주었다. 알려진 바대로 그녀 역시 둘째 며느리에, 강남이라는 특구에 살며, 극 중 강남 사모들처럼 브런치 모임도 하고, 경시대회에 나간 아이를 학교 앞에서 기다리며 열심히 뒷바라지한다. 학원 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할로윈 때 십시일반 모아서 카페에서 파티를 하기도 하는 브런치 모임의 구성원들조차 감탄한 리얼리티. 비록 이들에게는 요트가 없지만 말이다.

팬츠와 레이스업 앵클 부츠는 지방시(Givenchy).

팬츠와 레이스업 앵클 부츠는 지방시(Givenchy).

“백미경 작가님이 그러더군요. 너처럼 단순하고 욕심 없는 애가 우아진 연기는 참 잘했다고요.(웃음) 그녀와는 언니 동생 할 정도로 친해요. 언니가 <힘쎈 여자 도봉순> 후 말했죠. ‘초등학생들은 그만 일찍 자라, 어른들의 이야기를 쓸 거니까.(웃음)’ 그래서 더 기대했어요. 우아진 역할을 저를 위해서 썼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처음엔 박복자 역할이 눈에 더 든 것도 사실이에요. 5kg 찌웠다가 어떻게든 빼서 돌아오겠다고 떼를 썼지만, 언니는 ‘그냥 니가 우아진이다’라 했고, 마음을 돌렸어요. 언니는 재주도 참 많아요. 곧 직접 만든 노래도 나올 거예요. 저는 그냥 작곡은 하지 말고 작사만 하라고 했지만, 들어보면 좋긴 좋아요.(웃음) 다음 작품에서 내가 보조 작가 하겠다고, 서로 여유 있게 농담하고 그래요. 이번 작품으로 좋은 친구를 얻은 셈이죠.” 질끈 묶은 머리에 민낯의 왈가닥으로 나오는 <섬총사>뿐 아니라 몇몇 회자된 예능을 보면서, 김희선이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시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댓글을 읽어도, 주위에 물어도, 그녀에 대한 의견은 공통적이다. “김희선은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좋아져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엄마 역할을 척척 해내면서 그녀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는 크게 상승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솔직한 발언과 소탈한 태도도 큰 몫을 했다. 예전 김희선이라는 스타를 철저한 객체로 두고 날선 시선으로 관찰하기에 바빴던 대중들은 이제는 그녀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예능에서 술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게 흠이 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거니와 더 이상 그녀는 그런 팩트로 위협을 받지도 않는다.

모직 테일러드 코트와 하이넥 시폰 블라우스, 팬츠와 스톤 장식 장갑, 부츠는 지방시(Givenchy).

모직 테일러드 코트와 하이넥 시폰 블라우스, 팬츠와 스톤 장식 장갑, 부츠는 지방시(Givenchy).

물론 정작 김희선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꼬이거나 맺힌 데 없고 유머러스하다. 변한 거라곤 후배들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할 수 있는 선배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억지로 잘 보이려고 하지 마라, 최대한 솔직하게 대중들을 만나라, 이미지를 착하고 아름답게만 포장하지는 마라” 등등. “엄마가 되고 40대로 접어들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좀 변했어요.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안목도 생겼죠. 어릴 땐 제 일이 끝나면 개인 생활 하느라 막 바삐 가곤 했는데, 지금은 다른 배우들과 연락처도 주고받고, 얘기도 하고, 상의도 할 여유가 생겼어요. 이번엔 극 중 강남 사모들의 모임, 여자 배우들의 모임, 선배 선생님들과의 모임이 생겼고, 우아진처럼 제가 여기저기 다 끼어서 챙겨요. 그런 모습이 대중들의 눈에도 편안해 보인 것 같아요. 예전엔 좀 그랬는데, 이제는 믿고 볼 수 있게 되었다고들 해주시죠. 좋은 말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부작용도 있더군요. 안티도 많이 없어지고, 또래 여성 시청자들의 지지와 공감도 얻었지만, 그래서인지 간혹 쓴소리 하는 댓글 하나에 더 마음이 쓰여요. 예전엔 욕이 반이고 칭찬이 반이어도 전혀 신경 안 썼거든요.(웃음) 가끔은 칭찬과 격려 다 두고 왜 내가 이 이야기에 신경을 쓰고 있나 싶을 때도 많아요. 더 행복하고, 더 감사해야 하는데…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내공이 더 필요하구나 싶어요.”

코트와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앙고라 스커트는 프라다(Prada), 부츠는 펜디(Fendi), 망사 베일과 다이아몬드 반지는 샤넬(Chanel). 만개한 꽃에서 영감을 얻은 의자는 케네스 코본푸(Kenneth Cobonpue at Indah Design).

코트와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앙고라 스커트는 프라다(Prada), 부츠는 펜디(Fendi), 망사 베일과 다이아몬드 반지는 샤넬(Chanel). 만개한 꽃에서 영감을 얻은 의자는 케네스 코본푸(Kenneth Cobonpue at Indah Design).

지금 생각해도 인상적인 건 건 김희선이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이자 일종의 ‘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예계에 깊이 속해 있거나 그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 애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드라마, 광고, 영화, 심지어 배철수와 함께 음악 프로그램 MC였을 정도로 전방위적인 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결같이 그늘 없는 얼굴과 발랄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시야에 짠 나타났다가 무언가를(스타일이든 패션 아이템이든) 대대적으로 성공시킨 후, 어느 순간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 쇼 비즈니스 세계에 첫발을 들일 때부터 그녀는 스타가 아닌 적이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성공하겠다는 강렬한 야심도 읽히지 않았다. ‘야망 없는 예쁜 청춘스타’는 게다가 저돌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기까지 했기에, 이런 태도가 김희선을 둘러싼 이런저런 오해를 낳기도 했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노력하고 모험하고 분투하는(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자가 지지와 사랑을 얻기도 훨씬 수월하다는 진리를 김희선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희선은 우리 시대가 갈망해온 스타로 존재했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김희선이라는 좀 다른 종류의 스타가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 살아남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김희선은 예컨대 오열하는 감정 신을 앞두고도 촬영 직전까지 떡볶이 먹고, 게임 하고 놀다 촬영 몇 분 전에 그 상황에 몰두하는, 자칭 ‘벼락공부’ 스타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처음엔 연기라기보다는 서태지 오빠 보려고, 머리 안 잘라도 되니까, 수업 안 들어도 되니까 했죠. 그런데 용돈도 주시는 거예요. 일을 많이 하면 예쁜 옷도 살 수 있겠네, 어린 마음에 그랬죠. 그렇게 작품을 하나하나 만나고, 대사 외우고, 연기 연습 받고, 칭찬 받고, 시청률도 잘 나오고, 돈도 더 벌고. 노력한 만큼 뭔가 되네, 했어요. 설사 그게 아니어도, 그 시절엔 모든 일이 다 잘될 것만 같잖아요. 멋모르고 시작하느라 엉망이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많이 배웠죠. 모든 결과가 내 몫인 것만 같아 자격지심에 시달릴 때도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 시간이 지나 있더라고요. 무언가를 기필코 극복하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잊힌 부분도 있고요. 너무 안간힘을 쓰면 더 안 되고, 치밀하게 계획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문득문득 내가 그 상황에서 벗어났구나, 그 시절을 겪었구나 싶어요. ‘난 이만큼 노력했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다만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흔히들 이기는 싸움을 하라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싸움은 이겨놓고 하는 거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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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은 <품위 있는 그녀> 이야기를 9월까지만 할 예정이다. 10월부터는 다 떨쳐버린 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거라고 했다. 소싯적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데는 영 관심이 없는 그녀가 할 일은 다시 김희선으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또 다른 캐릭터를 만나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게 바로 김희선이다. 화려한 과거를 영위한 김희선은 자신의 현재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안다. 그런 그녀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김희선은 10여 년 만에 광고 시장에서 뜨거운 러브 콜을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게임 광고를 찍었다. “철갑 두르고 활쏘는 컨셉이 아니었기에 맘에 들었어요.” 젊은 여자 스타들의 전유물인 소주 광고도 찍었다. “고급 소주라, 오크통 앞에서 포즈를 취했죠.” 예전에는 아이스크림, 화장품, 탄산음료 같은 광고가 들어왔지만 이제는 건강 보조 식품, 엄마들의 베스트 메뉴인 카레 같은 게 들어온다. “광고 변천사만 봐도 재미 있어요. 어쨌든 열심히 해야죠.(웃음)” 하루에 70개 매체를 만나 인터뷰도 했다. “전 아직 기자님들 노트북보다는 노트가 익숙하더라고요.” 요즘은 코미디 영화에 도전하고 싶다. “하루에 열두 번씩 바뀌긴 하지만요.” 그리고 이름만으로 아련하게, 독보적으로 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우리 엄마가 정윤희 배우를 보고 태교를 하셨대요.” ‘너, 김희선 모르지?’ 같은 문장이나 감탄사 하나로 설명이 되는 여자 말이다. “제가 어른들에게 잘 못할 거라 생각하는데, 워낙 늦둥이에 외동이에요. 엄마, 아빠가 친구였고, 그래서 어른들 대하는 게 익숙해요. 게다가 어른이라고 너무 깍듯하게 하면 오히려 불편해하시더라고요. 어쨌든 지금은 문제 안 일으키고 내 밥벌이는 하니까.(웃음) 우리 엄마가 나 키운 만큼만 제 딸을 키워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엄마는 대장부라 내가 성적을 좀 못 받아와도, 왼손잡이여도 전혀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착하게 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면 그런 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제 딸아이에게 잔소리도, 당부도 안 해요. 마찬가지로 ‘이 일이 제겐 천직입니다, 죽을 때까지 연기하겠습니다’라는 이야기도 안 해요. 못하겠어요. 그런 분들은 멋있고 존경하지만, 저는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주어진 대로, 어떻게 하다 보니 20년 넘게 연기를 하고 있잖아요. 저는 그런 저를 칭찬해요.”

모직 코트와 싸이하이 부츠는 펜디(Fendi),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모직 코트와 싸이하이 부츠는 펜디(Fendi),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개인적으로 <품위 있는 그녀>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연 품위란 무엇인가 고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박복자가 우아진처럼 되고 싶어한 최초의 계기는 우아진이 박복자에게 보여준 작은 배려였으니, 인간을 향한 배려가 품위일까? 세월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품위는 더욱 빛을 발하니, 잘 나이 드는 것이 품위일까? 우아진처럼 자기 인생을 찾아나서는 자유가 품위일까? ‘난 품위 있는 여자야’라는 시를 쓴 어느 시인처럼 버지니아 울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함이 품위일까? 기품이나 인품과는 또 다른,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인간적인 매너가 품위일까? 그리고 김희선은 내게 또 하나의 품위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었다. “품위, 꼭 필요할까요? 품위를 너무 의식하고 신경 쓰면 가식이 안 들어가려야 안 들어갈 수가 없겠죠. 제가 아주 좋아하는 쉬운 한자 구절이 있어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자기 자리에서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고, 위치에 맞게 행동한다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품위 있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예전부터 ‘자기다운’ 게 좋았어요. 어떻게든 더 높이 오르려고, 뭔가가 되려고 악다구니 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내 방식대로, 순리대로 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 결과물로서의 지금을 살고 있어요.” 나는 이렇게 간단명료한 ‘품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불어 이렇게 산뜻하고 투명한 여배우도 본 적이 없다. 김희선의 미래는 그녀식의 품위를 동력 삼아 고유의 질서를 창조하며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에디터
    윤혜정
    패션 에디터
    손은영
    포토그래퍼
    KOO BOHN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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